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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에 버려진 두 소년의 삶, 반전 있네

[서평]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를 읽다

등록|2017.05.19 16:23 수정|2017.05.19 16:24
지금이야 '무라카미 하루키'라 하면 일본 문단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현대문학의 거장이지만, 그에게도 초년병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막 소설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던 하루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지금 소개할 소설인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이다.

▲ 무라카미 류, <코인로커 베이비스> ⓒ 북스토리

하루키는 이 작품을 읽은 뒤 이처럼 강렬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본인의 신작에 몰두하였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공식 출판물이자 오늘날 하루키 초기 3부작으로 분류되는 <양을 쫓는 모험>이다.

같은 성씨의 작가에게 이처럼 강한 영향을 준 무라카미 류. 그는 하루키 보다는 한 세대 앞서 문단에 데뷔한 인물로 일본판 486 세대인 '전공투 세대'와 시대를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69>과 같은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의 문학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학생운동의 정서는 깊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일본 사회의 다른 저변을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바로 폐색감과 우울의 정서에 빠져들던, 아직 지상에 드러나지 않던 일본 사회의 심리적 패배감, 혹은 압박감의 영역이다. 

1970~1980년대 일본에서는 아기를 낳았으나 그 아기를 책임질 여건이 되지 못한, 혹은 그럴 의지가 없는 여성들이 아기를 코인로커(역 등에 비치된 동전을 넣고 사용하는 사물함)에 감금시키는 형태로 버려 갇힌 아기들이 사망한 채 발견되는 사건들이 수차례 발생하였다.

<코인로커 베이비스>는 일본 현지에서 1981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당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이 불편한 진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세상으로 나오자마자 어머니의 손에 의해 코인로커에 감금되었으나 기적처럼 살아남은 두 소년 - 하시와 기쿠. 이들의 삶을 통해 이야기는 전개된다.

두 소년은 모두 어릴적 버려진, 그로인해 죽을 뻔한 경험으로 유년기부터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채 자란다. 다만 그 트라우마의 발현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표출된다. 기쿠의 경우는 강한 폭력성, 혹은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적극적 몰두의 형태로 내적 혼란을 분출해낸다. 반면 하시는 내성적인 성격과 편집증적인 행위들로 침전한다.

두 소년들의 이 같은 표출은 각자 정반대의 형태로 바뀌는 두 차례의 '역전' 현상을 경험한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을 계기로 형 기쿠는 거대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반면 '남창'으로 살아가다 우연히 가수 데뷔 기회를 손에 넣은 하시는 적극적으로 유명세와 성공에 대한 야망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첫 번째 역전이다.

그런데 살인 이후 무기력하게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쿠는 강력한 정신환각제 '다투라'를 찾아내어 도쿄를 공습하게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겠다는" 목표를 수립하는데... 반면 하시는 부와 명예를 얻는데 성공하지만 오히려 끊임없는 공허감과 형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아내를 살해하는 정신이상증세에 빠져버리고 만다.

전혀 다른 성격과 행동의 두 소년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류는 당대 일본 사회가 코인로커에 갇힌 아기들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날 때부터 모든 개인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제약에 강하게 억눌리고 있다는 것 - 그것이 그가 가진 문제의식이었다.

영아를 사물함에 유기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는 세태는 'Japan No.1'의 실체에 대한 고발이었다. 고도성장과 버블경제의 정점으로 치닫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중반의 일본 사회는 엄청난 호화로움을 구가하고 있었다. 전세계의 경제발전의 롤모델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급속히 고도화, 서구화된 사회구조 안에서 개인의 가치를 잃어가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자유와 개인의 주체성 상실이라는 번영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무라카미 류는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 몰려들어 우리를 제멋대로 요리하려 한다, 그렇다, 무엇하나 변한 게 없다, 우리가 코인로커에서 큰 소리로 절규했던 그때부터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거대한 코인로커, 그 안에 풀장과 식물원이 있고, 작은 애완용 동물과 벌거벗은 사람들과 악단, 미술관, 영사막, 정신병원들이 갖춰진 거대한 코인로커에서 우리들은 살고있는 거야." (p.585)

"난 필요 없는 존재였어, 그래서, 난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되려고 했어, 그렇지만 말야, 니바, 나만이 아니었어, 필요한 사람 따윈 어디에도 없는 거야, 모든 인간은 불필요한 거라구, 그 사실이 너무도 서글퍼서 난 병에 걸렸던 거야." (p.702)

거대한 시대라는 물결 하에서 억눌린 정서의 뒤틀린 표현은 오늘날까지 일본 문학 전반에서 빈번하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호황 세대의 끝에 그간 감추어져 있던 일본인들의 심리적 불안과 우울이 드러나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구체화된 것이다. 해결 방법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한 세대가 넘게 지났음에도 오히려 류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잊힌 개인과 주체적 개체의 가능성은 과연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코인로커 베이비스>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구속의 해체, 즉 기쿠의 거대한 무기력으로부터의 탈피나 하시의 정신이상증의 극복 등이 작중에서 상상의 약물 '다투라'의 존재와 발견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다투라'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두 소년처럼 억압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일 그리고 성공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작가의 인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을 억합하는 모든 구속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올바른 자유의지를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작가는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구속의 해체 자체가 상상 속의 약물 '다투라'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은, 그런 허구의 충격이 없는 한 결코 새로운 도약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암시한다.

호황과 성장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끝나가며 경제적 찬사가 미디어에서 자취를 감추자 오늘날 한국에서도 80년대의 일본이 마주하기 시작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제약에 대한 물음표가 제기되고 변화에 대한 요구 그리고 거대한 현실의 벽에 대한 우울감이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코인로커 베이비스>가 던지는 메시지가 일본적인 것을 넘어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세대는 이 문제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오랜 세월 이를 그저 품고 살아가게 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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