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 공론조사로 결정하기로
지난 6월 27일 국무조정실에서 신고리 5, 6호기 건설 공사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답니다(주1). 약 3개월간 공사를 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건설을 중단할지 여부는 국민 대표단(배심원)이 참여하는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했답니다.
정부가 이렇게 발표하자 여러 언론사들이 관련 기사들을 쏟아내고 사설로도 의견을 표현했습니다. 언론사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은데요, 하나는 정부의 방침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의견이고, 또 하나는 전문가도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 그런 중대한 결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인 것 같습니다(주2).
도대체 공론조사가 뭐길래 그에 대한 찬반이 이렇게 갈리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래서 제가 아는 한에서 공론조사라는 것의 배경과 절차, 장단점 등을 말씀 드리려고 이 글을 씁니다.
2. 공론조사(숙의 민주주의)의 배경: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
공론 조사(Deliberative Polling)는 숙의(Deliberative) 민주주의 과정의 한 종류입니다. 숙의 민주주의의 배경도 자세히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은 나와야 되는데요, 그냥 짧게 말씀 드리자면, 대리인에게 정치를 맡기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나왔습니다. 즉, 숙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직접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아서 그 대리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의사결정을 하게 만드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 국민투표를 해서 국민들이 직접 결정하면 직접 민주주의라고 우리는 고등학교 때 배웠습니다. 그런데, 숙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표결만 하는 직접 민주주의에 '숙의적 토론'(Deliberation)을 추가한 것입니다.
단순한 표결에 숙의적 토론을 더한 이유는 인간의 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중세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을 부정했습니다. 인간들은 욕망으로 가득할 뿐이기 때문에 그 욕망을 도덕률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반해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근대 철학 혁명에선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기도 합니다. '비전문가인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겠는가?'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인간의 이성적 판단 능력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인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혜택으로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했던 철학자 플라톤이 바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어리석은 민중에게 의사 결정을 맡겨선 안 된다. 정책 결정은 똑똑한 철학자만 해야 한다'라는, 그 유명한 철인(哲人) 정치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플라톤의 철인(철학자) 정치론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사상인데도,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교과서에서 훌륭한 사상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이 엘리트주의, 전문가주의, 과학주의 등으로 변형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신고리 5, 6호기 중단 문제를 국민들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언론들이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결정을 맡기면 안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은 어리석고 전문가는 똑똑한가요?
3. 공론조사의 구조와 절차
공론조사의 구조는 <그림>과 같습니다.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 간단합니다. 정책 결정권자인 대통령 등이 공론조사를 하자고 제안하고는 주제를 정합니다. 그러면 실무적인 진행을 공론화 위원회에서 맡아서 하는데요, 먼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일반적인 설문 조사를 합니다. (물론 국민 전체라 하더라도 표본 추출을 합니다.)
(1) 전후 설문에 의한 태도 변화의 측정
그 다음 토론에 참가할 국민 대표단을 뽑아서 1박 2일간 숙의 토론을 합니다. 여기서 토론 이전과 이후에 동일한 설문을 해서 참가자들이 토론의 결과 그 문제에 대한 태도가 변했는지를 측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앞서 숙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말씀 드렸죠? 인간이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왜곡되지 않은 과학적 정보를 들으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이죠. 또한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참가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도 배우게 됩니다. 특히 5명~10명으로 구성된 조별 토론을 할 때 이런 배움이 가장 잘 일어난다고 합니다(Gastil & Levine, 2005).
(2) 사회적 학습
이런 배움을 사회적 학습이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참가자들끼리 배우기 때문에 사회적 학습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회적 학습이 일어난다는 점이 일반적인 설문과 공론조사의 핵심적인 차이점입니다. 여러분들도 일반 설문을 받아볼 때 황당하거나 화가 난 적이 있지 않나요? 설문 문항이 뭔가 조작된 결론으로 향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은 내용을 잘 모르는데 자꾸 답을 하라고 해서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공론 조사에선, 잘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거나 발표자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토론 이후에 동일한 설문을 해보면 참가자들의 태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변합니다. 이것은 토론의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죠. 공론조사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사회적 학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정책 결정은 국민 대표단이 아니라 정책 결정권자가 한다
국민 대표단에 의한 1박 2일간의 토론이 끝나면 공론화 위원회가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책 결정권자에게 제출합니다. 그러면 정책 결정권자는 국민 대표단의 의견을 보고 정책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할 때 약간의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법률에 의해서 발전소 건설을 중단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마치 공론조사 그 자체에 의해 결정하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공론조사에 참여한 국민 대표단은 자신들의 의견을 설문 조사로 나타낼 뿐이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 자신입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할 때 표현을 잘못 했는지, 아니면 언론이 일부러 오해를 했는지, 마치 국민 대표단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도한 언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여론 재판'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더군요.
국민 대표단이 최종 정책까지 결정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토론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숙의 민주주의 토론에선 인간이 가진 이성과 지혜가 발휘됩니다. 특히 이때 이성을 '공적 이성(Public Reason)'이라고 합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경제주체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적 이성(private reason)만을 발휘하는 반면, 숙의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국민 대표단은 공적 이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어떤 정책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책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민 대표단의 결정에 완전히 정책을 맡겨 버린다면 국민 대표단은 오히려 찬반 양측의 로비 압력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대통령 등 책임 있는 공직자가 나서서 '결정은 제가 하고, 책임도 제가 집니다. 국민 여러분은 지혜만 모아 주십시요.'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국민들의 공적 이성이 더 잘 발휘됩니다.
(4) 방송 보도의 중요성
공론조사에서 텔레비전 방송 보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공론조사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국민들도 토론의 과정과 결과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공론조사에선 공적 이성이 발휘되며, 사회적 학습을 통해 태도가 변합니다. 방송 보도를 해주면 토론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들도 간접적으로 이런 사회적 학습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토론 과정에 대해서는 글자로 된 정보를 나르는 신문보다 동영상으로 된 정보를 나르는 방송사가 더 효과적입니다. 그 동안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인터넷 상에서 진행한 적도 있지만, 토론으로 인한 태도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보면서 이야기해야 종합적인 정보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많이 했던 다른 나라들에선 처음 토론을 기획할 때부터 방송사가 주최 기관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방송사가 주최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Gastil & Levine, 2005). 또한 토론 과정을 방송으로 내보내면, 그 동안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비밀리에 정책을 결정해버리던 관행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난번 촛불집회 때 오마이뉴스가 생방송을 해줘서 저는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요, 이번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 관련 공론조사를 할 때도 오마이뉴스가 토론 과정을 생방송으로 내보내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공론조사와 합의 회의(Consensus Conference)의 비교
공론조사의 장점과 단점을 알려면 숙의 민주주의의 다른 방법과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방법인 덴마크식 합의 회의와 비교해봤습니다. 덴마크 국회는 이미 1980년대말에 합의 회의의 진행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특별 기구인 '기술검토위원회'를 만들어서 매년 합의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Gastil & Levine, 2005).
기구의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덴마크의 합의 회의는 주로 사회적 영향이 큰 과학기술에 대한 검토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덴마크는 1980년대 말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지 말지 여부를 국회에서 결정하기 직전에 합의 회의를 열어서 그 토론 결과를 국회가 많이 참고한 결과, 결국 원자력 발전소를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표에서 보시는 것처럼 공론조사와 합의회의는 참가자 수와 토론 일수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합의 회의에선 25명이라는 적은 수의 참가자가 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토론을 하는 반면, 공론조사는 평균 300명 정도의 많은 참가자가 합의 회의보다는 짧은 2일 동안 토론을 합니다.
앞서 숙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다고 했습니다. 특히 왜곡되지 않은 과학적 정보를 듣고 조별 토론을 하면서 의견을 교환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합의 회의에선 이런 사회적 학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토론 일수를 8일로 길게 잡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토론 일수가 길다보니 참가자를 많이 초대하기는 버겁습니다. 그래서 토론 참가자 수를 25명으로 비교적 적게 초대합니다.
하지만, 공론조사의 경우에도 참가자의 태도가 변한다는 실증적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 만큼의 기간이 사회적 학습을 위해 충분한지는 학자들도 쉽게 결론내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토론 주제에 따라,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문제는, 그 동안 정부가 관련 정보를 꼭꼭 숨겨 왔고, TV토론에서도 왜곡된 정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2일이 좀 짧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5. 결론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지만, 기사의 길이가 벌써 너무나 길어졌기 때문에, 이만 줄여야겠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만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공론조사를 하더라도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 여부는 결국 대통령이 결정할 것이라고, 대통령이 선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자세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 국민 대표단이 마음을 놓고,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직 공익을 위해 토론하고 설문에 응할 수 있습니다.
(2) 준비 과정부터 모든 과정을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론화 위원회에 어떤 기관 소속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는지가, 공론조사의 중립적 운영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대표단을 국민들 중에서 무작위 추출을 한다고 해도 그 세밀한 방법에서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일부 여론기관들이 휴대전화 대신 집전화의 비율을 높여서 여론조사를 해서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집에 주로 있는 국민들의 여론이 더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론조사도 일종의 여론 조사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세밀한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3)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숙의 민주주의나 대표자의 무작위 추출 등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성공했던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너무나 많은 사회 갈등들을 완화하는 데 숙의 민주주의가 크게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6월초 전남 순천에서 제가 숙의 민주주의를 소개했더니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 건설 여부에 대한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통해 우리 나라가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참고문헌>
주1) 오마이뉴스 2017년 6월 27일.
주2) 미디어오늘 2017년 6월 28일.
Gastil, J. & Leveine, P. (edit) (2005). The Deliberative Democracy Handbook (숙의 민주주의 핸드북), Jossey-Bass Publication.
지난 6월 27일 국무조정실에서 신고리 5, 6호기 건설 공사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답니다(주1). 약 3개월간 공사를 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건설을 중단할지 여부는 국민 대표단(배심원)이 참여하는 공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했답니다.
▲ 전남 순천에서 2017년 6월 열린 숙의 민주주의 포럼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 장용창
정부가 이렇게 발표하자 여러 언론사들이 관련 기사들을 쏟아내고 사설로도 의견을 표현했습니다. 언론사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은데요, 하나는 정부의 방침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의견이고, 또 하나는 전문가도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 그런 중대한 결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인 것 같습니다(주2).
도대체 공론조사가 뭐길래 그에 대한 찬반이 이렇게 갈리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래서 제가 아는 한에서 공론조사라는 것의 배경과 절차, 장단점 등을 말씀 드리려고 이 글을 씁니다.
2. 공론조사(숙의 민주주의)의 배경: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
공론 조사(Deliberative Polling)는 숙의(Deliberative) 민주주의 과정의 한 종류입니다. 숙의 민주주의의 배경도 자세히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은 나와야 되는데요, 그냥 짧게 말씀 드리자면, 대리인에게 정치를 맡기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에서 숙의 민주주의가 나왔습니다. 즉, 숙의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직접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아서 그 대리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의사결정을 하게 만드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 국민투표를 해서 국민들이 직접 결정하면 직접 민주주의라고 우리는 고등학교 때 배웠습니다. 그런데, 숙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표결만 하는 직접 민주주의에 '숙의적 토론'(Deliberation)을 추가한 것입니다.
단순한 표결에 숙의적 토론을 더한 이유는 인간의 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중세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을 부정했습니다. 인간들은 욕망으로 가득할 뿐이기 때문에 그 욕망을 도덕률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반해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근대 철학 혁명에선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기도 합니다. '비전문가인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겠는가?'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인간의 이성적 판단 능력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인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혜택으로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했던 철학자 플라톤이 바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어리석은 민중에게 의사 결정을 맡겨선 안 된다. 정책 결정은 똑똑한 철학자만 해야 한다'라는, 그 유명한 철인(哲人) 정치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3. 공론조사의 구조와 절차
▲ 공론조사의 구조국민 대표단의 1박2일 토론이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의 핵심입니다. ⓒ 장용창
공론조사의 구조는 <그림>과 같습니다.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 간단합니다. 정책 결정권자인 대통령 등이 공론조사를 하자고 제안하고는 주제를 정합니다. 그러면 실무적인 진행을 공론화 위원회에서 맡아서 하는데요, 먼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일반적인 설문 조사를 합니다. (물론 국민 전체라 하더라도 표본 추출을 합니다.)
(1) 전후 설문에 의한 태도 변화의 측정
그 다음 토론에 참가할 국민 대표단을 뽑아서 1박 2일간 숙의 토론을 합니다. 여기서 토론 이전과 이후에 동일한 설문을 해서 참가자들이 토론의 결과 그 문제에 대한 태도가 변했는지를 측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앞서 숙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말씀 드렸죠? 인간이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왜곡되지 않은 과학적 정보를 들으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이죠. 또한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참가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도 배우게 됩니다. 특히 5명~10명으로 구성된 조별 토론을 할 때 이런 배움이 가장 잘 일어난다고 합니다(Gastil & Levine, 2005).
(2) 사회적 학습
이런 배움을 사회적 학습이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참가자들끼리 배우기 때문에 사회적 학습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회적 학습이 일어난다는 점이 일반적인 설문과 공론조사의 핵심적인 차이점입니다. 여러분들도 일반 설문을 받아볼 때 황당하거나 화가 난 적이 있지 않나요? 설문 문항이 뭔가 조작된 결론으로 향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은 내용을 잘 모르는데 자꾸 답을 하라고 해서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공론 조사에선, 잘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거나 발표자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토론 이후에 동일한 설문을 해보면 참가자들의 태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변합니다. 이것은 토론의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죠. 공론조사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사회적 학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정책 결정은 국민 대표단이 아니라 정책 결정권자가 한다
국민 대표단에 의한 1박 2일간의 토론이 끝나면 공론화 위원회가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책 결정권자에게 제출합니다. 그러면 정책 결정권자는 국민 대표단의 의견을 보고 정책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할 때 약간의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법률에 의해서 발전소 건설을 중단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마치 공론조사 그 자체에 의해 결정하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공론조사에 참여한 국민 대표단은 자신들의 의견을 설문 조사로 나타낼 뿐이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 자신입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할 때 표현을 잘못 했는지, 아니면 언론이 일부러 오해를 했는지, 마치 국민 대표단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도한 언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여론 재판'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더군요.
국민 대표단이 최종 정책까지 결정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토론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숙의 민주주의 토론에선 인간이 가진 이성과 지혜가 발휘됩니다. 특히 이때 이성을 '공적 이성(Public Reason)'이라고 합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경제주체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적 이성(private reason)만을 발휘하는 반면, 숙의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국민 대표단은 공적 이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어떤 정책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책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민 대표단의 결정에 완전히 정책을 맡겨 버린다면 국민 대표단은 오히려 찬반 양측의 로비 압력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대통령 등 책임 있는 공직자가 나서서 '결정은 제가 하고, 책임도 제가 집니다. 국민 여러분은 지혜만 모아 주십시요.'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국민들의 공적 이성이 더 잘 발휘됩니다.
(4) 방송 보도의 중요성
공론조사에서 텔레비전 방송 보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공론조사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국민들도 토론의 과정과 결과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공론조사에선 공적 이성이 발휘되며, 사회적 학습을 통해 태도가 변합니다. 방송 보도를 해주면 토론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들도 간접적으로 이런 사회적 학습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토론 과정에 대해서는 글자로 된 정보를 나르는 신문보다 동영상으로 된 정보를 나르는 방송사가 더 효과적입니다. 그 동안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인터넷 상에서 진행한 적도 있지만, 토론으로 인한 태도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보면서 이야기해야 종합적인 정보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많이 했던 다른 나라들에선 처음 토론을 기획할 때부터 방송사가 주최 기관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방송사가 주최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Gastil & Levine, 2005). 또한 토론 과정을 방송으로 내보내면, 그 동안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비밀리에 정책을 결정해버리던 관행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난번 촛불집회 때 오마이뉴스가 생방송을 해줘서 저는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요, 이번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 관련 공론조사를 할 때도 오마이뉴스가 토론 과정을 생방송으로 내보내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공론조사와 합의 회의(Consensus Conference)의 비교
▲ 합의 회의와 공론조사의 비교공론조사는 합의 회의에 비해 참가자 수가 더 많고, 토론 일수는 더 짧습니다. ⓒ 장용창
공론조사의 장점과 단점을 알려면 숙의 민주주의의 다른 방법과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방법인 덴마크식 합의 회의와 비교해봤습니다. 덴마크 국회는 이미 1980년대말에 합의 회의의 진행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특별 기구인 '기술검토위원회'를 만들어서 매년 합의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Gastil & Levine, 2005).
기구의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덴마크의 합의 회의는 주로 사회적 영향이 큰 과학기술에 대한 검토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덴마크는 1980년대 말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지 말지 여부를 국회에서 결정하기 직전에 합의 회의를 열어서 그 토론 결과를 국회가 많이 참고한 결과, 결국 원자력 발전소를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표에서 보시는 것처럼 공론조사와 합의회의는 참가자 수와 토론 일수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합의 회의에선 25명이라는 적은 수의 참가자가 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토론을 하는 반면, 공론조사는 평균 300명 정도의 많은 참가자가 합의 회의보다는 짧은 2일 동안 토론을 합니다.
앞서 숙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다고 했습니다. 특히 왜곡되지 않은 과학적 정보를 듣고 조별 토론을 하면서 의견을 교환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바꾸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합의 회의에선 이런 사회적 학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토론 일수를 8일로 길게 잡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토론 일수가 길다보니 참가자를 많이 초대하기는 버겁습니다. 그래서 토론 참가자 수를 25명으로 비교적 적게 초대합니다.
하지만, 공론조사의 경우에도 참가자의 태도가 변한다는 실증적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 만큼의 기간이 사회적 학습을 위해 충분한지는 학자들도 쉽게 결론내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토론 주제에 따라,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문제는, 그 동안 정부가 관련 정보를 꼭꼭 숨겨 왔고, TV토론에서도 왜곡된 정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2일이 좀 짧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5. 결론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지만, 기사의 길이가 벌써 너무나 길어졌기 때문에, 이만 줄여야겠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만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공론조사를 하더라도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 여부는 결국 대통령이 결정할 것이라고, 대통령이 선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자세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 국민 대표단이 마음을 놓고,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직 공익을 위해 토론하고 설문에 응할 수 있습니다.
(2) 준비 과정부터 모든 과정을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론화 위원회에 어떤 기관 소속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는지가, 공론조사의 중립적 운영을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대표단을 국민들 중에서 무작위 추출을 한다고 해도 그 세밀한 방법에서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일부 여론기관들이 휴대전화 대신 집전화의 비율을 높여서 여론조사를 해서 발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집에 주로 있는 국민들의 여론이 더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론조사도 일종의 여론 조사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세밀한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3)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숙의 민주주의나 대표자의 무작위 추출 등은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성공했던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너무나 많은 사회 갈등들을 완화하는 데 숙의 민주주의가 크게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6월초 전남 순천에서 제가 숙의 민주주의를 소개했더니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 건설 여부에 대한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통해 우리 나라가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참고문헌>
주1) 오마이뉴스 2017년 6월 27일.
주2) 미디어오늘 2017년 6월 28일.
Gastil, J. & Leveine, P. (edit) (2005). The Deliberative Democracy Handbook (숙의 민주주의 핸드북), Jossey-Bass Publication.
덧붙이는 글
다른 매체에 송고 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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