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 "감을 15년동안 그렸다"
[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 ⑥] 신세계작품전
그림은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표현
1970년부터 시작된 문은희의 창작욕은 그림과 도자기를 통해 표출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산수, 국화, 감 등 구상이 주류고, 콤포지션(Composition) 등 추상도 일부 있었다. 도록에 수록된 그림을 보면 그 어려운 60년대 그린 그림이 하나 있다. 1967년작으로 '산수(山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은 전통산수화와는 거리가 좀 있다. 먹을 사용하고 있지만, 터치가 강해 대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문 화백의 말처럼 자신의 멋대로 그린 결과이기도 하다. 동양화 수묵화지만 서양화에 나타나는 구도가 존재한다. 그에 따라 시선이 왼쪽 아래 골짜기 시내(溪流)를 지나 가운데 폭포로 향한다. 폭포 오른쪽 절벽 위에는 정자가 하나 있다. 전통 수묵화와는 달리 붓 터치로 지붕과 기둥을 표현했다. 시선은 다시 정자 뒤 산을 넘어 오른쪽 위 달을 향한다.
이 그림은 저 높은 곳에 있는 달을 향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한 듯하다. 목표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있지만, 그게 불가능한 현실을 산수를 빗대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그림 속에 길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에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표출된다는 것이 문 화백의 지론이다. 그림이 기본적으로 화가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문 화백에게는 그것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감정의 표출은 산수, 꽃, 식물 등 전통 풍경보다는 70년대 초 추상에서 두드러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노도처럼 분출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넘쳐흐름이다. 그러나 추상 작품에서는 그 감정의 내용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문은희는 70년대 전반 여러 점의 추상화를 그려 국전에 제출했다. 결과는 이들 중 상당수가 국전 비구상 부문에 입선되었다.
1971년에 국전에 제출한 그림이 '작품'이다. 이것은 파도, 노도, 용출, 분출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72년에는 '콤포지션-2'가 입선했고, 1974년에는 '작품 A'가 입선했다. 그리고 1975년 국전에서 '추상사'가 입선했다. '추상사'는 앞의 그림들에 비해 구상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성황당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민속신앙의 대상인 성황당을 통해 자신이 갈구하는 바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갈구가 현실적인 소원이 될 수도 있고 종교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7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문은희 작품 속 감정의 발산이 내면적 갈구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은희는 마음의 고통과 역경을 예술로 표현하고 승화시키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75년의 문은희작품전이다. 작품이 모여 전시회를 할 정도가 되어 개인전을 열었다고 한다. 문은희는 전시회 날짜를 잡아놓고 작품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날짜를 잡아놓으면 오히려 작품이 안 되기 때문이란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나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생겨날 때 작업을 하는 것이 그의 창작방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전람회를 목적으로 작품을 해본 적이 없어. 작품을 다 해 놓은 다음에 전람회를 하면 했지. 그렇게 날짜를 잡아놓고 하면 작품이 안 돼. 작품 준비가 다 되어야 전람회 하지, 구속받으면 못해."
감 그림으로 필력을 인정받아
문은희는 이처럼 추상작품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표출했다면, 다른 한편으로 구상작품을 통해 감정을 정화할 수 있었다. 1970년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설악산 쪽으로 여행할 때였다. 당시 감나무를 바라보는데, 감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래 이 감 하나라도 잘 그려봐야겠다. 그래서 감 그림에 몰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아 수도 없이 감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
"내가 그린 감이 어째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몰라. 생동감이 안 나는 거야. 감 하나만 잘 그려놓고 죽자. 그리고 감을 15년 동안 그렸어, 생동감이 나올 때까지 그리는데 15년이 걸리더라고. 그래서 옛날에 날 감 작가라고 그랬지. 하도 감을 그리니까."
남관 선생과 김기창 선생이 문은희의 화실에 와 "넌 감에 진력도 안 나니?"하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신세계작품전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작품이 감이었다. 그것은 문은희가 보여준 새로운 작품경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 그림 때문에 1975년 개인전이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 이흥우 기자는 문화백의 '필력을 기대할만 하다'고 썼다.
이처럼 최고 수준에 오르게 될 때까지 반복하고 필력을 연마하는 것이 문 화백의 그리기 방식이다. 정적인 동양화에서 문 화백이 강조하는 것은 생동감이다. 생동감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문 화백은 느낌으로 온다고 말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이입이 되어야 하는데, 연극이나 퍼포먼스도 아니고 그게 정말 어렵다. 감, 나무줄기, 잎의 삼각관계에서 그리고 색채와 여백에서 생동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은희가 그린 대상으로는 감 외에 국화, 해바라기, 포도가 있다. 이들 그림은 수묵과 채색이 잘 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대상이 잘 드러난다. 그것은 문은희가 서양화의 형태와 동양화의 선묘를 잘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국화는 노란 꽃과 검은 잎이 두드러진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해바라기도 검은색 꽃받침과 노란색 꽃잎이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꽃잎이 촘촘하고 가지런하지 않아 꽃이 드러나지 않는 해바라기가 되었다. 이처럼 문은희는 국화와 해바라기도 개성적으로 그려냈다.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다
문은희가 알에서 깨고 나온 후 1975년까지 그린 작품이 개인전을 할 정도가 되었다. 또 화가로서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 그래서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한다. 문 화백은 전시회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신세계작품전은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열렸다. 전시회에는 졸업 작품인 당인리발전소부터 산수, 감, 도자기 그리고 추상작품이 출품되었다.
당시 신문을 보니 전시된 작품이 회화 26점, 도자기 그림 10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세계미술관은 110평 규모로, 초대전, 회고전, 개인전이 열리는 장소로 유명했다. 첫날 개막식 테이프를 끊은 사람들은 당시 미술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홍익대 미대 교수로 이대원, 이종무, 김기창 선생이 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 선생, 조각가 김정숙 선생, 한학자 이가원 선생이 있다. 이 중 김기창 교수와 이가원 선생은 평생 교류하면서 도움을 주고받은 삶과 예술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남관 선생, 장욱진 선생, 천경자 선생도 찾아왔다. 이들은 학창시절 은사이자 화단의 대선배였다. 전각(篆刻)의 대가 석불 정기호 선생도 찾아왔다. 또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 박사도 찾아왔다. 정치권에서는 당시 국무총리실 비서관이던 김영호씨도 찾아왔다. 신진작가의 데뷔전 치고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장을 찾았고,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전시회 기사와 함께 작품사진까지 게재할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문은희의 졸업작품 당인리발전소를 싣고, 동양화와 서양화를 종합하는 기법을 보여준다고 썼다. <경향신문>은 감 그림을 싣고, 감, 추상, 도자기 그림이 출품되었다고 썼다.
"여류 동양화가 문은희씨의 첫 전시회가 14일까지 신세계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출품작은 회화 26점과 도자기 그림 10점. 이 작가는 유화와 수묵화 채색화의 기법을 함께 익혀 이를 아무런 충돌 없이 조화시키는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특히 채색화는 형상을 유동(流動)의 형태로 잡아 일견 비구상 회화와 같은 인상을 주며, 결정적인 윤곽선으로 형상을 잡고 여기에 채색을 입히는 기법은 동서회화의 종합적인 수법으로 볼만 하다." (<동아일보> 1975년 12월 11일자 5면)
또 홍익대에서 동고동락했고, 신수회전에 동참한 동료 화가들도 전시회를 축하해주었다. 대형 감 그림 잎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유지원, 송경, 천병옥, 박영희, 이해동, 박원서, 김인태다. 유지원, 송경, 이해동, 박원서, 김인태는 회화를 전공했고, 박영희는 조각을 전공했다. 천병옥은 건축을 전공했다. 이들은 예술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로 현재까지도 교유하고 있다.
평론가 이경성이 본 문은희의 그림
신세계미술관 문은희 개인전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평을 썼다. 그 글에서 이경성은 전시된 그림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전통적인 수묵화, 새로운 시도가 보이는 채색화, 도자기 그림인 도화(陶畵)다. 수묵화는 호방한 필치를 통해 장미(壯美)한 자연을 표현했다고 한다. 산이나 사물을 스케치하고 형상에 농담을 더하는 기법이 그만의 개성으로 나타난다고 썼다. 여기서 장미는 웅장한 듯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런 계열의 작품이 '산(山)'이다. 대담한 필치로 그려낸 웅장한 산줄기, 검은색으로 농담을 이용해 다르게 표현한 나무줄기, 붉은색과 갈색의 점으로 표현한 나뭇잎, 그 위로 나타나는 여백이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이것을 이경성 선생은 동서양화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가원 선생이 여백에 화제를 가득하게 써 시서화가 되었다. 이 작품은 이가원 선생을 통해 단국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처럼 문은희의 채색화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종합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스케치와 채색에서는 서양화의 기법을 구사하고, 공간의 구성에서는 동양적인 여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물화의 경우는 기명절지(器皿折枝)라는 동양화법을 구사해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붉은 감이나 노란 비파에 집약된 조형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 그림은 정물화의 일종으로 1972년부터 시도했다. 성형을 마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구워내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품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화가와 도예가의 콜라보로만 가능한 작업이다. 문은희는 이때 사군자 같은 화초, 산수, 정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것은 도자기의 특성상 대상이 두드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도자기작업은 이천에 있는 수광도요에서 이루어졌다.
▲ 67년작 산수(山水) ⓒ 문은희
1970년부터 시작된 문은희의 창작욕은 그림과 도자기를 통해 표출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산수, 국화, 감 등 구상이 주류고, 콤포지션(Composition) 등 추상도 일부 있었다. 도록에 수록된 그림을 보면 그 어려운 60년대 그린 그림이 하나 있다. 1967년작으로 '산수(山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은 전통산수화와는 거리가 좀 있다. 먹을 사용하고 있지만, 터치가 강해 대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문 화백의 말처럼 자신의 멋대로 그린 결과이기도 하다. 동양화 수묵화지만 서양화에 나타나는 구도가 존재한다. 그에 따라 시선이 왼쪽 아래 골짜기 시내(溪流)를 지나 가운데 폭포로 향한다. 폭포 오른쪽 절벽 위에는 정자가 하나 있다. 전통 수묵화와는 달리 붓 터치로 지붕과 기둥을 표현했다. 시선은 다시 정자 뒤 산을 넘어 오른쪽 위 달을 향한다.
▲ 추상 작품 ⓒ 문은희
이 그림은 저 높은 곳에 있는 달을 향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한 듯하다. 목표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있지만, 그게 불가능한 현실을 산수를 빗대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그림 속에 길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에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표출된다는 것이 문 화백의 지론이다. 그림이 기본적으로 화가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문 화백에게는 그것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감정의 표출은 산수, 꽃, 식물 등 전통 풍경보다는 70년대 초 추상에서 두드러진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노도처럼 분출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강렬한 감정의 자발적인 넘쳐흐름이다. 그러나 추상 작품에서는 그 감정의 내용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문은희는 70년대 전반 여러 점의 추상화를 그려 국전에 제출했다. 결과는 이들 중 상당수가 국전 비구상 부문에 입선되었다.
▲ 추상사(1974) ⓒ 문은희
1971년에 국전에 제출한 그림이 '작품'이다. 이것은 파도, 노도, 용출, 분출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72년에는 '콤포지션-2'가 입선했고, 1974년에는 '작품 A'가 입선했다. 그리고 1975년 국전에서 '추상사'가 입선했다. '추상사'는 앞의 그림들에 비해 구상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성황당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민속신앙의 대상인 성황당을 통해 자신이 갈구하는 바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갈구가 현실적인 소원이 될 수도 있고 종교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7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문은희 작품 속 감정의 발산이 내면적 갈구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은희는 마음의 고통과 역경을 예술로 표현하고 승화시키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 1970년대 작업실 ⓒ 문은희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75년의 문은희작품전이다. 작품이 모여 전시회를 할 정도가 되어 개인전을 열었다고 한다. 문은희는 전시회 날짜를 잡아놓고 작품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날짜를 잡아놓으면 오히려 작품이 안 되기 때문이란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나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생겨날 때 작업을 하는 것이 그의 창작방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전람회를 목적으로 작품을 해본 적이 없어. 작품을 다 해 놓은 다음에 전람회를 하면 했지. 그렇게 날짜를 잡아놓고 하면 작품이 안 돼. 작품 준비가 다 되어야 전람회 하지, 구속받으면 못해."
감 그림으로 필력을 인정받아
▲ 감 ⓒ 문은희
문은희는 이처럼 추상작품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표출했다면, 다른 한편으로 구상작품을 통해 감정을 정화할 수 있었다. 1970년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설악산 쪽으로 여행할 때였다. 당시 감나무를 바라보는데, 감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래 이 감 하나라도 잘 그려봐야겠다. 그래서 감 그림에 몰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아 수도 없이 감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
"내가 그린 감이 어째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몰라. 생동감이 안 나는 거야. 감 하나만 잘 그려놓고 죽자. 그리고 감을 15년 동안 그렸어, 생동감이 나올 때까지 그리는데 15년이 걸리더라고. 그래서 옛날에 날 감 작가라고 그랬지. 하도 감을 그리니까."
▲ 소원작(小園作) 연민운(淵民韻)이라는 화제가 있는 감 ⓒ 문은희
남관 선생과 김기창 선생이 문은희의 화실에 와 "넌 감에 진력도 안 나니?"하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신세계작품전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작품이 감이었다. 그것은 문은희가 보여준 새로운 작품경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 그림 때문에 1975년 개인전이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 이흥우 기자는 문화백의 '필력을 기대할만 하다'고 썼다.
이처럼 최고 수준에 오르게 될 때까지 반복하고 필력을 연마하는 것이 문 화백의 그리기 방식이다. 정적인 동양화에서 문 화백이 강조하는 것은 생동감이다. 생동감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문 화백은 느낌으로 온다고 말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이입이 되어야 하는데, 연극이나 퍼포먼스도 아니고 그게 정말 어렵다. 감, 나무줄기, 잎의 삼각관계에서 그리고 색채와 여백에서 생동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 국화 ⓒ 문은희
문은희가 그린 대상으로는 감 외에 국화, 해바라기, 포도가 있다. 이들 그림은 수묵과 채색이 잘 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대상이 잘 드러난다. 그것은 문은희가 서양화의 형태와 동양화의 선묘를 잘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국화는 노란 꽃과 검은 잎이 두드러진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해바라기도 검은색 꽃받침과 노란색 꽃잎이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꽃잎이 촘촘하고 가지런하지 않아 꽃이 드러나지 않는 해바라기가 되었다. 이처럼 문은희는 국화와 해바라기도 개성적으로 그려냈다.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다
▲ 1975년 신세계개인전 개막식 ⓒ 문은희
문은희가 알에서 깨고 나온 후 1975년까지 그린 작품이 개인전을 할 정도가 되었다. 또 화가로서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 그래서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한다. 문 화백은 전시회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신세계작품전은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열렸다. 전시회에는 졸업 작품인 당인리발전소부터 산수, 감, 도자기 그리고 추상작품이 출품되었다.
당시 신문을 보니 전시된 작품이 회화 26점, 도자기 그림 10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세계미술관은 110평 규모로, 초대전, 회고전, 개인전이 열리는 장소로 유명했다. 첫날 개막식 테이프를 끊은 사람들은 당시 미술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홍익대 미대 교수로 이대원, 이종무, 김기창 선생이 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 선생, 조각가 김정숙 선생, 한학자 이가원 선생이 있다. 이 중 김기창 교수와 이가원 선생은 평생 교류하면서 도움을 주고받은 삶과 예술의 스승이 되었다.
▲ 1975년 신세계작품전에서 문은희와 김기창 ⓒ 문은희
그리고 남관 선생, 장욱진 선생, 천경자 선생도 찾아왔다. 이들은 학창시절 은사이자 화단의 대선배였다. 전각(篆刻)의 대가 석불 정기호 선생도 찾아왔다. 또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 박사도 찾아왔다. 정치권에서는 당시 국무총리실 비서관이던 김영호씨도 찾아왔다. 신진작가의 데뷔전 치고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장을 찾았고,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전시회 기사와 함께 작품사진까지 게재할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문은희의 졸업작품 당인리발전소를 싣고, 동양화와 서양화를 종합하는 기법을 보여준다고 썼다. <경향신문>은 감 그림을 싣고, 감, 추상, 도자기 그림이 출품되었다고 썼다.
▲ 문은희작품전을 소개하는 동아일보 기사 ⓒ 이상기
"여류 동양화가 문은희씨의 첫 전시회가 14일까지 신세계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출품작은 회화 26점과 도자기 그림 10점. 이 작가는 유화와 수묵화 채색화의 기법을 함께 익혀 이를 아무런 충돌 없이 조화시키는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특히 채색화는 형상을 유동(流動)의 형태로 잡아 일견 비구상 회화와 같은 인상을 주며, 결정적인 윤곽선으로 형상을 잡고 여기에 채색을 입히는 기법은 동서회화의 종합적인 수법으로 볼만 하다." (<동아일보> 1975년 12월 11일자 5면)
또 홍익대에서 동고동락했고, 신수회전에 동참한 동료 화가들도 전시회를 축하해주었다. 대형 감 그림 잎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유지원, 송경, 천병옥, 박영희, 이해동, 박원서, 김인태다. 유지원, 송경, 이해동, 박원서, 김인태는 회화를 전공했고, 박영희는 조각을 전공했다. 천병옥은 건축을 전공했다. 이들은 예술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로 현재까지도 교유하고 있다.
평론가 이경성이 본 문은희의 그림
▲ 산(山) ⓒ 문은희
신세계미술관 문은희 개인전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평을 썼다. 그 글에서 이경성은 전시된 그림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전통적인 수묵화, 새로운 시도가 보이는 채색화, 도자기 그림인 도화(陶畵)다. 수묵화는 호방한 필치를 통해 장미(壯美)한 자연을 표현했다고 한다. 산이나 사물을 스케치하고 형상에 농담을 더하는 기법이 그만의 개성으로 나타난다고 썼다. 여기서 장미는 웅장한 듯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런 계열의 작품이 '산(山)'이다. 대담한 필치로 그려낸 웅장한 산줄기, 검은색으로 농담을 이용해 다르게 표현한 나무줄기, 붉은색과 갈색의 점으로 표현한 나뭇잎, 그 위로 나타나는 여백이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이것을 이경성 선생은 동서양화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가원 선생이 여백에 화제를 가득하게 써 시서화가 되었다. 이 작품은 이가원 선생을 통해 단국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이경성의 문은희 평론 원고 ⓒ 이상기
이처럼 문은희의 채색화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종합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스케치와 채색에서는 서양화의 기법을 구사하고, 공간의 구성에서는 동양적인 여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물화의 경우는 기명절지(器皿折枝)라는 동양화법을 구사해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붉은 감이나 노란 비파에 집약된 조형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 그림은 정물화의 일종으로 1972년부터 시도했다. 성형을 마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구워내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품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화가와 도예가의 콜라보로만 가능한 작업이다. 문은희는 이때 사군자 같은 화초, 산수, 정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것은 도자기의 특성상 대상이 두드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도자기작업은 이천에 있는 수광도요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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