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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퍼주기? 그들은 대범하고 노련했다

[세계일주 인문기행 - 열 여섯 번째 편지] 베를린, 분단과 통일의 현장에서

등록|2017.07.29 11:01 수정|2017.07.29 14:23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 분단시절, 베를린 동서로 가르는 검문초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냉전을 추억하는 관광자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 정수현


베를린은 추억을 열심히 팔고 있었습니다.

베를린 최고의 관광상품은 '분단과 통일'이었습니다.  냉전과 분단의 시절에는 분명히 암울했을 기억마저도 이제는 추억으로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은 분단의 상처도 통일의 환희도 이제는 모두 흘러간 시간이 되었고 오늘의 문제를 안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적어도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냉전과 그 해체의 현장은 신기한 볼거리였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을 동서로 나눈 경계의 검문 초소였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넘는 곳이니 주의하라는 당시의 경고 문구와 초소를 재현해놓고, 미군과 소련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기념촬영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했지만 기념으로 여권에 당시의 도장을 받는 줄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분단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이고,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저런 날이 왔으면 하는 기대감에 그런 상술이 얄밉지만은 않았습니다.

▲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이 된 베를린의 랜드마크 브란덴부르크 문 ⓒ 정수현


과거 분단의 상징에서 이제는 통일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 문에 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 역사적 순간을 TV에서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의 기록사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가 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을 감회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로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밑그림을 그렸던 빌리 브란트 전(前) 서독 총리입니다.

▲ 빌리 브란트 옛 서독 총리 ⓒ 위키미디어 공용


독일 통일은 하루 아침에 우연하게 이루어진 '대박'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접촉을 통한 변화'를 핵심 기조로 하는 동방정책이 장벽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동서독 국민들의 마음은 조금씩 가까워지게 하면서 만들어 낸 인고의 결실이었습니다. 

동방정책은 대내적으로는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한 축으로 하고, 대외적으로는 동독의 배후인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다른 축으로 했습니다. 동독의 서독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 내부적으로 긴장을 완화시키고 동독 사회의 변화를 촉진해 내었습니다. 독일 통일이 냉전질서의 해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임을 통찰하고 외부적인 환경을 통일에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갔습니다.

빌리 브란트와 그의 핵심 참모였던 에곤 바르가 즐겨 썼던 표현이 '털신을 신은 작은 발걸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경계하지 않도록 요란하지 않게, 작은 성과부터 차근차근 쌓아 나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 없이 결과만 이야기하는 요란한 구호를 멀리하고, 현상의 어려움에 손 놓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동독에 대한 지원은 처음에는 현금 위주 사업으로 시작하여, 서독에 대한 의존성이 커질수록 현금 대신 현물로, 이후에는 신문/방송개방이나 체류기간 연장 등의 조건을 걸며 진행했습니다. 20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 물적, 인적 교류를 통해 동서독 상호 연계성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종국에는 동독인들의 마음이 완전히 움직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동독의 한 관리는 '털신을 신은 작은 발걸음'이 탱크를 몰고 오는 것보다 더 위협적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동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정책의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69년 진보진영인 사민당 빌리 브란트 정부가 처음 추진했던 이 정책은, 1982년 보수진영인 기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기민당 총리로 이후 통일 독일의 첫 번째 수장이 되었던 헬무트 콜이 정파적 입장을 떠나 내렸던 결단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년간 서독은 동독에 연평균 29억 달러를 지원했습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었던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의 연평균 지원액은 4억달러 입니다. 남한과 서독의 경제규모를 고려하더라도 7배에 달하는 수치이니, 서독이 엄청나게 동독에게 퍼준 셈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동방정책이 추진되는 동안 빌리 브란트도 헬무트 콜도 안팎에서 견제를 받고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서독 내에서 정파적 손실을 따져 '퍼주기'니 '종북'이니 하는 류의 맹목적 비난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민족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대범함과 노련함을 보였던 독일 정치인들과 언론의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닦아놓았던 남북교류협력의 기반은 완전히 부정되고 무너졌습니다.  모든 접촉면과 대화의 채널은 막혀 버렸습니다. 물론 경색된 한반도 정세를 남한만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잘못이 핵문제의 당사자인 북한에 있음은 물론이며, 미국과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얽힌 복잡한 국제관계의 함수를 단순화해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방정책 추진 이후 독일이 통일까지 가는데 걸렸던 시간이 '20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니, 한참을 후퇴해 버린 우리의 지난 10년에 대한 안타까움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 포츠담광장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통일정자 ⓒ 정수현


포츠담광장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되찾은 이후 고층빌딩이 높게 솟아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장벽의 일부분을 떼어다 놓고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광장의 한 켠에 '통일정'이라고 쓰인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통일의 염원을 담아 창덕궁 상량전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 그 옆의 장벽에 통일정자를 만든 의미와 이유를 한글로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다리쉼을 하며 정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지나가는 외국인 관광객들 중 통일정자를 눈 여겨 보거나 장벽에 쓰인 설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장벽 앞에서 사진만 서둘러 찍고 지나갑니다. 한반도 분단과 통일이라는 과제가 타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리 없었습니다. 결국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우리의 문제임을 절감합니다.

오랜 분단과 비평화의 상태에서 이익을 얻는 자 누구이며, 고통을 받는 자 누구인가 생각해봅니다.

분단의 고착화가 주변 강대국들에게는 손해가 될 리 없습니다. 부상하는 중국을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좋은 구실로서, 그리고 한국이라는 막대한 무기판매 시장이 계속 존재한다는 면에서 적당한 위기의 지속은 미국이 바라는 바입니다. 중국 역시 미군이 주둔하는 통일한국의 국경선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나 갑작스러운 북한의 붕괴로 국경지대가 혼란으로 빠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일본이야말로 한반도의 긴장과 불안은 전범국가의 족쇄를 풀고 군사강국으로 재무장할 수 있는 명분이 되니 최대의 수혜자라 할 만 합니다.

한편, 갈등과 불안의 조성은 김정은 세습정권과 북한의 강경파들의 입지를 키워주고, 여전히 냉전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있는 남한 수구세력의 생명을 연장시켜 줍니다. 지난 70년 남북한 기득권 세력의 적대적 공생의 공식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결국 분단의 모든 고통을 떠안는 자는 남한의 국민들과 북한의 인민들입니다. 통일을 하게 되면 경제적으로 어떤 이익을 전망할 수 있는 지, 여러 기관과 언론의 연구발표를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짊어지고 있는 막대한 분단비용과 증오와 불안이라는 물질적, 정신적 소모를 중단하기 위해서라도 통일은 마땅히 이뤄야 할 이유가 됩니다.

▲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 강가에 위치해 있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차가운 냉전의 벽은 이제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 있었습니다. ⓒ 정수현


당신은 예전에 통일을 한자로 쓸 때, 원래의 '統一'이 아닌 '通一'로 썼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평화 정착, 교류 협력, 그리고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通一입니다.  通一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統一로 가는 길은 결코 험난하지 않습니다.  通一에서 統一로 가는 과정을 지혜롭게 관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이 갖는 중요성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독일과 달리 참혹한 내전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증오와 공포가 분단 1세대들이 북한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정서라면, 전쟁 이후 지루한 분단의 세월을 겪는 동안 2세대 3세대들은 대체로 북한에 대해 혐오와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을 보는 시각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서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과 극의 정치경제, 사회문화에서 살아온 남과 북은 그 괴리감만큼이나 서로를 알아가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통일이 남북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이 갖는 중요성과 의미를 성찰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고 확장시키는 모든 과정을 통일로 개념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 여정의 운전대는 마땅히 우리가 주도적으로 잡아야 합니다.

▲ 과거 장벽이 놓여 있던 공간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는 꼬마 악사들. 분단의 벽이 왜 허물어져야 하는지, 평화와 통일이 가져다 주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 정수현


베를린을 가로 지르는 슈프레 강가에는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있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동쪽에 1990년 각국의 미술가들이 벽화를 그려 놓은 1.3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갤러리입니다. 벽화의 주제는 독일통일, 평화, 인류의 미래, 희망 등 다양했습니다.  지금은 색색의 화려한 벽화가 된 장벽 앞에서 방문객들은 사진을 찍으며 베를린을 기억에 담고 있었습니다.

장벽을 찾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악사들이 있었습니다. 장벽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슈프레 강을 배경으로 멋지게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두 소년, 분단이 추억이 되어야 할 이유를 이보다 더 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현재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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