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평화재단, 여순사건을 '반란'으로 표기해 말썽
한국사 교과서에선 '여수 순천 10. 19사건'으로 표기, 4.3평화재단 "수정 가능한지 논의하겠다"
▲ 제주4.3사건일지제주4.3 평화재단 누리집의 제주4.3사건 일지. 여순사건을 '여수14연대 반란사건'이라 기록해 놓았다. ⓒ 정병진
제주 4.3 평화재단이 누리집 자료실의 제주4.3사건일지에서 여순사건을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 두 차례 표기해 물의를 빚고 있다. 국정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가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 명기하고 역사학계에서도 이 같은 중립적 명칭이 20여 년 전부터 널리 쓰이는 상황이라, 제주 4.3 평화재단의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표기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까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극심한 좌우 갈등과 무력충돌로 제주 일대에서 2만 5천여 명이 희생된 사건을 뜻한다. 지난 2000년에 이르러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58주년 4.3사건 위령제에 참석해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제주 4.3 평화재단은, 2006년 10월 4.3 특별법 개정으로 2008년 11월 제주 4.3정신의 계승과 발전 등을 목적으로 출범한 기관이다. 이 재단의 누리집(http://www.jeju43peace.or.kr/) 제주4.3자료실 '제주4.3사건일지' 메뉴를 클릭해 보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연도별로 주요 사건을 정리해 놓았다. 그 중에서 1948년 10월 19일 기록을 보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발생. 제주도 경비사령관 김상겸 대령, 14연대 반란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됨. 송요찬 연대장 제주도 경비사령관 겸직"이라 적혀 있다.
4.3평화재단 관계자 "여순사건 규정 변화 반영 안 된 듯" 해명
▲ 고등학교 한국사의 여순사건에 대한 서술(주) 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의 여순사건에 대한 서술. 금성출판사, 두산동아, 지학사 등의 한국사 교과서도 모두 '여수, 순천 10.19 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 정병진
이에 대해 여순사건 연구자인 주철희 박사(역사학)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가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사건은 '반란'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주도민 초토화 작전을 위한 출동 명령이라 항명한 거"라며, "다른 기관도 아닌 4.3평화재단이 이를 '반란'이라 말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여수 14연대는 제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느 연대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47년 제주 제9연대장을 역임한 김익렬이 1948년 6월초부터 약 한 달간 여수 14연대 연대장으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 제9연대장 시절인 4월 28일, 더 이상의 동족상잔 비극을 막고자 직접 한라산에 들어가 무장대와 평화회담을 성사시킨 바 있다.
하지만 5월 1일과 3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졌고, 김익렬이 목숨을 건 담판으로 이루어낸 평화협정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미군정은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박진경 중령을 앉혔는데, 그는 취임사에서 "제주도 폭동 진압을 위해서는 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강경토벌을 할 것임을 밝혔다. 이즈음부터 우익단체와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과 토벌작전으로 사망자가 급증하였다.
처음에 3.1절 시위와 경찰의 발포를 계기로 불붙은 무력충돌은 진압이 여의치 않자 당국이 무장대의 토벌을 위해 군부대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더욱 악화됐다. 이때 제주로 출병하라고 명령받은 내륙의 부대는 부산의 제5연대 소속 1개 대대, 대구 제6연대 1개 대대, 여수 14연대 1개 대대였다. 이들 세 부대 중에서 여수 14연대는 이 출병이 제주 도민을 학살하기 위한 명령임을 알고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내걸고 무장봉기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14연대의 무장봉기와 여기에 동조한 민간인들을 제압하고자 무자비한 살육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호남과 경남 등 33개 지역에서 약 1만5천여 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그 깊은 상처는 69년째 아물지 않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을 거쳐 사회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연구도 점차 활발해져 종전에 '반란사건'이란 낙인은 이제 상당히 지워진 상태다.
한데 여순사건과 직접 연결된 제주 4.3평화재단이 사건일지에 여태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이라 표기해 여순사건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런 지적에 대해 4.3평화재단 관계자는 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2003년 제주 4.3사건진상보고서가 확정됐다. 저희는 그 일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거다. 이후 여순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이라든가 변화에 대한 반영이 안 된 걸로 보인다. 작성 시점을 감안해 달라"며 "그 이후 변화에 대한 부기 방법을 저희들 나름대로 논의해 보겠다"고 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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