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 가족의 '나홀로 동해안 국토종주', 그 이유가
해군 병장으로 제대 앞두고 납북된 형... 동생 정윤모씨에게 통일은 유일한 꿈
담안선교회 감사 정윤모씨(64세)가 지난 7월 11일부터 27일까지 '동해안 국토종주'를 했다.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부산까지 '나홀로' 도보여행 트레킹이었다.
정 감사는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출신의 마도로스로 전 세계 대양을 누볐던 해양전문가다. 그 후 모 대학에서 행정전문가로 일하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는 필자가 대학에서 일할 때 만났던 지인이다. 정 감사에겐 독특한 이력이 있다. '납북자 가족'이다. 그래서 그는 통일을 단순한 소원을 넘어 필연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실장님! 잠시 대화 나눌 수 있으십니까?"
"정 선생님!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납북자 가족입니다. 형이 선원시절 납북됐어요."
"아니, 그런 아픔이 있으셨군요."
정 감사가 처음으로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순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준 정윤모 감사에게 고마웠다.
해군 병장 정윤모. 정 감사 형이다. 1970년 6월 5일 납북 당시 제대를 3개월 앞둔 21살의 현역병이었다. 동생 정윤모 감사는 중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본 형의 멋진 제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6남매였는데 제가 다섯째고 형은 셋째였습니다. 저와 가까운 사이여서 제가 아주 좋아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저한테 잘 해주셨죠. 그런데 연좌제에 걸려들까 두려워 1996년에야 처음으로 통일부에 납북자 신고를 했습니다."
17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북한에 형의 생사 여부를 물을 수 있었다.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 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이 북한에 전후 납북자 12명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거기에 정 감사의 형, 장광모 병장 이름이 포함됐다.(관련 영상)
부모님은 아들의 생사라도 알기를 기다리다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일상은 통일에 맞춰져있다. 형이 꼭 살아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버린 적이 없다. 그는 매년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이벤트를 한다. 이번에는 국토종단을 했다.
정 감사의 친구이며 역시 마도로스였던 홍완표 한세대학교 교수(63, 한국항행안전시설기술협회장)는 정 감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통일에 인생을 건 사람입니다. 그의 아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통일이 소원이 되었지요. 친구가 탈북자를 돕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곤 합니다."
정 감사는 은퇴를 앞두고 제2의 인생을 위해 '통일 이야기 전문가'로 변신하고 있다. 그동안 초청 강의를 간간히 했지만 이제는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첫 발걸음이 '동해안 나 홀로 국토종단'이다.
정윤모 감사의 만보기에 찍힌 걸음걸이는 609Km였다. 정 감사는 2017년 7월 11일 아침 일찍 서울 동서울 터미널에서 강원도 대진행 고속버스를 타고 고성 통일전망대 출입관리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출발해서 7번 국도인 소위 '해파랑길'을 무작정 걸어 내려갔다.
사전에 동해안 국토종주 자전거 길을 알고 있었으나 그 길을 착실히 따라 다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로 7번 국도를 마주 오는 좌축 차선을 마냥 걸었으며, 때로 자전거 길을 드나들었다.
정 감사는 1970년 서해안에서 해군방송선에 승선하고 있다가 배 전체 승조원 20명 함께 납북된 형, 정윤모를 생각하며 걸었다. 올 8월말 직장을 퇴직해 인생 제2막을 준비하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뒷짐 무게는 약 30kg, 64살에 좀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정 감사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70세가 넘어 보이는 도보 여행자들을 상당수 만났을 때는 더욱 힘을 냈다고 한다.
첫째 날, 무리한 이동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트레킹 도중 중간 중간 배낭을 벗었다 다시 매는 그 과정이 매우 힘들고 짜증스러웠단다. 그래서 정 감사는 하나씩 배낭의 짐을 줄여 나갔다. 영덕에서는 신발을 도난 당하기도 했지만 행복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고성을 출발해, 속초와 양양을 향해 갔고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다.
"7번 국도와 자전거 종주길을 왔다 갔다 요령도 피워보았고요. 결국 610km를 넘게 걸었습니다. 국도는 사실상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좌편에서 차량을 마주 보고 걷는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도보 트레킹 여행자라면 국도는 피할 것을 권합니다."
정 감사는 다음 일정 때문에 16, 17일 안에 부산 도착해야 했기에 더욱 힘을 냈다. 잠시 누웠다가도 일정을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서 걷기를 계속 했다.
"하루에 짧게는 26Km를, 길게는 58Km를 걸었더군요. 일일 평균 38km를 걸은 셈이지요. 잠은 16일간 단 3일만 찜질방 신세를 지고 나머지 13일은 정말 노숙했죠. 좋은 말로 비박을 했습니다. 시장통, 평상, 해변가, 정자, 주유소, 초등학교 등등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잤습니다. 다행히 침낭을 갖고 갔기 때문에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러 여관이나 모텔 등 쉬운 잠자리는 안 가기로 처음부터 작정했습니다. 문제는 휴대전화 충전 등인데 요령이 생겨 식당 등을 이용하면서 번개같이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 할아버지를 만나 간식도 나누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통일을 생각해 보는 걸음걸음이었기 때문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7월 휴가철 해변마다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은 민족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할까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즐기기엔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라고 느끼지는 않는지? 내가 가진 것을 양보하고 나누기에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라는 것 등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었어요."
정 감사는 "국토의 오른쪽만 남북으로 일주하다 보니 포괄적인 생각은 못했지만,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가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정윤모 감사의 '동해안 국토종주', '나홀로' 도보여행 트레킹이 통일대한민국의 불씨가 되기를 소원한다.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정 감사는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출신의 마도로스로 전 세계 대양을 누볐던 해양전문가다. 그 후 모 대학에서 행정전문가로 일하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는 필자가 대학에서 일할 때 만났던 지인이다. 정 감사에겐 독특한 이력이 있다. '납북자 가족'이다. 그래서 그는 통일을 단순한 소원을 넘어 필연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실장님! 잠시 대화 나눌 수 있으십니까?"
"정 선생님!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납북자 가족입니다. 형이 선원시절 납북됐어요."
"아니, 그런 아픔이 있으셨군요."
정 감사가 처음으로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순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준 정윤모 감사에게 고마웠다.
▲ 방송 출연한 정윤모 감사 ⓒ 정윤모
해군 병장 정윤모. 정 감사 형이다. 1970년 6월 5일 납북 당시 제대를 3개월 앞둔 21살의 현역병이었다. 동생 정윤모 감사는 중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본 형의 멋진 제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6남매였는데 제가 다섯째고 형은 셋째였습니다. 저와 가까운 사이여서 제가 아주 좋아했고,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저한테 잘 해주셨죠. 그런데 연좌제에 걸려들까 두려워 1996년에야 처음으로 통일부에 납북자 신고를 했습니다."
17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북한에 형의 생사 여부를 물을 수 있었다.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 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WGEID)'이 북한에 전후 납북자 12명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다. 거기에 정 감사의 형, 장광모 병장 이름이 포함됐다.(관련 영상)
부모님은 아들의 생사라도 알기를 기다리다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일상은 통일에 맞춰져있다. 형이 꼭 살아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버린 적이 없다. 그는 매년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 이벤트를 한다. 이번에는 국토종단을 했다.
▲ 형의 해군방송선 납북 기사 ⓒ 동아일보
정 감사의 친구이며 역시 마도로스였던 홍완표 한세대학교 교수(63, 한국항행안전시설기술협회장)는 정 감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통일에 인생을 건 사람입니다. 그의 아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통일이 소원이 되었지요. 친구가 탈북자를 돕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곤 합니다."
정 감사는 은퇴를 앞두고 제2의 인생을 위해 '통일 이야기 전문가'로 변신하고 있다. 그동안 초청 강의를 간간히 했지만 이제는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첫 발걸음이 '동해안 나 홀로 국토종단'이다.
▲ 38선을 배경으로 ⓒ 정윤모
정윤모 감사의 만보기에 찍힌 걸음걸이는 609Km였다. 정 감사는 2017년 7월 11일 아침 일찍 서울 동서울 터미널에서 강원도 대진행 고속버스를 타고 고성 통일전망대 출입관리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출발해서 7번 국도인 소위 '해파랑길'을 무작정 걸어 내려갔다.
사전에 동해안 국토종주 자전거 길을 알고 있었으나 그 길을 착실히 따라 다니기에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로 7번 국도를 마주 오는 좌축 차선을 마냥 걸었으며, 때로 자전거 길을 드나들었다.
정 감사는 1970년 서해안에서 해군방송선에 승선하고 있다가 배 전체 승조원 20명 함께 납북된 형, 정윤모를 생각하며 걸었다. 올 8월말 직장을 퇴직해 인생 제2막을 준비하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 무거운 배낭과 잃어버린 신발 ⓒ 정윤모
뒷짐 무게는 약 30kg, 64살에 좀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정 감사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70세가 넘어 보이는 도보 여행자들을 상당수 만났을 때는 더욱 힘을 냈다고 한다.
첫째 날, 무리한 이동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트레킹 도중 중간 중간 배낭을 벗었다 다시 매는 그 과정이 매우 힘들고 짜증스러웠단다. 그래서 정 감사는 하나씩 배낭의 짐을 줄여 나갔다. 영덕에서는 신발을 도난 당하기도 했지만 행복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고성을 출발해, 속초와 양양을 향해 갔고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다.
"7번 국도와 자전거 종주길을 왔다 갔다 요령도 피워보았고요. 결국 610km를 넘게 걸었습니다. 국도는 사실상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좌편에서 차량을 마주 보고 걷는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도보 트레킹 여행자라면 국도는 피할 것을 권합니다."
정 감사는 다음 일정 때문에 16, 17일 안에 부산 도착해야 했기에 더욱 힘을 냈다. 잠시 누웠다가도 일정을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서 걷기를 계속 했다.
▲ 부산도착 후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 정윤모
"하루에 짧게는 26Km를, 길게는 58Km를 걸었더군요. 일일 평균 38km를 걸은 셈이지요. 잠은 16일간 단 3일만 찜질방 신세를 지고 나머지 13일은 정말 노숙했죠. 좋은 말로 비박을 했습니다. 시장통, 평상, 해변가, 정자, 주유소, 초등학교 등등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잤습니다. 다행히 침낭을 갖고 갔기 때문에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러 여관이나 모텔 등 쉬운 잠자리는 안 가기로 처음부터 작정했습니다. 문제는 휴대전화 충전 등인데 요령이 생겨 식당 등을 이용하면서 번개같이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노숙자 할아버지를 만나 간식도 나누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통일을 생각해 보는 걸음걸음이었기 때문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7월 휴가철 해변마다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은 민족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할까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즐기기엔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라고 느끼지는 않는지? 내가 가진 것을 양보하고 나누기에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라는 것 등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었어요."
정 감사는 "국토의 오른쪽만 남북으로 일주하다 보니 포괄적인 생각은 못했지만, 지금은 우리 국민 전체가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정윤모 감사의 '동해안 국토종주', '나홀로' 도보여행 트레킹이 통일대한민국의 불씨가 되기를 소원한다.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덧붙이는 글
나관호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작가이며, 북컨설턴트로 서평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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