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째 시계 수리한 '어 박사네', 금고에 갇힌 사람 구해주기도
88여년 역사의 충남 예산 '예산공업소(어씨네금방)' 이야기
▲ 왼쪽에 작게 붙은 예산공업소가 가게의 원래 상호다. 어씨네금방은 1990년부터 15년 동안 운영했다. 한자리수, 두자리수 국 전화번호가 긴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충남 예산군 예산읍 원도심 한복판, 화려했던 번성기를 뒤로 하고 물러앉은 골목 안에는 '어씨네금방'이란 커다란 간판이 녹을 털어내고 있다.
1990년에 지은 깔끔한 3층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한 세기의 시간이 통째로 묶여있다. 사방 벽면엔 시대별로 멈춰선 초침과 골격만 남은 저울에 얹힌 세월의 무게가 읽힌다. 일제강점기에 선을 보인 벽시계, 탁상시계, 손목시계들이 어떤 것은 온전한 모습으로 또 어떤 것은 반쯤 분해된 채 태엽을 드러내고 널브러져 있다.
그뿐 아니다. 해체됐거나 반쯤 골격만 남은 저울과 금고의 수많은 부속품들이 20평 남짓한 가게 안에 구역다툼 없이 켜켜이 쌓여있다. 마치 시기를 달리한 지층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다만, 어씨네'금방' 안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금붙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게 역사에서 금방을 운영했던 건 1990년부터 15년 동안 만이다.
가게의 실제상호는 '예산공업소'. 시계, 저울, 금고를 수리하고 부속품을 제작하는 정밀공업분야의 장인정신을 2대째 이어온 집이다.
과거 예산에 '장항선 일대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곳이 여럿이었던 것처럼 이곳도 당연히 그렇다. 시계, 저울, 금고 수리분야에서 장항선 일대 최고의 집이 바로 예산읍내에 있는 '예산공업소', 일명 '어 박사네'였다.
정밀공업분야 제작 수리 장항선 일대 최고
▲ 좁은 가게 안에 들어찬 각종 정밀기계. ⓒ <무한정보> 이재형
'예산공업소'를 일으킨 사람은 청주 문의면이 고향인 고 어인태(1910~1989)씨로, 어진용(70) 현재 사장의 선친이다. 그는 어려서 상경해 일본인에게 시계수리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19살이 되던 해 포천 영북면에서 시계수리점을 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이듬해인 1951년 20년간 터를 닦은 포천땅을 등지고 피난대열에 합류했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던 중 예산땅에 짐을 풀었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어 사장이 4살 때의 일이라고 한다.
"처음 예산에 왔을 땐 대술 장복에서 10개월, 대흥 대률에서 2개월 정도 살다가 읍내로 들어왔다고 해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게를 연 게 1958년 즈음 일 거예요.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고 나서니까…"
어 사장이 빛바랜 부모님 사진을 꺼내 보이며 가게사를 들려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시계와 저울, 금고까지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많지 않았다. 전쟁 후 였고, 때맞춰 저울 계량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1대사장 어인태씨는 당진, 홍성, 청양, 태안지역을 누비며, 계량기검사에서 불합격한 저울을 수리하고 그렇게 가게를 키웠다.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국가경제가 살아나면서 시계와 금고 쪽도 호황기를 맞았다.
막내로 태어난 2대 어진용 사장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터에서 묻혀 지내며 자연스럽게 시계의 매력에 빠져들며 꿈을 키웠다.
▲ 오래 전 사용했던 표준시계. ⓒ <무한정보> 이재형
"중학교때 시계수리는 마스터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벽시계는 만들었어도 손목시계(기계식)는 만들지 못했어요. 그래서 시계를 고치는 것보다 내 손으로 시계를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죠."
선친 밑에서 기술을 배우고 일을 도우며 틈틈이 시계제작의 꿈을 키우던 어 사장은 직접 만든 시계주요부품(밸런스 스타트)을 세계 3대 명품시계의 하나로 꼽히는 스위스 바쉐린콘스탄틴사로 보내 평가를 의뢰했다. 이에 바쉐린콘스탄틴사는 "세계 최고의 기술자가 되길 바란다"는 격려의 답장을 보내왔다.
"시계 하나엔 200~500개의 부속품이 들어가는데, 시계를 만들려면 그걸 설계하고 일일이 깎아서 짜맞춰야 해요. 우리나라에 시계수리명장 6명이 있는데, 6명이 다 모여도 시계를 만들지 못해요. 삼성 같은 대기업도 실패했고. 세계의 명품시계는 큰 회사가 아니예요. 1년에 한두개쯤 생산하는 가내 수공업형태인데 그걸 독립시계 제작이라고 하지요."
현재 진행형인 독립시계 제작의 꿈
▲ 어 사장이 옛날 괘종시계의 종소리를 들려 주며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어떻게 탄생하는지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1989년 선친이 79세로 운명을 달리하고 나자, 가업은 자연스럽게 어진용 사장에게 이어졌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형제들이 공부를 잘했어요. 큰 형님은 연세대 나와 교수를 했고, 바로 위 형은 가톨릭의대 들어가 지금은 미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죠. 누님 두 분도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한 분은 대흥중고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딸까지 대학교육을 시켰으니 아버님의 교육열이 대단했죠. 그때 하신 말씀이 머지 않아 틀림없이 모계사회가 될텐데, 여자가 배워야 자식을 잘 키우고 가정이 발전한다고 하셨어요."
어 사장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예산농고 원예과를 졸업한 뒤, 계속 부친의 일을 도왔다. 시계에 빠져있던 그에게 대학은 그리 절실하지 않았다. 기술은 당대최고라고 믿는 부친으로부터 배우면 되고, 공업소는 수리에 그치지 않고 부품제작 기계까지 갖추기 시작해 그의 꿈을 키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972년에 시계기능공 1급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이 꼭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냥 땄다고 한다. 내친김에 이듬해에 계량사(저울검사수리)자격증도 취득했다.
솜씨와 기술을 물려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자식 키우면서 큰소리 한 번 안하신 분이예요. 매를 댄 적도 없고요. 같이 일을 하면서도 크게 갈등한 적이 별로 없어요. 한 번은 고치기도 어렵고 돈도 안되는 물건을 자꾸 받길래 내가 '다른 시계수리점에서 받지 않는 어려운 것을 고치려면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들고 한마디로 경제성이 없으니 받지 말자'고 주장을 했더니 아버지 말씀이 '네 형이 의사인데, 돈 되는 환자만 치료해 주면 그게 옳은 거냐. 이 병원 저 병원서 못 고친다고 해서 왔는데, 돈이 안 된다고 돌려보내면 그게 의사냐'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또 '그럼 돈은 어떻게 버냐'고 물었더니 '네가 더 빨리 정확하게 수리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만들어서 더 많이 일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더 빨리, 최고의 수리를 할 수 있는 부속장치 개발에 매달렸죠. 예를 들면 시계 태엽을 빼고 넣는 작업이 아주 어려운데 내가 개발한 부속장치를 사용하면 간단해요. 태엽 손상도 막고 더 정확하지."
▲ 각종 계량기 검사 뒤 봉인하는 기구(왼쪽). 어 사장이 중학교 때 만들었다는 시계 부품(가운대). 선친과 함께 만든 ‘바이스’(오른쪽). ⓒ <무한정보>이재형
어 사장은 그때부터 시계수리보다 부품 제작과 연구개발에 매달렸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이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를 우물 밖으로 나오게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반적인 수리 물건이 밀려들면 이웃점포로 보냈다. "일감을 조금만 받으니 연구할 시간이 늘고, 이웃 동종업도 덩달아 좋아하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그래서 돈은 못벌었어요."
시계·저울·금고 수리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시계다. 시계기술을 완벽히 터득하면 나머지는 따라오는 것이라고 한다.
한 번은 3억 원짜리 명품시계 파텍필립을 분해해서 청소하고 수리비용을 200만 원 받은 적도 있다. 1969년, 일본 세이코가 전자 팔목시계를 개발하는 바람에 기계식 손목시계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15년동안 스위스 시계업계 기술자 9만 명 중 6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자시계는 수명이 짧았다. 기계식 태엽시계(오토매틱)는 고가품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어 사장은 이같은 시계업계의 부침에 아랑곳 않고 독립시계 제작의 꿈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한 번 만들면 100년, 200년 사용할 수 있는 장인정신이 깃든 기계식 시계야말로 수요가 영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선견이고 신념이다.
3대로 이어지는 한세기 기술 가내수공업
'예산공업소'는 잠긴 금고문을 잘 여는 곳으로도 명성이 높다. 아직까지 그의 솜씨로 열지 못한 금고는 없다고 한다. 어 사장은 금고 수리 뿐만 아니라, 양은 많지 않지만, 열쇠박스 자체를 주문 받아 생산까지 한다. 지금도 금고수리 영역은 '장항선 일대 최고'다.
"기계식 금고는 열쇠나 번호를 잃어버려 못열지, 고장나는 경우는 드물어요. 한 번은 예산터미널 2층에 있는 금고에 여직원이 들어갔는데, 누군가 밖에서 금고문을 닫아 갇혔다고 급하게 연락이 왔어. 가서 보니 장비로 벽을 뜯어내려 하고 있더라고. 내가 얼른 열어줬지. 구조를 알면 어렵지 않거든."
금고를 딸 때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청진기를 사용할까?
"반은 쇼지. 멋있어야 하니까."
금고를 따주는 비용이 얼마냐는 질문에는 "금고 새로 사는 비용보다 비싸지 않아야 한다"고 답한다. 우문현답이다.
▲ 예산공업소 1대 사장인 어인태 부부. ⓒ <무한정보> 이재형
▲ 어진용씨가 시계태엽을 들고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아버지적부터 이어온 88년의 정밀수공업 가게역사는 2대를 넘어 3대 성효씨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현재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있는 성효씨의 관심분야는 계량기라고 한다. 각종 계량기를 수리·검사하고 국가가 인증해 봉인하는데 사용하는 검인활자('검'에서 'KC'로 바뀜)를 제작·판매하는 업체로 'SH테이크'라는 사업자도 냈다.
여기서 제작한 활자는 강도가 높고 수작업으로 찍는데도 편리해 경남 창녕까지 출장갈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시계부품 제작을 위해 일찌감치 수입해 들여놓은 선반과 입체금형 조각기 등 고가의 정밀기계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한다.
시계, 저울, 금고의 90여 년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 언젠가는 이 집이 시대변화에 따른 물건들과 그 부속재료들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작은 박물관이 되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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