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라는 이름의 물귀신, 그 앞에 만인은 평등했으니
[김유경의 영화만평] 악남은 있지만 악녀는 없다... 영화 <악녀>
▲ ⓒ (주)NEW
어릴 적에 함무라비법을 좋아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형동양의 복수를 만인 평등으로 소화했다. 실수였다. 같은 계층끼리는 서로 동등하게 가해할 수 있지만, 피해자가 하위 계층일 경우 단돈 몇 푼만으로도 보상이 끝날 수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설령 그런 계급 차별이 없다 해도, 직접 보복을 부추기는 그 성문법에 이젠 찬성하지 않는다.
숙희(김옥빈 분)는 킬러다. 나어린 시절 침대 밑에 숨어서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 빌미다. 중상(신하균 분)은 숙희를 킬러로 만든 킬러 메이커다. <악녀>의 스토리는 숙희와 중상의 관계가 진전되거나 퇴색하는 변화로써 확충된다. 갈등을 유발하는 복선이 전개 과정에서 하나둘 쌓여가지만 해결됨이 없이 클라이맥스를 향한다. 숙희의 멘붕을 조성해 악녀 이미지를 도출하려는 구조다.
점층적으로 연계되는 복선들은 관객의 몰입도를 높여 준다. 숙희는 몰랐지만 자기를 길러낸 중상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아버지를 위한 복수마저 포기하고 싶을 만큼 사랑해서 결혼한 정인이다. 들떠 움직이던 신혼여행 첫날, 갑작스레 조직일로 나선 그가 죽었다는 비보에 현장으로 달려가 싸운 끝에 남한의 국가 비밀조직에 사로잡힌 그녀를 유일하게 미소 짓게 하는 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부활하듯 나타난 그는 자기 딸임을 알면서도 그녀의 두 번째 남편 현수(성준 분)조차 끝까지 지키려던 딸을 죽인 냉혈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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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악녀>가 드러낸 복선의 특징은, 숙희만 모르는 사실들의 나열로서 인간을 돌게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합리화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숙희가 악녀의 화신임을 암시하는데, 숙희 캐릭터를 사전적 정의로써만 따져도 악녀 함유량 미달이다. 숙희가 같은 조직원임을 숨기고 접근하는 현수의 작업에 걸린 것도, 권숙(김서형 분)의 지시를 거스르며 차마 중상을 암살하지 못한 것도 다 모질지 못해서다. 그런 관점에서 모질디모진 중상은 악남이다.
죽은 줄 알았기에 그립던 중상이 아버지와 딸을 죽인 원수로 밝혀진 채 눈앞에서 갈굴 때, 그리고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한 현수의 진정을 범죄현장 필름을 통해서야 비로소 확인했을 때, 멘붕이 되는 건 숙희가 아닌 보통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거라. 뚜껑 열려 중상을 겨누는 숙희가 딱히 악녀는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중상과의 격전 직전에 숙희가 내뱉은 말, "보여줄게.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따르는 피를 뿜는 엔딩 장면은, <악녀>를 찍기 위해 연마한 액션들을 유감없이 발휘한 김옥빈의 몸 연기가 빛난 결정판일 뿐이다. <악녀>는 액션 스타 김옥빈을 배출했지만, 악녀 캐릭터 창출에는 실패했다.
<도둑들>(최동훈 감독, 2011)에서 애니콜을 연기한 전지현보다, <차이나타운>(한준희 감독, 2015)에서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법칙을 보여준 김고은(일영 역)보다 고난도의 액션을 선보였지만, 김옥빈의 연기는 두 배우보다 많이 주목받지 못 한다. 앞선 두 영화는 갈등과 반전을 보이면서도 목표에 충실한 인물의 내면 연기를 연출하여 입체성을 창조했지만, <악녀>는 외곬의 평면성을 내처 유지한다. 예측 가능함은 악인의 특성이 아니다.
물론 액션에 뛰어난 배우가 연기력까지 펼쳐 관객을 홀리는 일은 반갑지 않다. 액션 영화는 어쨌거나 폭력이니까. 사이다처럼 수용되는 폭력은 부지불식간에 힘(권력)에 길든 사회를 조장한다. 그런 사회는 함무라비법이 통용되듯 서로 죽고 죽이는 물귀신들을 양산함으로써 인간성 파괴를 가속한다.
<악녀> 관람 후 기원한다. 가슴 따뜻한 사람이 보통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아울러 어느 분야에서든 어느 계층에서든 앞다퉈 복수할 마음은 놓아 버리는 액션물 창작을 기대한다. 최소한의 방어는 세속에서 아직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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