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의 전화 "문체부 공무원 사표 받으라"
[블랙리스트 16차 공판] 김희범 전 문체부 차관 "청와대, 이념문제에 예민했다"
▲ '블랙리스트'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되고도 출석하지 않아 강제구인장까지 발부된 김희범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왼쪽)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16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문체부 1급 공무원 6명에 대해 전화 받았나요."
"네."
22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311호 법정. 이용복 특별검사보의 질문에 김희범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짧고 단호하게 답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 심리로 열린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블랙리스트'(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사건 16차 공판 증인으로 나온 그는 김 전 실장 지시로 문체부 공무원들의 사표를 받았다고 말했다.
'당신이 다친다'는 청와대의 경고
2014년 7월 문체부 1차관으로 취임한 김 전 차관은 3개월 뒤 김기춘 전 실장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안 된다."
1급 공무원 6명 전원의 사표를 받으라는 김종덕 당시 장관 지시에 '재고해달라'고 요청한 직후였다. 이 공무원들은 유진룡 전 장관과 가깝고 '좌파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지원하지 말라'는 청와대 방침을 따르지 않아 '찍힌' 인물들이었다. 김 전 차관은 그들을 한꺼번에 내보내면 조직이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기춘 전 실장의 전화는 모든 걸 떠나 그들의 사표를 받아내라는 뜻이었다.
이즈음 김동극 청와대 비서관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이들의 사표를 받지 못할 경우) 차관이 다칠 수 있으니 인정에 흔들리지 말고 청와대 요구사항에 잘 따르라"며 김 전 실장 지시를 강조했다. 결국 김 전 실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인사 중 최규학 기조실장, 김용삼 종무실장, 신용언 문화콘텐트 산업실장이 공직을 떠났다.
김희범 전 차관은 취임 전 김 전 실장의 사전면접도 봤다. 김 전 실장은 그에게 문화예술계 이념문제와 유진룡 전 장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김 전 차관은 법정에서 "문화예술계 이념문제에 관해선 제가 근무한 적이 없어 다소 딱부러지게 답을 못했더니 '내가 당신 선을 보는 자리인데 어떻게 그렇게 답변할 수 있냐'며 김 전 실장에게 야단 맞았다"고 진술했다. 또 유진룡 전 장관을 두고는 "그분을 잘 모르는데 예상치 않은 질문을 받아 당황했다"며 "귀국 전 뉴스를 접했는데 '공직자로서 유감스러운 일이 있어 해임될 수밖에 없던 것 아니냐'고 부정적으로 답변했다"고 했다.
윗선은 거듭 그에게 이념문제를 강조했다. 김 전 차관은 취임 직후 김소영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을 만났을 때 "예상치 않았던 이 단어가 튀어나와 당황했다"며 "그와 별도로 (청와대가) 문화예술계 이념문제에 예민했다"고 말했다. 또 직원들에게 '청와대가 문화예술계의 진보성향을 민감하게 본다'는 보고를 받았고, 전임자 조현재 전 차관에게 받은 업무내용에도 '이념문제 관리'가 'VIP (대통령) 관심사항'보다 먼저 쓰여있었다고 증언했다.
김기춘이 직접 챙긴 차은택과 김종
▲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가 있는 날' 행사의 일환으로 2014년 8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상명대학교 상명아트센터에서 열린 융복합 공연 '하루(One Day)'를 관람하기에 앞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은 차은택 공연 총연출자, 오른쪽은 사회자 허경환. 이 공연은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주제로 한 것이다. ⓒ 연합뉴스
이날 재판에선 김 전 실장이 차은택 감독이 제작한 뮤지컬 <원데이>를 살뜰히 챙겼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2014년 8월 김 전 차관에게 공연제안서를 건네며 "문체부가 예산을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던 김 전 실장은 며칠 후 전화로 "<원데이> 예산 지원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결국 문체부는 체육진흥투표권 공익사업적립금(이하 적립금)에서 1억7890만 원을 <원데이>에 지원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8월 27일 '문화가 있는 날'에 이 뮤지컬을 직접 관람한 뒤 차은택 감독과 무대에 올라 "이번 공연은 문화 융복합의 첫걸음"이라며 칭찬했다. 김희범 전 차관은 박 전 대통령이 <원데이>를 직접 관람한 이유는 "이후 업무선상에 빠져있어 파악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김종덕 전 장관이 갑작스레 조직 개편, 2차관 자리를 신설한 경위도 잘 몰랐다. 김 전 차관은 "장관이 주도했고, 대통령 보고 후 이렇게 바꿨다고 해서 알았다"며 "관광이 장관 직속이었는데 2차관 밑으로 가서 직제상 맞지 않는데 왜 그런가 했다"고 말했다.
또 새로 생긴 자리에 온 김종 전 문체부 2차관이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측근인 것을 특검 조사 때에야 알았다고 했다. 김 전 차관은 다만 김종 전 차관 스스로 김기춘 전 실장과 가깝다 했고, 김종덕 장관으로부터 '김 전 실장이 체육분야는 종이에게 맡기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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