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떠올리게 한 <역적> 엔딩, 김지석 때문에 바뀌었다
[인터뷰] 김지석표 연산군, 우려를 놀라움으로 바꾼 반전
어떤 인물들은 그 이름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곤 한다. 이방원이라든가, 장희빈이라든가, 흥선대원군이라든가 하는 역사 속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연산군이다.
숱한 사림들의 목숨을 빼앗은 폭군. 아버지의 후궁들을 죽인 패륜아이자,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최초의 폐주. 동시에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에 아파한 한 인간이자, 간신들 말고는 기대고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외로운 왕, 그리고 시와 음악을 사랑한 예인이었다. 그 어떤 가상의 캐릭터가 이보다 극적일 수 있을까.
연산의 일대기는 그동안 숱하게 다뤄졌다. 이민우(한명회) 유동근(장녹수) 안재모(왕과 비) 정진영(왕의 남자)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연산을 연기했는데, 이들의 명연기까지 더해져, '연산군' 캐릭터는 어지간한 연기력과 카리스마로는 맡을 수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 김지석이 연산군 캐릭터를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응?"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오해영> 등 전작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문제적 남자> 등을 통해 보여준 밝고 유쾌한 이미지와 연산군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5월 26일, MBC <역적> 종영 인터뷰에서 만난 김지석은 "부모님도 처음엔 '네가?' 라고 하셨어요. 가족마저 응원은 못 해줄망정 의심했는데요 뭐. 하하하"라며 크게 웃었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에서, 이 같은 세간의 우려를, 놀라움으로 바꿔놓았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김지석이 연산군?' 우려, 반전으로 채웠다
- 연산군 역할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본인이 제일 놀랐을 것 같다.
"감독님이 불러주셨을 때, 사실 나도 궁금했다. 지금까지 연기에서 연산의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싶었다. 감독님은 <또 오해영>에서 업된 모습을 보시고는 저 밝은 모습을 반대로 비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더라. 감독님 입장에선 굉장한 도박이고 용기이지 않나. 부모님도 어울릴까 싶어 걱정하셨는데 대중의 우려도 당연했다.
하지만 감독님, 작가님은 '잘 해내면 반전의 효과는 배가 될 거다' 하시며 힘을 북돋워 주셨다. 나도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어찌나 부담되던지..."
-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한 것 같은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김지석만의 연산을 보였다는데 자부심은 느낀다. 사실 내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였다. 극 중 역사적 인물은 장녹수(이하늬 분)와 둘 뿐이었기 때문에, 사료에 기반을 두되, 그 이면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게 시작이었다.
폭정을 저지르고 광기에 휩싸이는 연산의 정치적인 모습은 앞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선배님들이 훌륭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드려야 시청자들에게 각인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연산군이 시를 많이 썼다더라. 그래서 연산군의 시를 풀이한 책도 읽고, 심리학자가 연산의 행동을 분석한 책도 읽었다. 연산군묘와 회릉(폐비 윤씨의 무덤), 선릉(성종과 계비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도 가봤다. 나름 성군의 자질을 보이기도 했던 연산이 왜 변했고, 왜 그리됐는지, 나름 여러 각도로 형상화하고 내 안에 욱여넣었다."
- 그간 연산의 방탕한 생활을 상징하는 정도로만 쓰였던 흥청들의 공연을 보여준 것도 새로웠다. 극 중 녹수와 흥청들의 장구춤에 열광하는 연산의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실제론 어땠나. 사실 요즘의 음악과 춤은 아니지 않나.
"눈앞에서 국악 공연을 보면 그런 생각 안 할 거다. 현장에서 보면 정말 다르다. 무엇보다 모두 자기 역할에 빙의해 있지 않나. 모두 연산을 위한 공연이니, 나 하나를 위해 수십, 수백 명이 정성과 시간을 들여 돈 주고도 못 볼 공연을 펼치는 셈인데, 정말 장관이다.
'비트 타는 연산' 영상이 나온 날도, 무대와 왕 사이에 거리가 있어서 공연과 리액션을 같이 찍었다. 영상을 보고 내가 좀 오버했나 싶기도 했지만, 나는 실제 장구춤 가락에 맞춰 박자를 탄 거였다. 나는 힙합을 좋아한다. 삶이 힙합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악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매력이 대단하더라."
'폭군'으로 산 6개월, 연산의 마음 이해됐다
- 극과 극으로 치닫는 연산을 연기하느라, 감정 소모도 많았을 것 같다.
"요즘 주위 사람들에게 빨리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드라마가 저를 망쳐놨다고. (웃음) 감정이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 보니, 나까지 외로웠다 신났다가 해서 버거웠다. 전에는 작품 끝나고 캐릭터 보내기 어렵다는 선배들 인터뷰를 보면서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끝나면 끝난 거지' 했는데, 이번에 그 마음을 알겠더라. 내가 전작들에서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건, 이번만큼 진심이 아니었던 거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집에 와서 술을 많이 먹었다. 많은 시청자분들이 연산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말씀해주시던데, 사실 <역적>이 연산군을 미화한 건 아니었다. 그의 악행, 기행도 모두 그렸지만, 그 안에 외로움과 열등감을 함께 그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연산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노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불쌍하고 짠하더라. 연산의 마지막을 촬영하고 혼자 술을 그렇게 먹었다. 내가 캐릭터를 연기한 게 아니라 내가 죽은 느낌. 그날은 누구랑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더라. 혼자 추도식 치르는 느낌으로 술을 마셨다."
- 연산으로 살며 연산을 많이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연산은 실재 인물이고 평범치 않은 인물이지 않나. 연산도 처음부터 비뚤어진 건 아니었다더라. 19살 왕위 계승 받고 4년 정도는 정치 잘했다. 폭군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만약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신하들에게 존중받았더라면 그 사달이 안 나진 않았을까?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인정이 동력이 되고 자양분이 되지 않나. 나부터도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증이 있고. 문제는 그걸 어떻게 푸느냐 인데, 연산은 잘못됐던 거지."
- 드라마에서는 연산의 그런 갈증이 길동이(윤균상 분)에 대한 열등감으로 표현된 거라고 보아도 될까?
"맞다. 결국 같은 맥락인 거다. 연산 입장에서는 길동이가 얼마나 미웠겠나. 씨종의 아들 주제에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 참된 교육, 형제애, 친구... 다 가진 거다. 반면 연산은 왕자로 태어났지만 엄마도 안 계시고, 눈치 보며 자라고, 잔소리 듣고, 얼굴에 고름은 나고... 연산도 길동이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면 달라졌을 거다.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연산의 마음으로
- 여전히 연산군에게 완벽하게 빙의돼 있는 것 같다. 연산군의 입장에서, 대척점에 선 길동이, 그를 연기한 윤균상은 어땠는지.
"일단 너무 미웠다. (웃음) 실제로도 윤균상을 보고 있으면 내가 가지지 못한 면들이 부러웠고, 그 감정을 연기로 가져가기 위해 노력했다. (뭐가 부러웠는지 묻자, '젊음'과 '큰 키'라는 답이 돌아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균상이는 연기도 살아있다. 이하늬랑도 이야기한 건데, (채)수빈이와 균상이 연기는 뭔가 '요즘 연기'한다는 느낌? 요즘 친구들은 연기도 다르다는 생각에 격세지감 느끼고 그랬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실제로도 리딩 때 빼고는 길동이 굳이 따로 보지도 않았다 내가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웃음) 연산군이 원래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안하무인이지 않나. 그냥 그 캐릭터처럼 느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산군의 엔딩도 바뀌었다."
- 엔딩이 바뀌었다고?
"마지막에 길동이 유배 간 연산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나. 원래 지문에는 그때 연산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고 돼 있었다. 리딩을 하는데 도저히 참회의 눈물이 안 흐르는 거다. '감히 네가 나를 왕에서 몰아내고 설교를 해?' 이게 6개월을 연산으로 살아보니 연산은 길동이를 죽이고 싶지, 반성할 애는 아닌 것 같더라. 죽을 때도 뭔가 눈 감고 죽고 싶지 않았다. 연산군은 눈 뜨고 억울해하며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씀드렸더니 작가님, 감독님이 엔딩을 바꿔주셨다. 결국 연산은 눈 시퍼렇게 뜨고 핏발 서린 채 죽었다. 연산은 연산대로, 길동은 길동대로. 둘 다 끝까지 살던 대로 살다가는 결말로. 누군가는 그런 연산을 끝까지 지지했을 수도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중 가장 큰 반전이었다. 귀양 가는 연산을 향해 "이놈들아, 감히 임금을 끌어내리는 법은 없다"며 울며 절규하는 양반과, 그를 보고 "너만이 나의 신하구나. 나의 백성이야" 하며 반성 않는 연산의 모습을 보며, 503호에 계신 그분과,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이어진 "(몰락한 내 모습을 보고) 마음껏 비웃고 기뻐하라"는 연산을 향해, "오늘같이 슬픈 날 무엇을 기뻐하란 말인가. 당신이 즉위하던 날 눈물을 흘리며 천세를 외치던 백성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있다. 슬프지 않은가. 놓쳐버린 기회가 뼈아프지 않은가"라던 길동의 일갈. 그간 현 시국에 거침없이 메시지를 던지던 <역적> 다운, 가장 패기 넘치는 엔딩이라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연산에 빙의한 김지석의 건의였다니.
- 연산의 마음으로, 그분의 마음도 좀 이해가 됐겠다.
"하하하. 그거까지 이해하기에는. 따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내 신념은 있으니까. (웃음) 드라마 안에서 연산의 신념을 완전히 믿고 이해했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
김지석에게 <역적>의 의미
- <역적>을 통해 얻은 게 많은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인가.
"대중에게 '김지석'이 가진 이미지가 생각보다 한정적이더라. 내 필모그래피 안에는 수십 가지 캐릭터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작품만 기억한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교복 입은 역할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됐고, 여러 이유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과, 할 수 없는 역할의 경계가 생겼다. 내 영역이 점점 좁아지는 걸 느끼던 찰나에 주어진 도전이었다. 그만큼 소중했고 긴장됐는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연기의 재미를 알게 된 기분? 좋은 캐릭터, 좋은 작품에 대한 중요성도 더 알게 됐고. 혼자 명연기 해봐야 봐주지 않으시면 소용없지 않나.
물론 (지금의 반응은) 대중이 나라는 배우에게 가진 기대치가 없어서라고도 생각한다. 물살이 엄청 센 징검다리에서, 하나를 건너뛴 기분이다. 앞으로도 돌은 남아있다. 이젠 더 경건하고 치열하게 임해야지만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는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도 했는데, 이젠 다음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진작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웃음)"
- '배우 김지석' 말고, '인간 김지석'이 <역적>을 통해 얻은 것도 있을까?
"<또 오해영>이나 <문제적 남자>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나는 밝고 유쾌한 이미지로 기억됐다. 이걸 유지하지 못하거나 깨트리면 사람들이 놀라고 어색해하더라. 연기로나마, <역적>은 처음 그 이미지를 깨본 거였다. 내게도 카타르시스였다. 반응도 나쁘지 않아서, 앞으로는 굳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문제적 남자>에서도 좀 다른 모습을 보여드려도 되겠구나 싶고. (웃음) 좀 더 나를 보여드려도 되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나대로 가져가되, 연기로 종종 쌓인 걸 푸는 거지. 내 안에도 연산군처럼 '또라이' 같은 모습이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선 못하지 않나. 연애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명동 한복판에서 키스하는 거라든지, 이벤트라든지, 여러 가지를 연기로 경험한다. 보는 분들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도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끝나고 집에 가면 공허하다. <역적> 촬영하면서는 처음으로 위로받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고."
- <역적>은 배우 김지석의 연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역적>의 서브타이틀이 '백성을 훔친 도적' 아닌가. 연산군은 백성을 얻지 못했지만, 나는 연산을 통해 연기자로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훔치지 않았나 싶다. 내게 <역적>은 처음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숱한 사림들의 목숨을 빼앗은 폭군. 아버지의 후궁들을 죽인 패륜아이자,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최초의 폐주. 동시에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에 아파한 한 인간이자, 간신들 말고는 기대고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외로운 왕, 그리고 시와 음악을 사랑한 예인이었다. 그 어떤 가상의 캐릭터가 이보다 극적일 수 있을까.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 김지석이 연산군 캐릭터를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응?"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오해영> 등 전작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문제적 남자> 등을 통해 보여준 밝고 유쾌한 이미지와 연산군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5월 26일, MBC <역적> 종영 인터뷰에서 만난 김지석은 "부모님도 처음엔 '네가?' 라고 하셨어요. 가족마저 응원은 못 해줄망정 의심했는데요 뭐. 하하하"라며 크게 웃었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에서, 이 같은 세간의 우려를, 놀라움으로 바꿔놓았다는 기쁨이 느껴졌다.
'김지석이 연산군?' 우려, 반전으로 채웠다
▲ 김지석의 유쾌한 웃음소리에서, 세간의 우려를 놀라움으로 바꿔놓았다는 기쁨과 만조감이 느껴졌다. ⓒ 제이스타즈
- 연산군 역할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본인이 제일 놀랐을 것 같다.
"감독님이 불러주셨을 때, 사실 나도 궁금했다. 지금까지 연기에서 연산의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싶었다. 감독님은 <또 오해영>에서 업된 모습을 보시고는 저 밝은 모습을 반대로 비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더라. 감독님 입장에선 굉장한 도박이고 용기이지 않나. 부모님도 어울릴까 싶어 걱정하셨는데 대중의 우려도 당연했다.
하지만 감독님, 작가님은 '잘 해내면 반전의 효과는 배가 될 거다' 하시며 힘을 북돋워 주셨다. 나도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어찌나 부담되던지..."
-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한 것 같은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김지석만의 연산을 보였다는데 자부심은 느낀다. 사실 내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였다. 극 중 역사적 인물은 장녹수(이하늬 분)와 둘 뿐이었기 때문에, 사료에 기반을 두되, 그 이면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게 시작이었다.
폭정을 저지르고 광기에 휩싸이는 연산의 정치적인 모습은 앞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선배님들이 훌륭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드려야 시청자들에게 각인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연산군이 시를 많이 썼다더라. 그래서 연산군의 시를 풀이한 책도 읽고, 심리학자가 연산의 행동을 분석한 책도 읽었다. 연산군묘와 회릉(폐비 윤씨의 무덤), 선릉(성종과 계비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도 가봤다. 나름 성군의 자질을 보이기도 했던 연산이 왜 변했고, 왜 그리됐는지, 나름 여러 각도로 형상화하고 내 안에 욱여넣었다."
- 그간 연산의 방탕한 생활을 상징하는 정도로만 쓰였던 흥청들의 공연을 보여준 것도 새로웠다. 극 중 녹수와 흥청들의 장구춤에 열광하는 연산의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실제론 어땠나. 사실 요즘의 음악과 춤은 아니지 않나.
"눈앞에서 국악 공연을 보면 그런 생각 안 할 거다. 현장에서 보면 정말 다르다. 무엇보다 모두 자기 역할에 빙의해 있지 않나. 모두 연산을 위한 공연이니, 나 하나를 위해 수십, 수백 명이 정성과 시간을 들여 돈 주고도 못 볼 공연을 펼치는 셈인데, 정말 장관이다.
'비트 타는 연산' 영상이 나온 날도, 무대와 왕 사이에 거리가 있어서 공연과 리액션을 같이 찍었다. 영상을 보고 내가 좀 오버했나 싶기도 했지만, 나는 실제 장구춤 가락에 맞춰 박자를 탄 거였다. 나는 힙합을 좋아한다. 삶이 힙합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악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매력이 대단하더라."
'폭군'으로 산 6개월, 연산의 마음 이해됐다
▲ 김지석은 <역적> 속 연산군을 '열등감'으로 이해했다. 다 가진 왕자 연산은 받지 못한 사랑과 관심을 가진 길동. 그는 "연산도 길동이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제이스타즈
- 극과 극으로 치닫는 연산을 연기하느라, 감정 소모도 많았을 것 같다.
"요즘 주위 사람들에게 빨리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드라마가 저를 망쳐놨다고. (웃음) 감정이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다 보니, 나까지 외로웠다 신났다가 해서 버거웠다. 전에는 작품 끝나고 캐릭터 보내기 어렵다는 선배들 인터뷰를 보면서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끝나면 끝난 거지' 했는데, 이번에 그 마음을 알겠더라. 내가 전작들에서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던 건, 이번만큼 진심이 아니었던 거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집에 와서 술을 많이 먹었다. 많은 시청자분들이 연산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말씀해주시던데, 사실 <역적>이 연산군을 미화한 건 아니었다. 그의 악행, 기행도 모두 그렸지만, 그 안에 외로움과 열등감을 함께 그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연산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노력한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불쌍하고 짠하더라. 연산의 마지막을 촬영하고 혼자 술을 그렇게 먹었다. 내가 캐릭터를 연기한 게 아니라 내가 죽은 느낌. 그날은 누구랑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더라. 혼자 추도식 치르는 느낌으로 술을 마셨다."
- 연산으로 살며 연산을 많이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연산은 실재 인물이고 평범치 않은 인물이지 않나. 연산도 처음부터 비뚤어진 건 아니었다더라. 19살 왕위 계승 받고 4년 정도는 정치 잘했다. 폭군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만약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신하들에게 존중받았더라면 그 사달이 안 나진 않았을까?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인정이 동력이 되고 자양분이 되지 않나. 나부터도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증이 있고. 문제는 그걸 어떻게 푸느냐 인데, 연산은 잘못됐던 거지."
- 드라마에서는 연산의 그런 갈증이 길동이(윤균상 분)에 대한 열등감으로 표현된 거라고 보아도 될까?
"맞다. 결국 같은 맥락인 거다. 연산 입장에서는 길동이가 얼마나 미웠겠나. 씨종의 아들 주제에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 참된 교육, 형제애, 친구... 다 가진 거다. 반면 연산은 왕자로 태어났지만 엄마도 안 계시고, 눈치 보며 자라고, 잔소리 듣고, 얼굴에 고름은 나고... 연산도 길동이처럼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면 달라졌을 거다.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연산의 마음으로
▲ 연산이 되어 연산의 마음을 너무 이해한 나머지, 대척점에 서 있는 윤균상이 밉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 제이스타즈
- 여전히 연산군에게 완벽하게 빙의돼 있는 것 같다. 연산군의 입장에서, 대척점에 선 길동이, 그를 연기한 윤균상은 어땠는지.
"일단 너무 미웠다. (웃음) 실제로도 윤균상을 보고 있으면 내가 가지지 못한 면들이 부러웠고, 그 감정을 연기로 가져가기 위해 노력했다. (뭐가 부러웠는지 묻자, '젊음'과 '큰 키'라는 답이 돌아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균상이는 연기도 살아있다. 이하늬랑도 이야기한 건데, (채)수빈이와 균상이 연기는 뭔가 '요즘 연기'한다는 느낌? 요즘 친구들은 연기도 다르다는 생각에 격세지감 느끼고 그랬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실제로도 리딩 때 빼고는 길동이 굳이 따로 보지도 않았다 내가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웃음) 연산군이 원래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안하무인이지 않나. 그냥 그 캐릭터처럼 느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산군의 엔딩도 바뀌었다."
- 엔딩이 바뀌었다고?
"마지막에 길동이 유배 간 연산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나. 원래 지문에는 그때 연산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고 돼 있었다. 리딩을 하는데 도저히 참회의 눈물이 안 흐르는 거다. '감히 네가 나를 왕에서 몰아내고 설교를 해?' 이게 6개월을 연산으로 살아보니 연산은 길동이를 죽이고 싶지, 반성할 애는 아닌 것 같더라. 죽을 때도 뭔가 눈 감고 죽고 싶지 않았다. 연산군은 눈 뜨고 억울해하며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씀드렸더니 작가님, 감독님이 엔딩을 바꿔주셨다. 결국 연산은 눈 시퍼렇게 뜨고 핏발 서린 채 죽었다. 연산은 연산대로, 길동은 길동대로. 둘 다 끝까지 살던 대로 살다가는 결말로. 누군가는 그런 연산을 끝까지 지지했을 수도 있겠지."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중 가장 큰 반전이었다. 귀양 가는 연산을 향해 "이놈들아, 감히 임금을 끌어내리는 법은 없다"며 울며 절규하는 양반과, 그를 보고 "너만이 나의 신하구나. 나의 백성이야" 하며 반성 않는 연산의 모습을 보며, 503호에 계신 그분과,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이어진 "(몰락한 내 모습을 보고) 마음껏 비웃고 기뻐하라"는 연산을 향해, "오늘같이 슬픈 날 무엇을 기뻐하란 말인가. 당신이 즉위하던 날 눈물을 흘리며 천세를 외치던 백성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있다. 슬프지 않은가. 놓쳐버린 기회가 뼈아프지 않은가"라던 길동의 일갈. 그간 현 시국에 거침없이 메시지를 던지던 <역적> 다운, 가장 패기 넘치는 엔딩이라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연산에 빙의한 김지석의 건의였다니.
- 연산의 마음으로, 그분의 마음도 좀 이해가 됐겠다.
"하하하. 그거까지 이해하기에는. 따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내 신념은 있으니까. (웃음) 드라마 안에서 연산의 신념을 완전히 믿고 이해했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
김지석에게 <역적>의 의미
▲ 김지석은 연기를 하며 실생활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일탈을 하고, 그로인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했다. 연기를 통해 쌓인 걸 풀기도 하지만, 끝난 뒤 공허함을 느끼기도 한다고. ⓒ 제이스타즈
- <역적>을 통해 얻은 게 많은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인가.
"대중에게 '김지석'이 가진 이미지가 생각보다 한정적이더라. 내 필모그래피 안에는 수십 가지 캐릭터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작품만 기억한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교복 입은 역할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됐고, 여러 이유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과, 할 수 없는 역할의 경계가 생겼다. 내 영역이 점점 좁아지는 걸 느끼던 찰나에 주어진 도전이었다. 그만큼 소중했고 긴장됐는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연기의 재미를 알게 된 기분? 좋은 캐릭터, 좋은 작품에 대한 중요성도 더 알게 됐고. 혼자 명연기 해봐야 봐주지 않으시면 소용없지 않나.
물론 (지금의 반응은) 대중이 나라는 배우에게 가진 기대치가 없어서라고도 생각한다. 물살이 엄청 센 징검다리에서, 하나를 건너뛴 기분이다. 앞으로도 돌은 남아있다. 이젠 더 경건하고 치열하게 임해야지만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는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도 했는데, 이젠 다음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진작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웃음)"
- '배우 김지석' 말고, '인간 김지석'이 <역적>을 통해 얻은 것도 있을까?
"<또 오해영>이나 <문제적 남자>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나는 밝고 유쾌한 이미지로 기억됐다. 이걸 유지하지 못하거나 깨트리면 사람들이 놀라고 어색해하더라. 연기로나마, <역적>은 처음 그 이미지를 깨본 거였다. 내게도 카타르시스였다. 반응도 나쁘지 않아서, 앞으로는 굳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문제적 남자>에서도 좀 다른 모습을 보여드려도 되겠구나 싶고. (웃음) 좀 더 나를 보여드려도 되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나대로 가져가되, 연기로 종종 쌓인 걸 푸는 거지. 내 안에도 연산군처럼 '또라이' 같은 모습이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선 못하지 않나. 연애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명동 한복판에서 키스하는 거라든지, 이벤트라든지, 여러 가지를 연기로 경험한다. 보는 분들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도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끝나고 집에 가면 공허하다. <역적> 촬영하면서는 처음으로 위로받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고."
- <역적>은 배우 김지석의 연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역적>의 서브타이틀이 '백성을 훔친 도적' 아닌가. 연산군은 백성을 얻지 못했지만, 나는 연산을 통해 연기자로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훔치지 않았나 싶다. 내게 <역적>은 처음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 "연산군은 백성을 얻지 못했지만, 나는 연산을 통해 연기자로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훔치지 않았나 싶다. 내게 <역적>은 처음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 제이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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