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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설거지 요정'은 누구?

[시골 아버지 살림노래] 잔소리 아닌 사랑소리를

등록|2017.06.06 14:52 수정|2017.06.06 14:52
시골에서 살림을 도맡는 아버지로서 살림노래(육아일기)를 적어 봅니다. 아이들이 처음 태어날 무렵에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보람이었다면, 아이들이 제법 큰 요즈음은 아이한테서 새롭게 배우고 아이랑 고맙게 배우는 살림이라고 느껴요. 그래서 아이와 지내는 나날은 '육아일기'보다는 '살림노래'가 어울리지 싶어요. 살림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듯이 배우고 누리는 나날이라는 마음입니다. 며칠에 한 번씩 공책에 짤막하게 적어 놓는 살림노래를 이웃님과 나누면서 '살림하며 새로 배우는 기쁨'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기자말

▲ "받아요" 하고 작은아이가 내미는 들딸기. "너 많이 먹으렴," "아니, 아버지 주려고." ⓒ 최종규


모든 아이는 착하다

모든 아이는 착하다고 느껴요. 착하지 않은 마음으로 태어난 아이는 없다고 느껴요. 다만 아이들이 착한 숨결을 널리 드러내지 못하도록 바쁘거나 힘겨운 터전이라면, 아이들은 그만 애늙은이가 되고 말지 싶어요. 이를테면 입시지옥이나 전쟁 기운이 감도는 터전에서는 착한 마음을 빼앗기지 싶습니다. 상냥한 눈빛과 따스한 목소리를 품고서 태어나는 아이들이라고 느껴요. 너른 가슴과 고운 손길로 태어나는 아이들이라고 느껴요. 이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즐거움을 물려받으면서 한결같이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싶습니다. 온누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면서 늘 착한 넋으로 피어나기를 꿈꾸지 싶습니다.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처음에는 모두 착한 눈망울과 몸짓으로 이 땅에 태어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우뚝

우리 도서관학교 운동장 가운데에는 길게 도랑이 있습니다. 이곳은 비가 오면 물이 고입니다. 물이 고이면 곳곳에서 개구리가 모여듭니다. 이 개구리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물만 고였다 하면 어김없이 모여들어 노래하고 헤엄칩니다. 이 도랑 옆을 지나갈 사람은 아이들하고 저뿐. 그야말로 느긋하게 노래하던 개구리는 우리가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갈 때라야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헤엄을 치며 달아나려 하거나 죽은 듯이 배를 까뒤집습니다. 이때에 두 아이는 어김없이 이 소리를 듣습니다. 허둥지둥 놀란 개구리가 물에 퐁당 뛰어드는 소리라든지 허겁지겁 물살을 가르는 소리를 듣지요.

▲ 비 온 뒤 도랑이 생기고, 이 도랑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개구리 들여다보기 ⓒ 최종규


"개구리가 왜 저래?"
"사람 발자국 소리를 아주 잘 듣거든. 그래서 무서워서 저러지."
"우리가 왜 무서워? 우리는 쟤네 잡아먹지 않는데."
"개구리는 소리를 아주 잘 듣지만, 이 소리가 새인지 사람인지, 사람 가운데에서 우리인지 낯선 누구인지 몰라. 우리 발소리를 자주 들으면 앞으로는 우리 발소리를 알아채고는 안 무서워할 테지만 아직 무서워할 수 있어."

배를 까뒤집고 죽은 척하는 개구리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니 개구리 스스로 너무 힘든지 슬그머니 몸을 돌려 잰 몸놀림으로 사라집니다.

그림잔치

우리 집에서 그림잔치를 누립니다. 저마다 즐겁게 마음 이야기를 손을 거쳐서 종이에 얹기에 그림잔치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살림을 그리고, 우리가 걷는 길을 그리며, 우리가 품는 꿈을 그려요. 우리 이야기이기에 우리 그림이 됩니다. 우리가 짓는 살림인 터라 우리 잔치를 누립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꿈이 곧 사랑스러이 흐르는 노래가 됩니다.

▲ 아이랑 책상맡에 둘러앉아 함께 그림잔치를 누려요 ⓒ 최종규


설거지 요정

저녁에 고단하여 설거지를 못 마치고 드러누울 적이 있습니다. 이때마다 문득 생각하지요. 등허리를 펴고 나서 밤이나 새벽에 하자고. 이러다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우리 집에 설거지 요정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밀린 설거지를 깊은 밤이나 새벽에 마칠 즈음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내가 '우리 집 설거지 요정'이야!" 하고. 나는 다른 요정을 우리 집에 끌어들이기보다 내가 스스로 요정이 되기로 합니다.

잔소리도 새롭게

잔소리는 자질구레하게 하는 소리를 가리킵니다. 듣기 싫게 하는 말이라든지, 성가시게 자꾸 하는 말도 잔소리라고 할 만해요. 이 잔소리는 흔히 어버이가 아이한테 합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잔소리를 하는 일은 드물어요. 수많은 아이는 수많은 어버이한테서 잔소리를 들으며 자랍니다.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아이를 낳아 새롭게 잔소리를 늘어놓고요. 이 고리는 참으로 오랫동안 이어지는데요, 오늘 문득 아이들한테 '잔소리'를 하다가 생각합니다.

'나부터 어릴 적에 잔소리를 듣기 몹시 싫어했으면서, 정작 오늘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한테,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아이들한테 잔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왜 나부터 이 고리를 안 끊지?'

누가 나한테 잔소리를 하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떨쳐내면 되어요. 누가 나를 괴롭히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이웃하고 사이좋게 평화를 나누면 되어요. 내가 어릴 적에 잔소리를 으레 듣고 자랐어도 오늘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새로운 마음이 되어 '사랑소리'를 들려줄 수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잔소리를 들으려고 태어난 목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비롯해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서 '사랑소리'를 들으려고 태어난 목숨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소리를 들으며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사랑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노랫소리를 터뜨리는 아이들입니다.

▲ 아이들이 나무 곁에서 조용히 바람을 쐴 수 있기를 빌면서 하루를 짓습니다. ⓒ 최종규


잔소리를 멈추면

잔소리를 멈추어 봅니다. 내가 나한테 잔소리를 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내가 나한테 잔소리를 해 보니 더없이 끔찍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한테 이제 잔소리를 안 하기로 다짐합니다. 나는 나한테 '사랑소리'를 하고 '참소리'를 할 뿐 아니라, '노랫소리'랑 '웃음소리'를 들려주자는 생각을 잇습니다. 이러다가 "자질구레한 소리"가 아닌 "자그마한 소리"를 들려주어도 좋구나 하고 깨달아요.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낮은 목소리를 들려주면 참으로 다르구나 하고 깨달아요.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려주면서 부드러이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려주면 스스로 새롭게 깨어날 만하구나 하고 느껴요. 잔잔하게 퍼지는 물결 같은 '잔잔소리'를 들려주어 보자고도 느끼고요. 이러한 느낌 그대로 우리 아이들한테 "살림을 짓는 소리"인 '살림소리'를 들려주고, "삶을 가꾸는 소리"인 '삶소리'를 들려주자고 거듭거듭 다짐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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