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이상, 그가 B급 건축가였다?
[서평] 김소연 지음 <경성의 건축가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현재와 과거가 멋지게 어우러진 건축물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이다. 정조의 효성과 개혁 의지가 담긴, 생활 공간으로서의 읍성과 전쟁 대비 공간으로서의 산성 복합 도시이기도 한 공간이다. 화성은 전통이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서양의 도시 개념을 얹힌 완벽함을 자랑한다.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은 또 다른 완벽함을 지녔다. 조선 건국 당시 인의예지의 유교 이념을 고스란히 입혔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그것인데,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고 보호할 자신감이 엿보인다. 거기엔 어떤 의심도 없고 어떤 반감도 없다. 어떤 혼란도 없을 시대 가치의 구현이겠다.
수원 화성과 서울 사대문이 이처럼 나름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건, 시대의 굳건함과 건축주 또는 건축가의 굳건함 덕분이리라. 새로운 시대 조선의 시작, 조선 600년간 가장 완벽한 왕이었을 정조. 하지만 그런 시대가 영원할 순 없고, 그런 사람이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고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경성의 건축가들>(루아크)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없고 의심만 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따라 돈에 따라 사람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완벽한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다.
사물이 아닌 사연으로 바라보는 건축물
책을 통해 소개되는 한국의 1세대 근대건축가들, 그들은 많은 수가 1916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나와 총독부 산하 설계조직에 취직했다.
하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은 당연했던 바,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엔 조선인 건축주를 만나 독자적으로 설계를 하고자 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차별이 아니라, 건축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이다. 그들은 적어도 배를 곯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친일'의 냄새가 나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건축가 자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기술가였기 때문이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저자는 그 지점에 주목한다. 그들도 당시 독립운동이나 친일이 아닌 무수한 회색지대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고 말한다.
최초이자 최고의 건축가라 일컬어지는 박길룡, 건축으로 저항했던 강윤, 천재 친일파 이천승, 우리말 건축용어의 대부 장기인,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외국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와 윌리엄 보리스 등 13명의 건축과 삶은 신산하고 안타깝고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그들에게 '이해'의 눈길이 간다.
여기에서 '이해'란 최소한 친일을 향한 것은 되지 못한다. 회색지대에 있던, 타협과 저항 사이를 오가는 그들의 심정과 상황 그 자체에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그건 이 건축가들의 건축물이 사물이 아닌 사연으로 비춰야 가능할 듯하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고작 건물 한 채인 그 이면의 사연이.
경성제국 대학 본관이었던 대학로의 예술의 집, 미쓰코시백화점이었던 신세계백화점, 경교장이었던 전시관, 시민회관 자리에 들어선 세종문화회관, 조선은행 본점이었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이왕가미술관이었던 덕수궁 현대미술관, 명치좌였던 명동예술극장... 이중 최소한 두세 건물은 우리가 익히 봐서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또한 많은 근대 건축가들이 전통 가옥을 비판하며 서양 가옥을 위시한 건축 양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서양 양식이라는 게 전부라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일제를 통해 들어온 것이 대부분, '서양 따라하기'의 일제를 다시 따라했으니 저자의 말마따라 'B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게 그 시대 건축가들의 숙명이었던 것을, 직업소명에서든 시대소명에서든 이쪽에도 저쪽에도 설 수 없었던 건축가들의 생존 방법이었던 것을.
천재 시인 이상의 정체
무엇보다 새롭게 다가오는 건 천재 시인 이상의 정체(?)이다.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총독부 설계조직에 취직해서 일했던 건축 재원이다. 다만 총독부에 근무하는 조선인 건축가들이 퇴근하고 난 뒤 건축 부업을 할 때 그는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가들이 근대건축물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을 완성했을 때, 이상은 첫 장편소설과 시를 발표하고 그림으로 전람회에서 입선을 했다고 저자는 썼다.
이상은 1933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총독부 건축기수 자리에서 사직했는데, 이때까지 그의 삶은 문학보다 건축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4년 동안 건축잡지가 아닌 대중신문으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하는데, 그야말로 '이단아'로 극과 극의 평을 받는다.
저자는 건축가로서 이상을 아쉬워한다. 그가 계속 건축을 하며 독자적인 설계를 하고 작품을 남겼다면 어땠을지 하고 말이다. 저자는 그랬다면 당대 건축가들이 인식했던 물질문명의 근대를 넘어서는 건축이 나왔을지 모를 거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이상만이 표현하고 구현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건축으로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당연하게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이상을 두고 문학가 김기림은 한국문학이 50년은 후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근대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학성의 기반엔 다른 무엇도 아닌 '건축'이 있었다. 그를 '경성의 건축가들' 중 하나로 당당히 올려놓은 저자의 패기와, 문학가 이상이 아닌 건축가 이상의 삶을 끌어올린 저자의 안목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건축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건축물과 이론, 생각, 교재 등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름도 모습도 고스란히, 이름만 또는 모습만 고스란히, 아니면 터라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것들은 단지 그것들로만 남아 있지 않을 거다. 우리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사람을 사회를 시대를 역사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은 또 다른 완벽함을 지녔다. 조선 건국 당시 인의예지의 유교 이념을 고스란히 입혔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그것인데,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고 보호할 자신감이 엿보인다. 거기엔 어떤 의심도 없고 어떤 반감도 없다. 어떤 혼란도 없을 시대 가치의 구현이겠다.
수원 화성과 서울 사대문이 이처럼 나름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건, 시대의 굳건함과 건축주 또는 건축가의 굳건함 덕분이리라. 새로운 시대 조선의 시작, 조선 600년간 가장 완벽한 왕이었을 정조. 하지만 그런 시대가 영원할 순 없고, 그런 사람이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고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경성의 건축가들>(루아크)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없고 의심만 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따라 돈에 따라 사람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완벽한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다.
사물이 아닌 사연으로 바라보는 건축물
▲ <경성의 건축가들> 표지 ⓒ 루아크
하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은 당연했던 바,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엔 조선인 건축주를 만나 독자적으로 설계를 하고자 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차별이 아니라, 건축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이다. 그들은 적어도 배를 곯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친일'의 냄새가 나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건축가 자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기술가였기 때문이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저자는 그 지점에 주목한다. 그들도 당시 독립운동이나 친일이 아닌 무수한 회색지대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고 말한다.
최초이자 최고의 건축가라 일컬어지는 박길룡, 건축으로 저항했던 강윤, 천재 친일파 이천승, 우리말 건축용어의 대부 장기인,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외국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와 윌리엄 보리스 등 13명의 건축과 삶은 신산하고 안타깝고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그들에게 '이해'의 눈길이 간다.
여기에서 '이해'란 최소한 친일을 향한 것은 되지 못한다. 회색지대에 있던, 타협과 저항 사이를 오가는 그들의 심정과 상황 그 자체에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그건 이 건축가들의 건축물이 사물이 아닌 사연으로 비춰야 가능할 듯하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고작 건물 한 채인 그 이면의 사연이.
경성제국 대학 본관이었던 대학로의 예술의 집, 미쓰코시백화점이었던 신세계백화점, 경교장이었던 전시관, 시민회관 자리에 들어선 세종문화회관, 조선은행 본점이었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이왕가미술관이었던 덕수궁 현대미술관, 명치좌였던 명동예술극장... 이중 최소한 두세 건물은 우리가 익히 봐서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또한 많은 근대 건축가들이 전통 가옥을 비판하며 서양 가옥을 위시한 건축 양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서양 양식이라는 게 전부라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일제를 통해 들어온 것이 대부분, '서양 따라하기'의 일제를 다시 따라했으니 저자의 말마따라 'B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게 그 시대 건축가들의 숙명이었던 것을, 직업소명에서든 시대소명에서든 이쪽에도 저쪽에도 설 수 없었던 건축가들의 생존 방법이었던 것을.
천재 시인 이상의 정체
무엇보다 새롭게 다가오는 건 천재 시인 이상의 정체(?)이다.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총독부 설계조직에 취직해서 일했던 건축 재원이다. 다만 총독부에 근무하는 조선인 건축가들이 퇴근하고 난 뒤 건축 부업을 할 때 그는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가들이 근대건축물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을 완성했을 때, 이상은 첫 장편소설과 시를 발표하고 그림으로 전람회에서 입선을 했다고 저자는 썼다.
이상은 1933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총독부 건축기수 자리에서 사직했는데, 이때까지 그의 삶은 문학보다 건축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4년 동안 건축잡지가 아닌 대중신문으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하는데, 그야말로 '이단아'로 극과 극의 평을 받는다.
저자는 건축가로서 이상을 아쉬워한다. 그가 계속 건축을 하며 독자적인 설계를 하고 작품을 남겼다면 어땠을지 하고 말이다. 저자는 그랬다면 당대 건축가들이 인식했던 물질문명의 근대를 넘어서는 건축이 나왔을지 모를 거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이상만이 표현하고 구현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건축으로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당연하게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이상을 두고 문학가 김기림은 한국문학이 50년은 후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근대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학성의 기반엔 다른 무엇도 아닌 '건축'이 있었다. 그를 '경성의 건축가들' 중 하나로 당당히 올려놓은 저자의 패기와, 문학가 이상이 아닌 건축가 이상의 삶을 끌어올린 저자의 안목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건축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건축물과 이론, 생각, 교재 등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름도 모습도 고스란히, 이름만 또는 모습만 고스란히, 아니면 터라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것들은 단지 그것들로만 남아 있지 않을 거다. 우리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사람을 사회를 시대를 역사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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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건축가들>, (김소연 지음, 루아크 펴냄, 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