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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광주에서 미래를 보다

'임을 위한 행진', 계속되어야

등록|2017.07.10 11:50 수정|2017.07.10 11:50
2017년 5월 18일 광주가 울었다. 서른일곱 돌을 맞은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 유족도 울었고 시민도 울었다. 대통령도 울었다. 37년 전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촛불 혁명으로 이어졌고 지난 5월 뜻하지 않게 치러진 '장미 대선'에서 새 정권, 이른바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8일 만에 거행된 5·18 기념식은 감격과 눈물이 뒤섞인 한 편의 드라마였다. 따뜻한 위로였다. 마치 취임사 같았던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광주시민들의 큰아픔 하나를 치유했다. 진정성과 감동의 여운이 담겨있는 깊은 울림이었다. '광주의 아픔과 슬픔'을 껴안았다. 틀에 박힌 듯 딱딱하기만 했던 정부 공식 기념행사를 보며 눈물이 나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생후 3일 만에 아버지 잃은 김소형씨,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1980년 5월 18일에 태어난 유가족 김소형씨가 항쟁 기간 중 계엄군에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슬픈 생일'의 편지를 읽는 순간, 기념식 참석자들은 물론 중계방송을 보던 시민들도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통령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눈물로 쓴 편지를 읽고 퇴장하는 김소형 씨를 따라가서 한참 동안 안아 줬다. "울지 마세요. 기념식 끝나고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러 같이 갑시다"라는 대통령의 위로에 소형씨는 겨우 눈물을 멈췄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기념식의 하이라이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었다. 지난 보수 정권 9년 동안 '종북의 옷'을 입고 갇혀 있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임을 위한 행진곡이 대통령 업무지시 제2호로 족쇄가 풀렸다. 담대한 '민주의 옷'으로 갈아입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종북 프레임에 가둬 제창을 가로막았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사표를 1호로 처리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애국가와 같이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로 재탄생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 운동 때 광주를 찾아 "대통령으로 돌아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겠다"는 공약을 지켰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상처받은 광주 정신을 다시 살려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입 다문 정우택문재인 대통령(왼쪽 다섯째), 정세균 국회의장, 김이수 헌재소장 권한대행 등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한편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권한대행(오른쪽 둘째)은 입을 다물고 있다. 행사를 마친 뒤 정 대표는 ‘5·18 민주 영령에 대한 추념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사항’이라며 노래를 부르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 공동취재사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은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하다 1979년 먼저 세상을 떠난 노동운동가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1981년 늦가을, 이 영혼결혼식 소식을 들은 소설가 황석영과 대학가요제 출신의 김종률(당시 전남대 재학 중), 오창규 MBC 방송국 PD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을 만들었다. 황석영의 2층 집 밀폐된 골방에서 꽹과리, 징, 기타, 카세트 녹음기 같은 소도구만 갖고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 여 만에 노래극이 완성됐다.

이 노래극의 피날레를 장식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김종률 현 광주 문화재단 사무처장이 작곡하고 가사는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장이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 시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이 붙였다.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과 만여 명의 참석자들이 손에 손잡고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광주만의 노래가 아니다. 질곡의 현대사와 맥을 함께한 주옥같은 '민중의 노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프랑스혁명 시기에 만들어진 프랑스 국가 '라 마르셰에즈'와 비유되는 이유는 광주 민중항쟁이 세월을 거듭하며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아픈 손가락', 망월동 옛 묘역

우리 현대사에서 부침을 겪어온 5·18은 한 세대 하고도 7년이 지나는 동안 총체적인 의미의 변화를 겪어 왔다. 폭력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광주사태'는 13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되었고, 당시의 '폭도'들은 '민주 유공자'가 되었다. 통곡과 죽음의 상징이었던 '망월동 묘지'는 '국립 5·18 민주묘지'로 승격 이전되었다.

광주에는 5·18을 기억하는 숱한 항쟁의 공간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서럽고 후미진 곳은 사적 제24호인 망월동 옛 묘역일 것이다. 망월동(望月洞),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 대한민국 민주화의 성지 구 망월동 묘역 ⓒ 임영열


망월동 묘역은 처음부터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 아니다. 5·18 때 계엄군의 총칼에 의해 희생당한 시신들을 유족이나 친지들이 계엄군에게 들킬까 봐, 야밤에 소달구지나 손수레에 싣고 와서 몰래 묻었다. 무연고 희생자와 5월 27일 새벽, 도청이 함락당할 때 마지막 항쟁의 주검들은 상무관에 안치된 후 시청 청소차에 실려 와 여기에 집단 매장되었다. 광주의 아픔과 슬픔이 집약된 곳이다. 그날의 처절함과 통곡이 남아 있다.

그 뒤 이곳이 '민주의 성지'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자, 군사 반란 집단은 무덤을 파내게 하는 등 묘지 자체를 없애려고 회유, 협박했다. 영령들은 죽어서까지 수모를 당했다. 1994년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5월 18일 신묘역이 완성되었다. 치욕의 17년 세월을 뒤로하고 새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5.18 당시 행방불명된 65인중 29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임영열


이곳에는 1987년 '6․ 29 선언'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던 6월 항쟁의 주역, 이한열 열사와 문 대통령이 기념식에서 직접 호명했던 표정두, 조성만 열사가 영면하고 있다. 2015년 농민 총궐기대회에 참석했다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 열사도 안식하고 있다.

특별한 또 한 사람, 5·18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도 그의 유언에 따라 여기에 잠들어 있다. 5․18 진상규명과 정신계승,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운명한 학생, 노동, 재야 열사들이 안장되어 있다. 지금은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라고 부른다.

▲ 시가 있는 길에 세워진 전남매일 신문기자 일동의 사직서 ⓒ 임영열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신묘역에서 구묘역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는 '시가 있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5·18을 시와 글로 승화시킨 시비들이 오솔길 양옆으로 세워져 있다. 김지하, 문병란, 김남주, 고정희, 황지우, 김용택, 신경림 등 약 50여 명의 시인들의 시와 글들이 새겨진 시비들이 서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매일> 기자들의 글이 가슴을 친다. 항쟁 기간 동안 광주는 완전하게 '고립된 섬' 이었다. 교통·통신은 물론이며 언론까지 철저히 통제됐다. 5월 20일 기자들이 18~19일에 있던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썼는데 인쇄 직전 모두 삭제되었다. <전남매일> 모든 기자는 다음과 같은 사직서를 쓰고 붓을 내려놓는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전남매일> 기자 일동 1980. 5. 20

옛 묘역으로 들어가는 길바닥에 특별한 비석 하나가 묻혀있다. 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비석을 지르밟고 가야 한다. 하도 밟고 지나가서 비문이 거의 닳아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이름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기념비'다

▲ 망월동 묘역 길바닥에 묻혀있는 전두환 부부 민박 기념비 ⓒ 임영열


1982년 3월, 광주학살의 책임자 전두환 부부는 이곳에서 가까운 전남 담양군 고서면 성산 마을을 방문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989년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이 비를 부순 뒤 묘역 입구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도록 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2년 제18대 대선 후보 시절에 이 비를 밟고 지나갔다. 지금까지도 전두환은 "나는 광주사태 치유를 위해 내놓을 씻김굿의 제물"이라는 망언을 계속하고 있다.

광주에는 27곳의 5·18 사적지가 있다. '광주의 아픈 손가락들'이다. 그중에서도 구 광주교도소와 구 적십자 병원은 아주 아픈 손가락이다. 광주교도소는 계엄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담양,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양민이 희생당한 곳이다. 무고한 시민들이 이곳 교도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 시신은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가 5·18 직후 발굴되었다. 이번 국정 농단 사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고영태의 아버지도 5·18 때 이곳에서 사망 후 암매장당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 5.18 당시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던 구 광주 교도소 ⓒ 임영열


구 광주 적십자병원은 부상당한 시민군뿐만 아니라 계엄군도 헌신적으로 치료해주고 돌본 장소다. 피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하여, 5·18 정신의 근본인 '더불어 살아가는 대동세상'을 몸소 실천했다. 23구의 원통한 주검들이 안치되었다가 손수레에 실려 상무관으로 보내진 곳이다. 안타깝게도 이 역사의 현장은 이미 지워졌다. 20여 년 전, 한 사학재단에 매각된 옛 적십자 병원은 의료기관으로서 제 기능마저 잃어버린 채 사학 비리의 희생양이 되어 도심 속 흉물로 전락해 있다.

'아픔'과 '슬픔'을 넘어서

역사란 무엇일까.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만은 아니다. 특정 장소와 함께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고 있으며, 미래를 비추는 등댓불이다. 새로운 것의 근원이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18은 37주년이 지났음에도 정립되지 않은 역사로 남아 있다. 시대에 따라 참모습이 흔들리며 '왜곡과 폄훼'로 점철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대로 5·18 정신은 3․1 운동, 4․19 혁명과 더불어 헌법 전문에 넣어져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혀야 한다. 헬기 사격을 포함한 '발포 명령'의 진상과 책임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역사의 현장, 옛 전남도청 별관과 훼손된 사적지들은 원형대로 복원되어 '의향 광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살려내야 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기억도 사라지고,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제 5·18은 아픔과 슬픔을 넘어서 '민주', '인권', '평화'로 대변되는 '임의 진정한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야 할 때다.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으로, 통일로, 세계로 번져 나갈 절호의 기회가 왔다. '임을 위한 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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