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하고 더 열심히 활동한 독립운동가
국립서울현충원 납골당에 모셔진 조충성 애국지사
지난 6일은 제62회 현충일이었다. '현충(顯忠)'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충렬을 높이 드러냄. 또는 그 충렬"이라는 다소 어려운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어린아이 눈높이로 말한다면 '나라를 지키다 숨진 분들을 추모하는 일'을 말한다. 이곳에는 6.25 참전 용사들도 잠들어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도 잠들어 있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충성(曺忠誠, 1896. 5.29 ~ 1981.10.25) 애국지사도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영면 중이시다. 그런데 무덤이 아니라 납골 형태로 모셔져 있다. 국립묘지라고 하면 돌비석이 있는 무덤을 연상하겠지만 국립묘지라고 해서 매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한없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국립서울현충원은 1985년 묘역이 만장(더 이상 공간이 없음)됨에 따라 서울에 고인을 모시기를 희망하나 장소가 없어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유족들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2003년 말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년 8개월간의 공사 끝에 "충혼당" (3층 건물, 연건평 4,791.6㎡, 157억 원 투입)을 세워, 2006년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조충성 지사는 1981년 타계하셨지만 2015년 1월 15일 날 이곳 충혼당 1층 108실 165호에 유해가 모셔져 있어 언제라도 뵐 수 있게 되었다.
황해도 온천이 고향인 조충성 지사는 23살 되던 해인 1919년 3월 1일 옹진군 마산면 온천리에 있는 기독교 예배당에서 열린 독립기원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전도사 이경호는 일제에 의한 독살로 숨진 고종황제의 추도식을 올린 뒤 독립선언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기원 예배를 올렸다.
국가보훈처의 조충성 지사 공적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황해도 옹진군 마산면에서 이경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교부받아 소지하고 기독교 예배당에서의 고종황제 봉도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월의 형을 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해주지역에서 해주여자청년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으로 되어 있다.
조충성 지사는 그렇지 않아도 여학교 재학 중에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요양 중이던 터라 감옥 생활은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출옥 뒤에 몸을 추슬러 해주여자청년회(海州女子靑年會) 회장과 덕동부인회(德洞婦人會)에서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평안남도 용강군 대대면 덕동리 감리교 부인회에서는 동회 창립 9주년 기념식을 지난 3일 오후 8시에 동 교회 예배당에서 열고 동 회당 조충성 씨 사회로 동회 연혁 설명과 성과 보고가 있은 후 동 교회 목사 정진현 씨의 의미 깊은 축사와 회원 안신행 씨의 답사가 있었으며 연이어 청아한 음악이 있어 전에 없던 대성황을 이루었답니다.(진남포)"
이는 <동아일보> 1925년 9월 9일 기사로 조충성 지사에 관한 '덕동부인회기념(德洞婦人會記念)' 소식이다. 이날 덕동부인회 9주년 기념식에서 사회를 본 조충성 지사의 나이는 29살로 이 모임은 9년 전 곧 1916년에 결성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 일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인 1905∼10년 무렵 조선에는 서울 지방 합쳐 모두 30개의 여성조직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성의 경우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진명부인회(進明夫人會), 양정여자교육회, 대한여자흥학회(大韓女子興學會), 한일부인회, 자선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자혜부인회 등이 있었다.(이 가운데 한일부인회, 자선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자혜부인회 등은 뒷날 친일단체로 변절)
1907년 4월에 발족한 진명부인회의 경우, 검소하고 절약하는 모범적 여성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교육 운동을 펼쳤다. 박영인, 민현자, 이미경 등이 주축이 되어 여성 교육과 여공(女工)양성을 통해 경제적인 자립을 도모해주었으며 지금으로 치면 장학기금을 만들어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등 민족교육 운동과 여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대표적인 여성운동 조직이었다.
이처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여성 중심의 '부인회'가 속속 창립되는 과정에서 평안남도 용강군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덕동부인회(德洞婦人會)'가 생긴 것이다. 이 무렵 조충성 지사가 관여한 덕동부인회 역시 그 활동은 진명부인회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창립 9주년 기념식을 성황리에 치렀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이 단체의 존재감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청아한 음악회'까지 곁들일 정도로 상당한 문화 수준의 창립 기념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충성 지사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조충성 지사의 유해는 2015년 1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서 모셔져있다. 언제라도 가까이에 계신 독립지사를 뵈러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조충성 애국지사 모신 곳>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1층 108실 165호
*조충성 지사 이야기는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7월 발간 예정)에 수록될 예정이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충성(曺忠誠, 1896. 5.29 ~ 1981.10.25) 애국지사도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영면 중이시다. 그런데 무덤이 아니라 납골 형태로 모셔져 있다. 국립묘지라고 하면 돌비석이 있는 무덤을 연상하겠지만 국립묘지라고 해서 매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한없이 있는 것은 아니다.
▲ 충혼당국립서울현충원 납골당인 충혼당 ⓒ 이윤옥
▲ 참배충혼당에 참배하는 유족들 ⓒ 이윤옥
▲ 조충성 애국지사국립서울현충원 납골당 충혼당에 모셔져 있는 조충성 애국지사 ⓒ 이윤옥
따라서 국립서울현충원은 1985년 묘역이 만장(더 이상 공간이 없음)됨에 따라 서울에 고인을 모시기를 희망하나 장소가 없어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유족들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2003년 말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년 8개월간의 공사 끝에 "충혼당" (3층 건물, 연건평 4,791.6㎡, 157억 원 투입)을 세워, 2006년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조충성 지사는 1981년 타계하셨지만 2015년 1월 15일 날 이곳 충혼당 1층 108실 165호에 유해가 모셔져 있어 언제라도 뵐 수 있게 되었다.
황해도 온천이 고향인 조충성 지사는 23살 되던 해인 1919년 3월 1일 옹진군 마산면 온천리에 있는 기독교 예배당에서 열린 독립기원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전도사 이경호는 일제에 의한 독살로 숨진 고종황제의 추도식을 올린 뒤 독립선언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기원 예배를 올렸다.
▲ 태극기독립운동가들의 기원이 담긴 태극기 ⓒ 이윤옥
국가보훈처의 조충성 지사 공적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황해도 옹진군 마산면에서 이경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교부받아 소지하고 기독교 예배당에서의 고종황제 봉도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월의 형을 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해주지역에서 해주여자청년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으로 되어 있다.
조충성 지사는 그렇지 않아도 여학교 재학 중에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요양 중이던 터라 감옥 생활은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출옥 뒤에 몸을 추슬러 해주여자청년회(海州女子靑年會) 회장과 덕동부인회(德洞婦人會)에서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평안남도 용강군 대대면 덕동리 감리교 부인회에서는 동회 창립 9주년 기념식을 지난 3일 오후 8시에 동 교회 예배당에서 열고 동 회당 조충성 씨 사회로 동회 연혁 설명과 성과 보고가 있은 후 동 교회 목사 정진현 씨의 의미 깊은 축사와 회원 안신행 씨의 답사가 있었으며 연이어 청아한 음악이 있어 전에 없던 대성황을 이루었답니다.(진남포)"
이는 <동아일보> 1925년 9월 9일 기사로 조충성 지사에 관한 '덕동부인회기념(德洞婦人會記念)' 소식이다. 이날 덕동부인회 9주년 기념식에서 사회를 본 조충성 지사의 나이는 29살로 이 모임은 9년 전 곧 1916년에 결성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 일이다.
▲ 판결문 1조충성 지사 판결문 1 ⓒ 이윤옥
▲ 판결문 2조충성 지사 판결문 2 ⓒ 이윤옥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인 1905∼10년 무렵 조선에는 서울 지방 합쳐 모두 30개의 여성조직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성의 경우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진명부인회(進明夫人會), 양정여자교육회, 대한여자흥학회(大韓女子興學會), 한일부인회, 자선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자혜부인회 등이 있었다.(이 가운데 한일부인회, 자선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자혜부인회 등은 뒷날 친일단체로 변절)
1907년 4월에 발족한 진명부인회의 경우, 검소하고 절약하는 모범적 여성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교육 운동을 펼쳤다. 박영인, 민현자, 이미경 등이 주축이 되어 여성 교육과 여공(女工)양성을 통해 경제적인 자립을 도모해주었으며 지금으로 치면 장학기금을 만들어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등 민족교육 운동과 여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대표적인 여성운동 조직이었다.
이처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여성 중심의 '부인회'가 속속 창립되는 과정에서 평안남도 용강군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덕동부인회(德洞婦人會)'가 생긴 것이다. 이 무렵 조충성 지사가 관여한 덕동부인회 역시 그 활동은 진명부인회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창립 9주년 기념식을 성황리에 치렀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이 단체의 존재감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청아한 음악회'까지 곁들일 정도로 상당한 문화 수준의 창립 기념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충성 지사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조충성 지사의 유해는 2015년 1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서 모셔져있다. 언제라도 가까이에 계신 독립지사를 뵈러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조충성 애국지사 모신 곳>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1층 108실 165호
*조충성 지사 이야기는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 7권(7월 발간 예정)에 수록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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