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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청강생'에게 10만 원 쥐여 준 선생님

신영복 교수, '하루를 쓰다' 제호 써주고 달력 직접 구입

등록|2017.07.02 11:38 수정|2018.01.05 17:29
모든 인연은 이야기를 낳는다.

추억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만남은 서로의 삶에 지문을 남긴다. 만날 수 없었던 누군가와 만나 눈을 맞추는 건 별이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반짝거리는 것처럼 우주적인 일이 아닐까 싶다. 만남은 우연인 것처럼 다가와 내 삶에 필연을 만들고 자신의 삶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쓰게 한다. 

▲ 신영복 선생님이 써준 글씨 ⓒ 최성문


2014년 11월 20일, 나는 '하루를 쓰다' 달력 여섯 종류를 모두 들고 성공회대 교수인 신영복 선생님을 만나러 찾아갔다. 그해 봄, 선생님에게 '하루를 쓰다' 글씨를 써달라고 지인을 통해 부탁드렸고, 우편으로 날아온 글씨는 '하루를 쓰다' 작업에 큰 격려와 힘을 주었다(관련기사 : '하루를 쓰다' 365명이 365일을 쓰다).

나는 강의실 맨 뒤에 앉아 신영복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2년 전에 들었던 내용과 같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나온 책 <담론>의 내용이 된 마지막 강의였다.

신영복 선생님과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건 딱 한 번이었다. 선생님은 늦은 밤인 오후 10시에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과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을 늘 마련했는데, 늦은 시간 탓에 참석한 건 단 한 번뿐이었다. 당시 나는 선생님이 강의하는 교육사회학 수업의 '교만한 청강생'이었다.

2012년 가을학기에 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을 청강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굉장한 소식이었다. 알고 보니 이 수업은 원하는 사람에게 늘 열려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는 형편인 사람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배움과 스승에 목말랐던 나는 책으로만 알던 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한 건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대학원생이었던 지인의 소개로 함께 듣는 강의였기에 오후 8시 15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조금은 당당한 마음으로 강의실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내가 예상했던 수업이 아니었다. 강의는 책 <담론>에 실린 글보다 더 짧게 정리된 교재를 강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 교재를 읽는 건 <국어> 교과를 배우던 시절 이후 거의 처음이었다.

게다가 수업은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이 아니었다. 내가 몰랐던 새로운 걸 알게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매번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로 갔지만, 그동안 내가 공부해온 내용을 확인받는 시간 같았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점점 교만해졌다. 오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강의는 재미없어졌다.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365명을 만나 365일을 쓰는 '하루를 쓰다'를 시작했을 때 선생님이 떠올랐다. 제호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분은 선생님이었다.

만약 내가 배움에 목마른 청강생이 아니었다면, 노숙인을 돕는 공공예술 프로젝트 '하루를 쓰다'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와 선생님은 만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선생님이 붓을 들어 글씨를 써주지 않았다면,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지루하고 재미없던 강의만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글씨를 써주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인연을 남겨주었다.

▲ 신영복 선생님에게 '하루를 쓰다'를 드리면서 함께 찍은 사진 ⓒ 최성문


'하루를 쓰다' 전시를 시작하고 바로 다음 날 달력을 들고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이 프로젝트를 까먹은 듯 느껴졌다. 워낙 좋은 일에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이 많은 이유도 있을 터였다. 선생님은 그동안 진행했던 이야기를 듣더니 결과물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선생님은 잠시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온 뒤 내게 십만 원을 쥐여 주었다. 공짜로 달력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현금이 더 있었다면 더 주었을 걸,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모두에게 약속한 대로 선생님이 준 십만 원을 노숙인 자활기금에 보탰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나온 책 <담론>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이미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이었지만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온 것은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강의는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사람과 삶에 관한 인문학적 담론입니다. 당연히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고민한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실이 공감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중략) 옛날 분들은 가르치는 것을 '깨우친다'고 했습니다. 모르던 것을 이야기만 듣고 알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그림을 보여드리면 여러분은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앨범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찾아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발 딛고 있는 땅속의 강의는 교재를 함께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교재를 낭독하고 전체가 조용히 함께 듣고 있는 교실 풍경은 공감 공간의 어떤 절정입니다."

나는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상기시키는 게 바로 선생님의 수업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공부는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기보다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앎이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로 내려와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루를 쓰다'는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한 작업이었고, 이것은 선생님이 생각한 공부의 실천과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무엇보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발, 온몸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아직 영글지 않은 생각과 어설픈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면 단점이 있기에 섣부르게 사람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단지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의 지점을 연결하고, 선생님의 책을 통해 내가 미처 놓치고 있었던 것과 다시 만나고, 그 다음 길로 용기 내어 걷고 싶을 뿐이다. 선생님이 진정으로 바란 게 이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신영복 선생님의 무덤과 하루를 쓰다 ⓒ 최성문


신영복 선생님이 고향에 묻히신 지 1년 만인 올 4월 3일, 나는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일행을 따라 밀양 영취산으로 향했다. 산길은 활짝 핀 진달래로 온통 분홍빛이었다.

진달래는 신영복 선생님이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 종이로 된 휴지에 썼던 글 <청구회 추억>을 만나게 해주었다. 2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를 순간에 유서처럼 쓴 글이었다.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고 갑작스러운 이송 통보에 선생님은 소지품 검사과정에서 이 글이 압수될 것을 염려해서 한 헌병에게 주면서 집에 전달해주거나 불가능하면 당신이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착한 헌병은 선생님의 글을 집에 전달해주었고, 1993년도에 이 글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책은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가난하고 허기진 아이들과의 인연이 담겨있다. 진달래 피던 계절에 우연히 만난 아이들에게 3년 정도 선생님이 되어준 이야기였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는 문장으로 그 시절을 추억한다. 삶을 마감할 순간에 이토록 맑은 한편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다는 것에 감동했다.

나는 진달래로 둘러싸인 선생님 무덤 앞에 앉아 말없이 술 한 잔을 따라드렸다. 그리고 돌 하나에 '하루를 쓰다'를 새겨 무덤 가까이에 두었다. 나 또한 선생님처럼 <청구회 추억> 같은 이야기 한 편 쓸 수 있는, 가난하고 허기진 인연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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