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적 정사도, 동성애도 이 감독의 손에선 예술이 된다
[감독열전 ⑨] 뜨거운 욕망을 다루는 냉철함을 보여주는 리안(李安) 감독
한 편 한 편의 영화로는 알 수 없는 영화감독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영화감독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그곳의 털은 눈썹보다 늦게 나지만, 눈썹보다 길게 자란다(屌毛長得比眉毛晚,長得却比眉毛長)."
▲ 영화 <색, 계>인간은 ‘색, 계’ 그 중간의 쉼표(,) 쯤에 머무는 존재가 아닐까.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색과 계의 사이
중화권을 넘어서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아시아 출신의 감독으로 꼽히는 리안(李安) 감독이 천착하는 주제가 바로 이 인간 욕망의 문제다. 완벽하게 불완전한 인간은 때로는 욕망을 가까스로 다스리고, 때로는 욕망에 속절없이 굴복하며, 색과 계 사이의 불안한 왕복달리기를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에서 주인공 파이 파텔에게 삼촌이 "널 해치는 건 물이 아니라 공포심"이라고 하는 말에서 공포심은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무의식, 욕망의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파텔의 구명정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다만 파텔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본능적인 공포, 무의식에 도사리고 앉은 욕망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결코 그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욕망과 같은 배를 타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과 허탈함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배에 호랑이는 타지 않았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리안 감독은 우리가 선입견이나 익숙한 가치로 간주해 그냥 간과한 인간의 욕망을 진실하고 깊이 있게 파헤쳐 영화화한다. 때로는 그것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고, 때로는 금기시되는 도덕적 불편함이 있더라도 리안은 멈추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받은 것은 그의 이런 노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1963년 와이오밍 주에서 양을 방목하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여름을 지내는 두 목동, 로데오 하는 카우보이 잭과 아버지 대부터 목장을 경영해온 에니스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이다. 추운 밤을 나기 위해 체온을 빌려야 했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헤어진 두 사람은 각각 결혼하고 아이까지 둔 가정을 이루지만, 에니스의 엽서를 받은 잭이 찾아와 두 사람은 4년 만에 다시 만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매년 한두 번씩 '낚시'라는 이름으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다.
잭은 둘만의 목장을 하자고 에니스에게 제안하지만 에니스는 현실을 인정하며 살자고 거절한다. 에니스의 아내 엘마는 남편이 잭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알고 이혼한다. 그 소식을 듣고 잭은 달려오지만 에니스는 여전히 그와의 생활을 거절한다. 20년 동안 잭은 텍사스에서 리버튼까지 14시간을 달려와 에니스와 만난다. 그리고 어느 날 에니스는 잭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고향 집을 찾아간다. 잭의 옷장에는 에니스의 피가 묻은 셔츠가 잭의 청재킷으로 감싸져 있다. 에니스는 그것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와 자신의 셔츠로 감싸 놓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여름을 지내는 두 목동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이다. ⓒ ㈜영화사 백두대간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닥쳐오는 감정의 급류를 만난다. ⓒ ㈜영화사 백두대간
리안 감독의 최대 장점
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닥쳐오는 감정의 급류를 만난다. 그 욕망은 현실로부터 검증을 받아 차단되기도 하고, 때로 일부 타협되거나 수용되기도 한다. 이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관한 얘기가 바로 <브로크백 마운틴>이 다루는 문제일 것이다. 동성애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 놓인, 고립된 곳의 두 인간이 나누는 동성 간의 정은 관객들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며, 가정의 울타리를 지키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최대한 욕망을 절제하며 현실과 타협하는 에니스의 삶은 보편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이 동성애 영화이면서 <브로크백 마운틴>이 지니는 보편성이 아닐까.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 감추고 참아내는 '은인(隱忍)'은 영화 속 주인공의 태도이면서 동시에 리안 감독의 전략이자 최대 장점이다. <색, 계>에서 사랑하던 여인,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여주인공의 죽는 장면이 감정을 촉발하는 아무런 장치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듯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관객들에게는 주인공과 함께 한바탕 후련하게 울 수 있는 여백을 주지 않는다.
▲ 제 85회 아카데미 - 감독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 리안감독은 관객들에게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감정의 억제와 은인(隱忍)할 것을 요구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리안 감독은 그 부분을 고스란히 도려내며 관객들에게도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감정을 억제하고 은인할 것을 요구한다. 저마다의 욕망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동양적 정서로 한을 더 머금고, 한을 가슴에 더 삼키라고 한다. 리안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더 잊을 수 없는, 더 먹먹한 감동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마음에 지니고 살아간다. 팍팍한 현실을 깨뜨려줄 욕망의 산 하나를 등 뒤에 은밀하게 간직하며 말이다. 그 비밀스러운 욕망은 쉽게 현실의 세계로 걸어올 수 없기에 그저 내면 깊숙이, 혹은 저 먼 산의 높은 꼭대기 눈 속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현실을 살다가 1년에 한두 번, 아니면 4년에 한 번씩 은밀하게 그 욕망을 꺼내 함께 브로크백 마운틴을 찾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욕망의 길에는 늘 그렇듯, 계(戒)가 동행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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