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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유학, 그리고 10년의 고독

[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④] 새로운 시작

등록|2017.07.20 17:43 수정|2017.07.20 18:33
남편 때문에 겪은 고통

▲ 남편 황의철의 미국 유학 ⓒ 문은희


1975년 말 문은희는 병원에 입원한 우향 박래현 화백을 간호하는 운보 김기창 선생에게 편지를 쓴다. 전반부는 우향의 병환에 대해 묻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우향은 암으로 미국 뉴욕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운보가 옆에서 간호하고 있었다. "시설이 좋은 미국 병원이라 안심은 되지만 환자 간호란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표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편지 후반부에서 문은희는 1950년대 말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운보를 위로한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남편 황의철로 인해 겪게 된 아내 문은희의 고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첫째 1956년 말 남편 황의철이 담석으로 죽을 뻔 했다. 둘째 1958년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 8년 동안 학비를 대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셋째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 힘겨운 시절의 문은희 ⓒ 문은희


1956년 문은희는 둘째 아이를 가졌다. 그런데 임신 8개월인 10월부터 남편이 위경련으로 밥을 못 먹어 다 죽어갔다. 이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위염 또는 위장병으로 오진해서 매일 진통제만 주는 것이었다. 연말연시 3일이나 의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은 문은희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2월 31일 남편을 퇴원시킨다. 그리고 침을 맞았더니 위경련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나중에 병이 위경련이 아니고 담석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미국으로 가 수술해 낫게 되었다. 이를 통해 문은희는 생명의 기적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은 1958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말았다. 이것을 문은희는 두 번째 불행이라고 말한다. 시가(媤家)에서는 남편의 학비를 대줄 형편이 못 되어, 결국 빚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매월 150$를 송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문은희는 "그림을 집어치우고 돈 융통하러 다녀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 없는 8년 동안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한 역경을 견뎌낸 것은 문은희의 용기와 정신력이었다. 그것이 삶의 의지로 작용해 태산 같은 역경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겼다고 말한다. 거기에 행운과 기적도 더해졌단다. 이런 역경이 지나간 다음 자신을 돕는 그 어떤 힘이 있음을 믿게 되었고, 진인사(盡人事)의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0년 동안의 고독

▲ 삶의 버팀목이었던 두 아들 ⓒ 문은희


58년부터 68년까지 10년은 문은희에게 일종의 시련기였다. 남편은 미국으로 떠나고 두 자식과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계, 육아, 그림이라는 세 가지 일 외에 남편의 유학비 송금까지 떠맡아야 했다. 매월 보름이면 빌린 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돈을 얻으러 뛰어 다니느라 바지의 넓적다리 부분이 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지물포에 산수화를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여기서 그림은 생계의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산수화를 통해 그림에 대한 감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감을 유지한다기보다 오히려 필력을 연마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60년대는 문 화백의 화력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당시의 고독과 어려움을 그녀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해소할 수 밖에 없었다. 문은희는 그 시절을 '10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 딸 윤선과 함께(1969) ⓒ 문은희


다행히 1966년 남편 황의철은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오레곤 주립대학교에서 품질관리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그리고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자리 잡는다. 문은희는 남편이 교수가 되면 생활이 펴고 자신도 예술혼을 펼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순탄하게 풀리지만은 않았다. 대학교수의 월급이 많지 않았고, 남편은 품질관리라는 새로운 학문을 전파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또 문외한인 남편과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건 숫제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더 나가 그림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배신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나는 결혼하고 하루도 그림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이제까지 아이들과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그림을 접었지만, 더 이상 주저하면 그림하고 영원히 멀어질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내 결심을 밀고 나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39세 되던 해 박차고 일어났어요. 집안일과 아이들은 가정부에게 맡기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어요."

윤선이를 낳고 다시 알을 깨고 나오다

▲ 1970년작 '분출' ⓒ 문은희


1969년은 딸 윤선이가 태어난 해다. 문은희는 경제적으로 부담은 되지만 가정부를 둘 두고 육아와 그림 작업을 병행하기로 한다. 다시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외출이나 만남도 줄이고 그림에만 온 힘을 쏟았다. 화실에 나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나 자식들을 만나는 생활을 했다. 지난 10년간 참았던 그림에의 열정이 노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100호나 되는 그림 20점 정도를 단숨에 그려냈다. 그림의 양식은 서양 추상화에 가까웠다. 우리는 이때의 그림에서 문은희의 심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선과 색채를 통해 표현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이 이제는 바깥으로 표출될 차례다. 그래서 이듬해인 1970년 신수회에 가입한다. 신수회는 동양화에 새로운 나무를 심자는 뜻에서 1963년 창립된 미술동호회다.

신수회 회원전 이야기

▲ 신수회전에 출품된 '노도' ⓒ 문은희


그들은 전통을 뛰어넘는 동양화를 추구하고 또 작품전을 열었다. 1970년 5월 22일에는 국립공보관에서 제8회 신수회전이 열렸다. 신수회의 동양화는 더 이상 산수화, 화조도, 사군자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구성과 색채, 재료 등에서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21명이 낸 40점의 작품 중에는 채색은 물론이고 색종이까지 활용한 그림이 있었다. 이때 문은희는 '파도'를 낸다. 파도는 그때까지 드러내지 못한 예술혼을 표출한 작품이다. 그래선지 파도의 차원을 넘어 '노도(怒濤)'가 된다.    

신수회를 창립한 사람들은 60년 전후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신진작가들이었다. 조평휘, 김동수, 오태학, 이용휘, 최재종, 박원서, 유지원 등이 중심 멤버였다. 문은희는 졸업동기인 박원서, 유지원 등의 권유로 신수회에 가입한다. 1970년에는 신수회전이 두 번 열린다. 10월 19일부터 25일까지 신문회관 화랑에서 제9회 신수회전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문은희 등 20명이 작품을 냈다.

1973년 6월 신세계 화랑에서 제12회 신수회전이 열린다. 김동수, 김철성, 문은희, 박원서, 서홍원, 오낭자, 오태학, 유지원, 이석구, 이영수, 이용휘, 조평휘 11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12회 전시회를 신세계 화랑에서 연 인연 때문인지 문은희는 1975년 자신의 개인전을 같은 장소에게 열게 된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이희세의 고민을 들어주다

▲ 1992년 문은희의 파리전시회를 찾은 이희세 ⓒ 문은희


신수회 회원 외에 문은희와 교류한 동문으로 이희세가 있다. 그는 고암 이응노의 조카로 1957년에 홍익대 미대를 졸업했다. 학교 다닐 때 미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사교성이 뛰어나 문은희와 비교적 친하게 지냈다. 1964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미술을 계속 공부했고, 1966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희세는 장학금도 받고, 생활이 안정되어 아내와 자식을 데려올 생각을 한다. 그러한 사실은 66년 9월 22일 이희세가 문은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행이도 금년 11월 1일부터 장학금을 받게 되어 앞으로 당분간 생활은 편안할 듯합니다. 모두가 여러 아름다운 우정들의 성원 덕분인가 여겨집니다. 앞으로 최대의 노력을 할 작정입니다. 단지 주야로 잊지 않고 있는 것은 꼬마들과 아내를 속히 데려오는 작전입니다. 여기서도 여러 고마운 벗들이 협조해 주고 있어 잘 되어갈 듯합니다. 어디서나 참된 생활방식은 그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1967년 7월 동베를린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1970년 재판을 받아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지만, 가정사로 인해 작품 활동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희세는 문은희 화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내와 자식의 문제를 논의한다. 이희세가 문은희에게 보낸 1971년 2월 26일 편지를 통해, 아들 종혁을 파리로 데리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문은희 여사.
너무나 장시일 소식 전해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새해가 바뀐 지도 어언 2개월이 지나가는 순간이군요. 그간도 건강하리라 여겨지며, Mr. 황 그리고 꼬마들 모두 편안하기 바라며, 작품제작에 여념이 없으리라 여겨지고, 꼭 금년에는 그 결실이 훌륭히 맺어지길 빌겠습니다. 이곳 나도 항상 염려지덕으로 건재하고 있으며, 아들 종혁이가 6년 만에 애비의 품에 돌아와 마냥 기쁜 생활과 보람찬 용기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 1973년 라스코 동굴벽화를 재현하는 이희세 ⓒ 이상기


이희세 화백은 1973년 라스코 동굴벽화 재현에 참여하는 것을 끝으로 미술활동을 접고 사회활동에 나선다. 그리고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한다. 1974년 재불 한국 자주통일추진회를 만들고 기관지 <통일조국>을 발간한다. 1977년에는 민주민족통일해외한국인연합(약칭 한민련) 결성에 참가한다. 1982년에는 민족문제연구회를 창립하여 <민족>을 발간한다. 1989년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유럽지역본부 결성에 참가한다.

1991부터 1995년까지 이희세 운동가는 범민련 유럽지역본부 중앙위원과 부의장을 지냈다. 문은희는 1992년 파리전시회를 열게 되었는데, 이희세의 도움이 컸다. 그는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관련 행정 처리와 홍보는 물론이고 통역까지 맡아주었다. 미술전문지 《오퓌스(Opus)》에 문은희 기사가 날 수 있도록 소개해 준 것도 이희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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