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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 술타령

등록|2017.06.27 18:07 수정|2017.06.27 18:07

▲ ⓒ 강화군청


긴 가뭄 끝에 마침내 비가 내린다. 햇볕에 타들어가는 대지를 바라보며 발 동동 구르던 농부들의 애끊는 심정이 이제야 하늘에 가 닿은 걸까? 참았던 눈물인 양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진다. 기쁨의 눈물인지, 서러움의 눈물인지... 이런 날은 누구든 마음에 맞는 사람과 술이나 한 잔 했으면 좋으련만 애꿎은 시간만 째깍째깍 흘러갈 뿐 퇴근 시각이 다 되도록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선약이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술을 먹을 수 없을 때는 또 여기저기서 걸려오던 전화가 오늘은 끝내 긴 침묵을 지키고 만다.

내가 세상을 잘못 산 것인가? 하다가, 아니, 아니 다들 바쁜 일이 있는가 보지? 하고 내키지 않는 퇴근 버스에 몸을 실으려니 문득 요 며칠 전 읽었던 조선 선조 때의 문인 석주 권필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친구가 있을 때는 술이 없더니
술이 있으니 또한 친구가 없네
한 평생의 일이 모두 이와 같으니
껄껄 웃으며 홀로 서너 잔 술을 들이켜네."


본래 제목은 "윤이성이 약속을 하고선 오지 않기에 홀로 술 몇 그릇을 마시고 장난삼아 우스개 시구를 짓다"이다. 권필이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은거하고 있을 때 지은 시인데 이러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권필은 성품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으며 광해군의 외척인 유희분(柳希奮)을 술집에서 만나 멱살을 잡고 폭언을 퍼부을 정도로 그 기개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꼬장꼬장한 선비였으니 친구도 많지 않았을 터인데 그나마 이웃에 사는 윤이성이란 자가 술을 들고 자주 찾아왔던가 보다. 석주집에 보니 윤이성은 이름이 효지(孝止)이며 강화도 오천초당(五川草堂) 동쪽에 산다고 하였다.

오는 주말에는 강화에나 한 번 가볼까 한다. 꼬장꼬장한 성품 덕에 평생을 불우하게 살면서도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 권석주와 술 한 잔 하려 한다. 강화에는 아직 그의 4대손 권적이 1739년에 세운 비석이 남아 있다고 하니 길 찾기는 어렵지 않겠다.

"세속을 피하느라 근년에 시내 안 건너고
작은 집에 흰 구름과 함께 거처하네
맑은 창 한낮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오직 있는 것은 나무 위에서 우는 산새뿐이네"


그의 임하십영 중 제 5수이다. 시내를 안 건넜다는 것은 진(晉)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하면서 절 앞의 시내를 건너 속세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는 고사를 차용한 것이다.

2017. 6. 26. 현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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