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자치는 가능한가. 마을자치는 고사하고 지금 지방자치는 과연 안녕한가. 매년 연말이면 연례행사처럼 들리는 뉴스가 있다. 감사원의 지방자치단체 감사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다. 어김없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의원들의 비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지자체장의 비리라고 하면 'I군의 5적(賊)' 이야기가 얼른 떠오른다. '5적'이란 그 지역을 장악한 뿌리깊은 토착브로커들의 위세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지방자치 선거 때마다 유독 기승을 부린다. 군수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에게 '5적'들은 미리, 알아서 수십억원까지 선거자금을 지원한다. 일종의 보험금 또는 이권사업 입도선매 보증금인 셈이다. 이른바 '5적 개발업자 토호 카르텔'은 누구든 당선만 되면 맹수가 먹이를 탐하듯 지역의 각종 이권 개발사업에 뛰어들어 본전 이상을 챙겨간다. 이들에게 지방자치란 '민주주의의 학교'가 아니다. 지방자치 선거는 선거판이 아니라 돈 놓고 돈 먹는 이전투구 격투기장 같은 투전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살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 I군 같은 농산촌지역은 마땅히 먹고 살 것도 없고 일자리도 없다. 그래서 선거판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대목이 된다. 그 구조악의 중심으로 뛰어든 지자체장은 '먹고 살 거리'와 일자리를 원하는 온갖 청탁과 비리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선거철마다 군민들의 향응과 금품 요구도 뿌리치기 어려운 게 지연, 혈연, 학연으로 작동되는 지방정치의 현실이다. 오죽하면 '봉투를 받은 뒤 투표한다'는 게 지역 유권자들의 근본 정서이자 생리라고 스스로 자조할 정도겠는가. 설사 악전고투 끝에 당선자를 내고 법정 선거는 종료된다 해도 지역 현장에서 선거전은 좀처럼 종결되지 않는다. 낙선하거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분하고 억울한 진영'에서는 창조직인 음해와 악의적인 투서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I군에서는 민선 1기 이래 지난 군수까지 모두 비리와 부정에 연루돼 불명예 중도하차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군수들의 무덤'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비단 I군만 그렇겠는가. 다른 지자체도 오십보 백보다.굳이 사례로 든 K시나 I 군 말고 다른 지역의 사정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불량사회 한국'의 어느 지방이나 시장·군수 선거 때마다 부정과 비리가 되풀이되는 구조적 원인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역마다 현지 토건업자, 조합장 등 지역 개발토호들의 부패 카르텔이 뿌리깊고 강고하다. 게다가 경상도나 전라도나 특정 지역연고 정당이 그 지역의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장악하다보니 '같은 편끼리 하는' 의정 감시의 역할 조차 미비하고 부실하다.
애초에 비리와 부정의 유혹과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게 어렵다. 이처럼 수사권도 없고 감사 기능도 미약한 지방의회가 지방정부의 실정을 감시하고 감독하기 어려우니 사실상 지자체장은 외부나 상부의 감독과 견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중앙당과 지역구 국회의원이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공천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도 숙명적 병인이다. 지방자치가 아니고 중앙통치의 유령이 여전히 지방을 일방 지배하고 있는 꼴이다.
지방정부에 시비 걸고 해코지 하는 중앙정부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1995년에 출범했으니 어느덧 성년이 넘어 어른이 된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정부는 중앙이라는 친권자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유치한 청소년 신세처럼 보인다. 일단 예산, 인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지방정부의 소신과 철학대로 할 수 있는 사업이 많지 않다. 중앙정부의 눈치를 자꾸 봐야 한다. 자칫 중앙정부와 맞서거나 눈 밖에 나면 시비와 겁박은 물론, 소송까지 각오해야 한다.
수년 전, 성남시의 이재명 시장은 "성남시의 3대 무상복지복지정책을 계획대로 시행하게 해달라"고 당시 대통령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만일 끝까지 반대한다면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할 것"이라며 청와대와 중앙정부를 향해 경고성 공개서한을 보낸 것이다. '성남시 3대 복지 차단, 진정 대통령의 뜻입니까?'라는 다분히 공격적인 제목까지 달았다. 성남시는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등 3대 복지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서 사회보장기본법 상 협의를 해야 한다며 딴지를 걸고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도 성남시의 세금을 아낀 자체 재원으로 의욕적으로 벌이는 중요한 복지정책임에도.
당시 이 시장은 이 공개서한을 통해 대통령에게 '법에 보장된 지방자치의 권한'을 분명히 밝혔다. "지방자치단체는 헌법이 정한 자치기구로 고유자치권에 기반하여 자체 재원으로 고유사무인 주민복지 증진을 위한 일을 간섭 없이 시행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께서 제안하여 만든 사회보장기본법은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중복'과 '누락'에 대해 '협의'하게 하였을 뿐, 지방정부의 복지축소를 위해 무제한적 거부권한을 준 것이 아닙니다."
성남시 이재명 시장의 분노 섞인 항변은 오늘날 우리 지방자치제가 처해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이재명시장은 성남시 지방정부를 자치하는 게 옳다. 성남시의 사례로 드러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대립과 갈등, 반목과 이견은 단지 그 지방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지방자치제의 허술하고 불완전한 현주소와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국가는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23조 제2항이다. 국가의 균형발전은 헌법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국가의 중대사다. 지금 수도권은 11.8%의 면적으로 인구의 49.5%, 취업인원의 50.3%, 지역내 총생산의 48.9%를 끌어안고 있다. 국토가 극도로 불균등하게 이용되고 비효율과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경고성 지표나 마찬가지다.
강준만교수의 '지방 식민지'론으로 함축되는 중앙과 지방, 또 지역과 지역의 불균형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이자 국가문제다. 무엇보다 지역 불균형과 격차는 '지역감정'의 뿌리이자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도시와 중소도시, 도시와 농촌, 경부축과 비경부축 사이에 다양한 차원의 격차와 반감이 발생한다. 지역 내에서도, 수도권이나 광역경제권 내에서도 낙후지역의 문제는 상존한다. 동일한 행정구역 안에서도 지역마다 격차는 피할 수 없다. 가령 서울시 같은 경우 강남과 강북의 격차, 도농복합지역의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의 격차 같은 양상이다.
지방자치의 주인은 '참여하는 시민의 공동체조직'
이같은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 간의 협력과 통합을 위해서 지방분권, 지방자치는 국가발전의 핵심과제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역불균형 또는 차별의 원인이 결국 권력의 중앙집중에 있기때문에 지방의 자율과 분권은 미룰 수 없는 숙제다. 지금처럼 지역마다 중앙정부의 한정된 재원과 기회를 선점하고 쟁취하기위한 투쟁을 벌이면서 지역간의 협력과 통합을 모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위선이고 기만이다.
실천적으로는 분권화된 지방정부에 대한 시민적 견제와 감시 기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른바 참여자치와 시민자치를 통해 시민주의적 자치분권이 실현되어야 한다. 지방분권으로 인한 지역간 격차 해소를 위해서 교정, 보완장치도 아울러 병행해서 작동해야 한다. 자칫 지역간 과도한 경쟁으로 기존의 격차와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고 확대될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는 재정조정 제도, 자치단체 간 수평적 보조, 지역최저기준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지방'이란 용어 자체가 부적절하다. '지역'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지방이란 용어는 '서울'을 중앙으로 보고 나머지 지역은 변두리 또는 나머지롤 보는 시각과 인식이 은근히 깔려있는 것이다. 지방이 아닌 지역을 발전시키는 방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저마다의 지역 안에 있다. 지역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지방재정의 절반 이상을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지역 독자적으로, 주체적으로 살 길을 모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어차피 어느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체는, 책임질 당사자는 바로 그 지역이다. 그 안에서 일터와 삶터를 꾸려가는 지역주민들이다.
그동안 우리의 지역발전 정책은 '장소(place)'에 매달렸다. '시설(hardware)'에 집착했다. SOC 같은 토건사업에 집중했다. 지역발전의 궁극적 대상이자 성과는 장소나 시설이 아니라 '사람(humanware)'이나 '프로그램, 컨텐츠(software)'라야 한다. 휴먼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위해 하드웨어와 장소가 결정되고 설계되어야 한다. 이제 인적 자원, 사람의 창의력에 의해 창출되고 개발되는 지역 고유의 특성과 자원이 지역발전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마땅히 이러한 지역발전 전략과 정책은 그 지역을 가장 잘 아는 그 지역에 의해, 지역주민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지방의 '자율'과 '책임'에 기초한 지역발전정책으로 제도와 정책의 패러다임과 기조가 혁신되어야 한다. 그렇게 지방분권, 지방주권, 지방책임경영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다만 지방분권, 지방주권, 지방책임경영의 주체는 정부나 행정이 떠맡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참여하는 시민의 공동체조직'이 나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학교'인 지방자치의 주인,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자발적 하방과 지역자립을 위해 '먹고 사는 지역생활기술'을
'서울특별난민 최소한 5백만명 자발적 하방 추진위원회'. 난민촌으로 규정하는 서울특별시에 이런 정도의 정책이 결행되어야 비로소 서울의 과밀화 문제, 농촌의 과소화 문제, 결국 지방분권과 국토균형발전의 국가적 과제가 동시에 해결된다고 확신한다. 자발적 하방을 결행하는 귀농인이야말로 사람이 없는 농촌과 지역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자 지역의 '혁신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인적 자본'으로서 지방자치 정상화의 열쇠라 할 수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생기는 도시의 문제, 사람이 너무 없어 생기는 농촌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주요한 허리, 또는 고리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다만 귀농인들이 저마다 지역에서 생활하고 정착할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농촌마을 및 지역사회 공동체를 재생하고 활성화시킬만한 사회적 자본으로서 마음가짐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미지수다. '사회적 자본'은 고사하고 독립적 가계나 제대로 꾸릴 수 있는 '먹고 사는 기술'은 갖추고 있는지 불안하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 귀농인들은 '지역에서 먹고 사는 기술'과 '지역의 사회적 자본으로서 역량'을 배운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시험을 잘 보는 기술과 친구를 이기고 나만 살아남는 기술'만 집중해서 배웠다. 각종 학원에서는 '취직을 잘 하는 기술이나 자본의 노예로 사는 기술'만 열심히 익혔다. 생활현장에서는, 지역사회 공동체에서는 쓸 모가 거의 없는 죽은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데 매진했다.
농촌과 지역의 원주민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역의 사회적 경제는 물론 마을·지역사회 공동체의 사업목적까지 책임질만한 지역사회전문가가 너무 부족하거나 빈약하다. 운동만 알고 사업을 모르는, 행사와 과정에만 집중하고 생활현장과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비전공자와 무경험자가 전문가 행세를 하는 지역과 기관이 적지 않다.
지역의 공동체와 사회적 경제 일을 능히 맡아 할 최적임자는 경제학자도, 행정공무원도, 복지운동가도, 벤처사업가도, 토건기술자, 컨설턴트나 연구원도 아닐 것이다. 사회적 경제(Community Biz)의 '사회(community)'와, 마을(지역사회)공동체의 '사회(commune)'를 두루 잘 공부하고 훈련한 '마을과 지역사회 공동체현장의 청장년 지역사회전문가'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칭 '청장년 지역사회전문가 및 생활기술자 직업전문학교'를 지역마다 세울 필요가 있다.
그렇게 '지역에서 나도 먹고 살고, 남과 이웃도 먹여살릴 수 있는 직업적 생활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자면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학교와 교육프로그램부터 개발해야 한다. 농사 짓는 법, 집 짓는 법, 음식 조리하는 법, 옷 만드는 법, 가구를 짜는 법, 에너지를 자립하는 법, 술을 빚는 법, 장사하는 법, 책을 쓰는 법, 그림을 그리는 법,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법, 노인과 장애인을 보살피는 법, 마을공동체와 사회적경제를 연구하는 법 등 '먹고 사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생활기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종다양한 '지역사회전문가'를 체계적이고 심층적으로 교육하고 육성할 '학교 밖 학교' 프로그램이라야 한다.
이때 각 광역 및 기초 지자체는 H/W(부지, 건축물 등)와 예산을, 지역의 대학은 S/W(교육프로그램, 지식정보컨텐츠, 교육멘토 등)와 청년인력, 교수요원 등 인적 자원(Humanware)를 투자하는 상호호혜적 공조․협업 방식의 프로젝트로 방식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런 직업전문학교에서 1~2년 동안 서로 가르치고 배운 학생들은 말그대로 '지역사회 전문가'와 '생활기술자'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졸업하고 지역에 터를 잡으면 마을 및 지역사회 공동체, 그리고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경제조직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유능하고 책임감있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학교에서 익힌 저마다의 생활의 기술을 직업 삼아 안정되고 지속가능한 가계도 얼마든지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지역에서 먹고 사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생활기술을 익히며 지역사회전문가로 훈련받는 동안 모두 해소될 것이다. 나아가 지방자치, 마을자치의 주력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마을자치를 위한 '농민 기본소득'을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인용해서, '계공화국으로'를 통해 "합리적인 농업은 소농들의 협동과 연대의 길"이라 가리키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을 인용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농민에게 '합리적 농업'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체제와 전혀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합리적인 농업이 가능하려면 우선 자본과 공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농업이 국가기간산업 대접을 받고, 농민은 공익농민 대우를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가령 '공익농민 기본소득' 수준의 정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농민들은 끊임없이 주장하고 제안한다. 국가에서 월급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농가의 소득안정은 물론,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된다고. 또 신규 농업인력도 유입되고 지역공동체 삶의 질도 높아진다고. 그 전에, 농업의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다원적 가치 자체가 사회공익 행위로서 얼마든지 존중되고 대접받아 마땅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정부는 귀담아 듣지 않는듯하다. 논리로는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닐텐데 아마도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걱정하는 공감능력은 전혀 없는듯하다.
무엇보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얘기를 꺼내면 일부 국민들은 당장 조세부담, 국가재정부터 걱정한다. 농업과 농촌을 잘 모르거나 기본소득제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부족하면 그럴 수 있다.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제도는 실현되기 전에는 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본소득제의 실행모델을 설계하는 일보다, 농정의 진실과 기본소득제의 가치를 국민 속으로 널리 전파하고 공유하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해 보인다.
본디 기본소득의 정신은 '게으른 베짱이'마저 당당한 국민으로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베짱이가 기본소득을 받으면 능동성과 이타성이 늘어나 부지런하고 창의적인 개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개미 중의 개미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를 더 설명해야 하나. '공익농민 기본소득'은 혁명 같은 기적을 보여줄 것이다. 농사로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이기적이고 천박한 상업농의 굴레에서 농민을 해방시킬 것이다. 사람과 자연과 공동체를 살리는 이타적이고 사회적인 공익농민으로 농투성이를 거듭나게 할 것이다. "농민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지킨다" 이 말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렵나.
'마을자치 공화국'을 경영할 농민당을
그래서 지역자립을 위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먹고 사는 생활기술 직업전문학교', 지역자치를 앞당길 '물고기'를 나눠줄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를 실현하려면 농민당이 필요하다. 복지국가 스웨덴을 일군 사민당의 장기집권은 사민당이나 노동자들의 독단적인 힘이 아니라 농민과 연대한 이른바 '노·농동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웨덴의 농민당은 진보적이거나 혁신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우파로서 그저 농민의 이익단체일 뿐이다.
하지만 좌파인 사민당은 사회복지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우파인 농민당과 힘을 합친다. 대만(중화민국)에도 농민당이 있다. 1989년 창당한 당원수 약 6000명의 군소 정당이다. 타이완 독립운동과 토지 균분론을 주장하는 중도좌파적인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다. 역시 정치 이념 보다는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존립목적이다. 대만의 민주진보당 집권기에 실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농민들의 생계가 위협당하면서 반-국민당, 반-민주진보당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중도파인 민주진보당에 비해 다소 진보적인 점 말고는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
한국에는 농민당이 없다.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독자정당이 없는 것이다. 그럴 힘도, 돈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민원과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농해수위는 '농민당'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때가 있다. 아무쪼록 소속 의원들이 좌우, 여야 구분 없이 한 목소리로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해달라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해수위의 그 별명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도저히 농해수위를 농민들의 민생을 위하는 '농민당' 대신으로 생각할 수 없다. 과연 농해수위 의원들이 농민들의 이해를 진정으로, 제대로 대변해 왔는지 믿음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농해수위 소속 국회의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지역구가 농어촌이고 유권자가 농어민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농해수위를 선택한 의원, 자기 당내에서 힘이 없어 비인기 상임위인 농해수위로 밀려난 의원, 그리고 그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의원.
농민들은 2014년 9월, 농민단체 연대기구인 '국민과 함께 하는 농민의 길'을 출범시켰다. 그 자리에서 가톨릭농민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서로 연대해 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대정부 투쟁을 결의했다. 농민들이 정부도, 국회도, 정당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농민들 스스로를 믿는 방법이다. 농민들이 정치를 하는 길이다. 국가와 사회의 주인, 권리와 책임의 주체가 되는 길이다. 농민들 스스로 '농민당'을 만들어 국회로 진출해 정부를 감시하고 정권을 견제하는 길이다. 그렇게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정치'를 농민 스스로 나서서 하는 길이다. 그보다 더 좋은 '농민의 길'은 없다.
오늘날 '불량사회 한국'에서 지방은, 마을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공간으로 전락하고 쇠락했다. 지방은 아무리 지방자치를 해도 자치도, 자립도, 자조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방 주민으로서 최소한의 자긍심이나 자존감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방이란 변방의 사막에는 중앙에 대한 피해의식, 비굴함, 열등감, 모멸감, 적개심만 가득하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중앙의 식민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헌법 제11조 1항에 따르면 '지방'이라고 해서 중앙의 '식민지'가 될 수는 없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헌법에는 분명히 명시돼 있다. 법 대로 한다면, 중앙에 살든, 지방에 살든 그 누구도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법에 적힌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어차피 법은 중앙의 기획과 의도로 쓰여졌고, 지방의 편에 서서 해석되지 않는다. 강 교수는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헌법 제11조 등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빈껍데기, 아니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면서, "지방은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ㆍ언론 등 전 분야에서 서울에 종속된 '내부식민지'"라고 개탄하고 정의한다. 그는 그 원인으로 "지방정부의 자율성도 낮을 뿐더러 재정 독립성도 약하다"는 점을 든다.
특히 인사와 예산의 종속은 지방정부의 '중앙에 줄 대기' 경향을 키웠다고 고발한다. 그래서 지역균형발전기금 조성, 수도권규제철폐의 빅딜 등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지역주의'에서 '지방주의'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지역주의'는 지역 인사가 서울의 중앙권력을 욕망하지만, '지방주의'는 중앙집권 자체를 지양한다는 것이다. 곧 '지방주의'에서 서울과 지방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지방주의'든 '마을주의'든 '마을자치 민주공화국'이 마을이 살 길이다.
지자체장의 비리라고 하면 'I군의 5적(賊)' 이야기가 얼른 떠오른다. '5적'이란 그 지역을 장악한 뿌리깊은 토착브로커들의 위세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지방자치 선거 때마다 유독 기승을 부린다. 군수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에게 '5적'들은 미리, 알아서 수십억원까지 선거자금을 지원한다. 일종의 보험금 또는 이권사업 입도선매 보증금인 셈이다. 이른바 '5적 개발업자 토호 카르텔'은 누구든 당선만 되면 맹수가 먹이를 탐하듯 지역의 각종 이권 개발사업에 뛰어들어 본전 이상을 챙겨간다. 이들에게 지방자치란 '민주주의의 학교'가 아니다. 지방자치 선거는 선거판이 아니라 돈 놓고 돈 먹는 이전투구 격투기장 같은 투전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살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 I군 같은 농산촌지역은 마땅히 먹고 살 것도 없고 일자리도 없다. 그래서 선거판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대목이 된다. 그 구조악의 중심으로 뛰어든 지자체장은 '먹고 살 거리'와 일자리를 원하는 온갖 청탁과 비리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선거철마다 군민들의 향응과 금품 요구도 뿌리치기 어려운 게 지연, 혈연, 학연으로 작동되는 지방정치의 현실이다. 오죽하면 '봉투를 받은 뒤 투표한다'는 게 지역 유권자들의 근본 정서이자 생리라고 스스로 자조할 정도겠는가. 설사 악전고투 끝에 당선자를 내고 법정 선거는 종료된다 해도 지역 현장에서 선거전은 좀처럼 종결되지 않는다. 낙선하거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분하고 억울한 진영'에서는 창조직인 음해와 악의적인 투서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I군에서는 민선 1기 이래 지난 군수까지 모두 비리와 부정에 연루돼 불명예 중도하차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군수들의 무덤'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비단 I군만 그렇겠는가. 다른 지자체도 오십보 백보다.굳이 사례로 든 K시나 I 군 말고 다른 지역의 사정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불량사회 한국'의 어느 지방이나 시장·군수 선거 때마다 부정과 비리가 되풀이되는 구조적 원인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지역마다 현지 토건업자, 조합장 등 지역 개발토호들의 부패 카르텔이 뿌리깊고 강고하다. 게다가 경상도나 전라도나 특정 지역연고 정당이 그 지역의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장악하다보니 '같은 편끼리 하는' 의정 감시의 역할 조차 미비하고 부실하다.
애초에 비리와 부정의 유혹과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게 어렵다. 이처럼 수사권도 없고 감사 기능도 미약한 지방의회가 지방정부의 실정을 감시하고 감독하기 어려우니 사실상 지자체장은 외부나 상부의 감독과 견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중앙당과 지역구 국회의원이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공천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것도 숙명적 병인이다. 지방자치가 아니고 중앙통치의 유령이 여전히 지방을 일방 지배하고 있는 꼴이다.
▲ 홍성 갓골마을마을자치 민주공화국의 작은 실험장 ‘홍성 홍동면 갓골마을’ ⓒ 정기석
지방정부에 시비 걸고 해코지 하는 중앙정부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1995년에 출범했으니 어느덧 성년이 넘어 어른이 된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정부는 중앙이라는 친권자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유치한 청소년 신세처럼 보인다. 일단 예산, 인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지방정부의 소신과 철학대로 할 수 있는 사업이 많지 않다. 중앙정부의 눈치를 자꾸 봐야 한다. 자칫 중앙정부와 맞서거나 눈 밖에 나면 시비와 겁박은 물론, 소송까지 각오해야 한다.
수년 전, 성남시의 이재명 시장은 "성남시의 3대 무상복지복지정책을 계획대로 시행하게 해달라"고 당시 대통령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만일 끝까지 반대한다면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할 것"이라며 청와대와 중앙정부를 향해 경고성 공개서한을 보낸 것이다. '성남시 3대 복지 차단, 진정 대통령의 뜻입니까?'라는 다분히 공격적인 제목까지 달았다. 성남시는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등 3대 복지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서 사회보장기본법 상 협의를 해야 한다며 딴지를 걸고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서도 성남시의 세금을 아낀 자체 재원으로 의욕적으로 벌이는 중요한 복지정책임에도.
당시 이 시장은 이 공개서한을 통해 대통령에게 '법에 보장된 지방자치의 권한'을 분명히 밝혔다. "지방자치단체는 헌법이 정한 자치기구로 고유자치권에 기반하여 자체 재원으로 고유사무인 주민복지 증진을 위한 일을 간섭 없이 시행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께서 제안하여 만든 사회보장기본법은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중복'과 '누락'에 대해 '협의'하게 하였을 뿐, 지방정부의 복지축소를 위해 무제한적 거부권한을 준 것이 아닙니다."
성남시 이재명 시장의 분노 섞인 항변은 오늘날 우리 지방자치제가 처해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이재명시장은 성남시 지방정부를 자치하는 게 옳다. 성남시의 사례로 드러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대립과 갈등, 반목과 이견은 단지 그 지방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지방자치제의 허술하고 불완전한 현주소와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국가는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123조 제2항이다. 국가의 균형발전은 헌법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국가의 중대사다. 지금 수도권은 11.8%의 면적으로 인구의 49.5%, 취업인원의 50.3%, 지역내 총생산의 48.9%를 끌어안고 있다. 국토가 극도로 불균등하게 이용되고 비효율과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경고성 지표나 마찬가지다.
강준만교수의 '지방 식민지'론으로 함축되는 중앙과 지방, 또 지역과 지역의 불균형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이자 국가문제다. 무엇보다 지역 불균형과 격차는 '지역감정'의 뿌리이자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도시와 중소도시, 도시와 농촌, 경부축과 비경부축 사이에 다양한 차원의 격차와 반감이 발생한다. 지역 내에서도, 수도권이나 광역경제권 내에서도 낙후지역의 문제는 상존한다. 동일한 행정구역 안에서도 지역마다 격차는 피할 수 없다. 가령 서울시 같은 경우 강남과 강북의 격차, 도농복합지역의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의 격차 같은 양상이다.
▲ 마실방 뜰 홍성 홍동면 주민들이 협동해서 공동으로 자영하는 마을공동체술집 ‘마실방뜰’ ⓒ 정기석
지방자치의 주인은 '참여하는 시민의 공동체조직'
이같은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 간의 협력과 통합을 위해서 지방분권, 지방자치는 국가발전의 핵심과제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역불균형 또는 차별의 원인이 결국 권력의 중앙집중에 있기때문에 지방의 자율과 분권은 미룰 수 없는 숙제다. 지금처럼 지역마다 중앙정부의 한정된 재원과 기회를 선점하고 쟁취하기위한 투쟁을 벌이면서 지역간의 협력과 통합을 모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위선이고 기만이다.
실천적으로는 분권화된 지방정부에 대한 시민적 견제와 감시 기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른바 참여자치와 시민자치를 통해 시민주의적 자치분권이 실현되어야 한다. 지방분권으로 인한 지역간 격차 해소를 위해서 교정, 보완장치도 아울러 병행해서 작동해야 한다. 자칫 지역간 과도한 경쟁으로 기존의 격차와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고 확대될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는 재정조정 제도, 자치단체 간 수평적 보조, 지역최저기준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지방'이란 용어 자체가 부적절하다. '지역'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지방이란 용어는 '서울'을 중앙으로 보고 나머지 지역은 변두리 또는 나머지롤 보는 시각과 인식이 은근히 깔려있는 것이다. 지방이 아닌 지역을 발전시키는 방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저마다의 지역 안에 있다. 지역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지방재정의 절반 이상을 중앙정부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지역 독자적으로, 주체적으로 살 길을 모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어차피 어느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체는, 책임질 당사자는 바로 그 지역이다. 그 안에서 일터와 삶터를 꾸려가는 지역주민들이다.
그동안 우리의 지역발전 정책은 '장소(place)'에 매달렸다. '시설(hardware)'에 집착했다. SOC 같은 토건사업에 집중했다. 지역발전의 궁극적 대상이자 성과는 장소나 시설이 아니라 '사람(humanware)'이나 '프로그램, 컨텐츠(software)'라야 한다. 휴먼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위해 하드웨어와 장소가 결정되고 설계되어야 한다. 이제 인적 자원, 사람의 창의력에 의해 창출되고 개발되는 지역 고유의 특성과 자원이 지역발전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마땅히 이러한 지역발전 전략과 정책은 그 지역을 가장 잘 아는 그 지역에 의해, 지역주민들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 지방의 '자율'과 '책임'에 기초한 지역발전정책으로 제도와 정책의 패러다임과 기조가 혁신되어야 한다. 그렇게 지방분권, 지방주권, 지방책임경영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다만 지방분권, 지방주권, 지방책임경영의 주체는 정부나 행정이 떠맡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참여하는 시민의 공동체조직'이 나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학교'인 지방자치의 주인,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풀무생협마을주민들에게 안전하고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풀무생협' ⓒ 정기석
자발적 하방과 지역자립을 위해 '먹고 사는 지역생활기술'을
'서울특별난민 최소한 5백만명 자발적 하방 추진위원회'. 난민촌으로 규정하는 서울특별시에 이런 정도의 정책이 결행되어야 비로소 서울의 과밀화 문제, 농촌의 과소화 문제, 결국 지방분권과 국토균형발전의 국가적 과제가 동시에 해결된다고 확신한다. 자발적 하방을 결행하는 귀농인이야말로 사람이 없는 농촌과 지역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자 지역의 '혁신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인적 자본'으로서 지방자치 정상화의 열쇠라 할 수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생기는 도시의 문제, 사람이 너무 없어 생기는 농촌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주요한 허리, 또는 고리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다만 귀농인들이 저마다 지역에서 생활하고 정착할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농촌마을 및 지역사회 공동체를 재생하고 활성화시킬만한 사회적 자본으로서 마음가짐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미지수다. '사회적 자본'은 고사하고 독립적 가계나 제대로 꾸릴 수 있는 '먹고 사는 기술'은 갖추고 있는지 불안하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 귀농인들은 '지역에서 먹고 사는 기술'과 '지역의 사회적 자본으로서 역량'을 배운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시험을 잘 보는 기술과 친구를 이기고 나만 살아남는 기술'만 집중해서 배웠다. 각종 학원에서는 '취직을 잘 하는 기술이나 자본의 노예로 사는 기술'만 열심히 익혔다. 생활현장에서는, 지역사회 공동체에서는 쓸 모가 거의 없는 죽은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데 매진했다.
농촌과 지역의 원주민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역의 사회적 경제는 물론 마을·지역사회 공동체의 사업목적까지 책임질만한 지역사회전문가가 너무 부족하거나 빈약하다. 운동만 알고 사업을 모르는, 행사와 과정에만 집중하고 생활현장과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비전공자와 무경험자가 전문가 행세를 하는 지역과 기관이 적지 않다.
지역의 공동체와 사회적 경제 일을 능히 맡아 할 최적임자는 경제학자도, 행정공무원도, 복지운동가도, 벤처사업가도, 토건기술자, 컨설턴트나 연구원도 아닐 것이다. 사회적 경제(Community Biz)의 '사회(community)'와, 마을(지역사회)공동체의 '사회(commune)'를 두루 잘 공부하고 훈련한 '마을과 지역사회 공동체현장의 청장년 지역사회전문가'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칭 '청장년 지역사회전문가 및 생활기술자 직업전문학교'를 지역마다 세울 필요가 있다.
그렇게 '지역에서 나도 먹고 살고, 남과 이웃도 먹여살릴 수 있는 직업적 생활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자면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학교와 교육프로그램부터 개발해야 한다. 농사 짓는 법, 집 짓는 법, 음식 조리하는 법, 옷 만드는 법, 가구를 짜는 법, 에너지를 자립하는 법, 술을 빚는 법, 장사하는 법, 책을 쓰는 법, 그림을 그리는 법,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법, 노인과 장애인을 보살피는 법, 마을공동체와 사회적경제를 연구하는 법 등 '먹고 사는 데 절실하게 필요한 생활기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종다양한 '지역사회전문가'를 체계적이고 심층적으로 교육하고 육성할 '학교 밖 학교' 프로그램이라야 한다.
이때 각 광역 및 기초 지자체는 H/W(부지, 건축물 등)와 예산을, 지역의 대학은 S/W(교육프로그램, 지식정보컨텐츠, 교육멘토 등)와 청년인력, 교수요원 등 인적 자원(Humanware)를 투자하는 상호호혜적 공조․협업 방식의 프로젝트로 방식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런 직업전문학교에서 1~2년 동안 서로 가르치고 배운 학생들은 말그대로 '지역사회 전문가'와 '생활기술자'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졸업하고 지역에 터를 잡으면 마을 및 지역사회 공동체, 그리고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경제조직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유능하고 책임감있는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학교에서 익힌 저마다의 생활의 기술을 직업 삼아 안정되고 지속가능한 가계도 얼마든지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지역에서 먹고 사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생활기술을 익히며 지역사회전문가로 훈련받는 동안 모두 해소될 것이다. 나아가 지방자치, 마을자치의 주력이 될 수 있다.
▲ 공동생활가정 사천 한월마을의 ‘공동생활가정’ ⓒ 정기석
지속가능한 마을자치를 위한 '농민 기본소득'을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인용해서, '계공화국으로'를 통해 "합리적인 농업은 소농들의 협동과 연대의 길"이라 가리키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을 인용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농민에게 '합리적 농업'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체제와 전혀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합리적인 농업이 가능하려면 우선 자본과 공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농업이 국가기간산업 대접을 받고, 농민은 공익농민 대우를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가령 '공익농민 기본소득' 수준의 정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농민들은 끊임없이 주장하고 제안한다. 국가에서 월급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농가의 소득안정은 물론,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된다고. 또 신규 농업인력도 유입되고 지역공동체 삶의 질도 높아진다고. 그 전에, 농업의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다원적 가치 자체가 사회공익 행위로서 얼마든지 존중되고 대접받아 마땅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정부는 귀담아 듣지 않는듯하다. 논리로는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닐텐데 아마도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걱정하는 공감능력은 전혀 없는듯하다.
무엇보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제' 얘기를 꺼내면 일부 국민들은 당장 조세부담, 국가재정부터 걱정한다. 농업과 농촌을 잘 모르거나 기본소득제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부족하면 그럴 수 있다.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제도는 실현되기 전에는 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본소득제의 실행모델을 설계하는 일보다, 농정의 진실과 기본소득제의 가치를 국민 속으로 널리 전파하고 공유하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해 보인다.
본디 기본소득의 정신은 '게으른 베짱이'마저 당당한 국민으로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베짱이가 기본소득을 받으면 능동성과 이타성이 늘어나 부지런하고 창의적인 개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개미 중의 개미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하는 이유를 더 설명해야 하나. '공익농민 기본소득'은 혁명 같은 기적을 보여줄 것이다. 농사로 돈을 벌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이기적이고 천박한 상업농의 굴레에서 농민을 해방시킬 것이다. 사람과 자연과 공동체를 살리는 이타적이고 사회적인 공익농민으로 농투성이를 거듭나게 할 것이다. "농민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지킨다" 이 말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렵나.
▲ 송광면 아카이브순천 송광면의 ‘송광면 아카이브, 추억의 전시관’ ⓒ 정기석
'마을자치 공화국'을 경영할 농민당을
그래서 지역자립을 위해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먹고 사는 생활기술 직업전문학교', 지역자치를 앞당길 '물고기'를 나눠줄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를 실현하려면 농민당이 필요하다. 복지국가 스웨덴을 일군 사민당의 장기집권은 사민당이나 노동자들의 독단적인 힘이 아니라 농민과 연대한 이른바 '노·농동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웨덴의 농민당은 진보적이거나 혁신적이지 않다. 전형적인 우파로서 그저 농민의 이익단체일 뿐이다.
하지만 좌파인 사민당은 사회복지라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우파인 농민당과 힘을 합친다. 대만(중화민국)에도 농민당이 있다. 1989년 창당한 당원수 약 6000명의 군소 정당이다. 타이완 독립운동과 토지 균분론을 주장하는 중도좌파적인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다. 역시 정치 이념 보다는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존립목적이다. 대만의 민주진보당 집권기에 실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농민들의 생계가 위협당하면서 반-국민당, 반-민주진보당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중도파인 민주진보당에 비해 다소 진보적인 점 말고는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
한국에는 농민당이 없다.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독자정당이 없는 것이다. 그럴 힘도, 돈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 민원과 이해관계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농해수위는 '농민당'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때가 있다. 아무쪼록 소속 의원들이 좌우, 여야 구분 없이 한 목소리로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해달라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해수위의 그 별명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도저히 농해수위를 농민들의 민생을 위하는 '농민당' 대신으로 생각할 수 없다. 과연 농해수위 의원들이 농민들의 이해를 진정으로, 제대로 대변해 왔는지 믿음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농해수위 소속 국회의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지역구가 농어촌이고 유권자가 농어민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농해수위를 선택한 의원, 자기 당내에서 힘이 없어 비인기 상임위인 농해수위로 밀려난 의원, 그리고 그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의원.
농민들은 2014년 9월, 농민단체 연대기구인 '국민과 함께 하는 농민의 길'을 출범시켰다. 그 자리에서 가톨릭농민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서로 연대해 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대정부 투쟁을 결의했다. 농민들이 정부도, 국회도, 정당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농민들 스스로를 믿는 방법이다. 농민들이 정치를 하는 길이다. 국가와 사회의 주인, 권리와 책임의 주체가 되는 길이다. 농민들 스스로 '농민당'을 만들어 국회로 진출해 정부를 감시하고 정권을 견제하는 길이다. 그렇게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정치'를 농민 스스로 나서서 하는 길이다. 그보다 더 좋은 '농민의 길'은 없다.
오늘날 '불량사회 한국'에서 지방은, 마을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공간으로 전락하고 쇠락했다. 지방은 아무리 지방자치를 해도 자치도, 자립도, 자조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방 주민으로서 최소한의 자긍심이나 자존감도 찾아보기 어렵다. 지방이란 변방의 사막에는 중앙에 대한 피해의식, 비굴함, 열등감, 모멸감, 적개심만 가득하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중앙의 식민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헌법 제11조 1항에 따르면 '지방'이라고 해서 중앙의 '식민지'가 될 수는 없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헌법에는 분명히 명시돼 있다. 법 대로 한다면, 중앙에 살든, 지방에 살든 그 누구도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법에 적힌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어차피 법은 중앙의 기획과 의도로 쓰여졌고, 지방의 편에 서서 해석되지 않는다. 강 교수는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헌법 제11조 등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빈껍데기, 아니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면서, "지방은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ㆍ언론 등 전 분야에서 서울에 종속된 '내부식민지'"라고 개탄하고 정의한다. 그는 그 원인으로 "지방정부의 자율성도 낮을 뿐더러 재정 독립성도 약하다"는 점을 든다.
특히 인사와 예산의 종속은 지방정부의 '중앙에 줄 대기' 경향을 키웠다고 고발한다. 그래서 지역균형발전기금 조성, 수도권규제철폐의 빅딜 등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지역주의'에서 '지방주의'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지역주의'는 지역 인사가 서울의 중앙권력을 욕망하지만, '지방주의'는 중앙집권 자체를 지양한다는 것이다. 곧 '지방주의'에서 서울과 지방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지방주의'든 '마을주의'든 '마을자치 민주공화국'이 마을이 살 길이다.
덧붙이는 글
※ 마을학개론(an introduction to Communology/ 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 : 귀농을 하거나 자발적 하방을 해서 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마을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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