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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송중기, 동성동본끼리는 결혼하면 안 된다고?

[팩트책] 진짜 우리 조상의 기록,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등록|2017.07.06 15:30 수정|2017.07.06 15:30
연재 [팩트책]은 '팩트체크' 성격을 담고 있는 책이나 팩트체크가 필요한 책 내용을 다룹니다. [편집자말]

▲ <태양의 후예> 속 한 장면. ⓒ KBS


5일, 배우 송혜교와 송중기의 결혼 소식이 전해져 반응이 뜨겁다. 그런데 두 사람이 동성동본이라 결혼을 할 수 없는 게 아니냐는 때 아닌 논쟁이 일고 있다. 둘은 각각 여산송씨와 은진송씨로 동본이 아니지만 시조와 연원이 같다는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동성동본 금혼 규정은 이미 폐지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본이 아님에도 뿌리가 같은 송씨이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것은, 논쟁이 법 이상의 전통적, 역사적 이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성동본끼리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과연 역사적으로 타당한 주장일까? 성과 본은 족보에 기인한다. 이는 조선시대로 소급된다.

조선 초기 전체 인구의 약 10%에 불과했던 양반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70%로 증가했다. 지금은 누구나 다 '뼈대 있는' 족보를 갖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대부분이 족보는커녕 성씨와 본관조차 가지지 못했다.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양반들조차 제대로 된 족보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려대 역사교육과 권내현 교수가 쓴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어느 노비 가계 2백 년의 기록)은 한 인물의 가계를 살펴봄으로써 조선 후기 족보가 위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단성현(오늘날의 경남 산청 일대)의 호적장부를 토대로, 17세기 중엽 단성현에 살았던 수봉이란 인물의 가계를 추적한다.

수봉은 집안 대대로 노비였다. 심정량 가문의 노비였던 그는 토지 경작, 수공업 등 부업을 통해 노비임에도 비교적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1696년, 그가 50세가 되던 해에 국가적인 대흉년이 들었다. 이때 수봉은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대가로 면천을 받게 된다. 조상 대대로 이어졌던 노비의 굴레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아빠는 김해김씨 아들은 안동김씨?

▲ <노비에서 양반으로,그 머나먼 여정>, 권내현 ⓒ 역사비평사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노비가 그렇듯이 수봉에게는 성(姓)이 없었다. 김해(金海)라는 본관만 있었을 뿐, 아들 흥발 대에 이르러 비로소 김씨 성을 획득하게 된다.

수봉은 김수봉이 되고, 아들 흥발은 김흥발이 된다. 수봉 윗대의 조상들도 후손을 따라 김씨 성으로 호적에 기재 된다. 물론 수봉과 김해김씨의 혈연적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무난하게 흔한 성씨를 택한 것이다.

노비의 신분을 벗어난 수봉의 후손들은 이제는 양반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분투한다. 우선 자기 집안의 내력을 감추고자 낯선 동네로 터전을 옮긴다. 또 양반 문화를 베껴 이름에 돌림자를 쓰기 시작한다.

수봉의 고손자(손자의 손자) 김종욱과 김종원 대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본관을 김해에서 안동(安東)으로 바꾼다. 평민과 노비 출신이 많았던 김해 대신, 세도가였던 안동(安東)을 택함으로써 보다 양반에 가까워보이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는 김해김씨인데 아들은 안동김씨가 된 것이다.

수봉에서 김종욱까지 불과 백 여년 사이에, 수봉 가는 노비를 벗어나 김씨가 되고, 김해김씨에서 세도가인 안동김씨가 되었다. 그 과정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봉 집안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노비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양반이 되는 것에 그토록 집착한 것일까.

노비종모(奴婢從母). 어머니가 노비냐에 따라 자식의 노비 여부가 결정되는 게 조선의 신분질서다.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노비라면 자식은 노비가 된다. 이들을 얼자(孽子)라고 불렀는데, 역시 노비였기 때문에 아버지 사후에는 이복형제인 적자녀의 상속 '재산'이 되기도 했다.

태어난 노비 자식의 소유권 또한 모계로 결정됐다. 예컨대, 최진사댁 남자 노비와 김첨지댁 여자 노비가 결혼해 낳은 자식은 김첨지댁 소유가 된다. 이 경우 최진사는 남자 노비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처벌을 할 수도 있었다. 노비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조차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까를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쓴 <묵재일기>를 보면, 자신의 남자 노비 다섯 명이 다른 집 노비와 결혼해 그 자식의 소유권을 잃게 되자, 넷을 처벌하고, 한 명에게는 재산을 바치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침 일찍 들에서 가지, 상이, 상실, 석지 등 네 명의 노(남자 노비)가 남의 집 비(여자 노비)를 처로 얻어 자식을 낳고 기른 죄로 벌을 주었다. 노 석지는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그의 재산을 바치도록 했다. - <묵재일기>(默齋日記)

기묘사화로 개혁가 조광조가 처형당하자, 다른 문인들은 화가 미칠까 몸을 사렸지만, 오직 이문건만은 조광조에 대한 상례를 다했다. 이에 이문건은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갔다. 이렇듯 사람에 대한 의리가 깊었던 이문건은 이황, 이이 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이문건의 의리는 노비에게만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노비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성동본 금혼은 악습이다

양반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우리 조상들은 족보처럼 살지 못했다. 대부분이 노비였고 평민이었다. 다들 수봉처럼 피나는 노력 끝에 성씨와 본관을 획득했지만, 실제 혈연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은 처우를 위해서는 김해김씨가 될 수도 있고, 안동김씨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봉의 후손들 중에는 상황에 따라서는 김씨가 이씨가 되기도 했다. 동성동본 결혼을 한 이들도 많았다. 그만큼 성과 본은 관념의 소산이었을 뿐, 조상들은 정작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야말로 진짜 우리 조상들의 전통이고 관습이었다. 이는 수봉 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의 족보의 대부분은 수봉 가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지난한 역사를 안다면 동성동본의 논쟁이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성씨문화란 애초에 모계를 배제하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아니던가. 오늘날 성씨문화는 단지 자기 이름의 첫 글자인 성씨의 유래를 기억하는 것에 그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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