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북한사람은 '너무'를 어떻게 줄여쓸까?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 28] 자강도로 가는 길

등록|2017.08.05 12:14 수정|2017.08.05 12:14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 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동안 개인적인 이유로 수 개월간 연재를 올리지 못했음을 깊이 사과드립니다. 연재를 재개하오니 독자님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2015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

▲ 마스크를 쓴 평양시민. 평양 공기가 비교적 나빠졌다는 표시다. ⓒ 신은미


▲ 평양 시내의 차량 행렬. 교통량이 늘어났다. ⓒ 신은미


2015년 10월 16일. 아침에 일어나 어제 일을 회상한다. 김련희씨가 남한에 간 뒤 처음으로 평양에 있는 딸과 대화를 나눴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을까. 아니면 그들을 페북 메신저로 연결시켜줘 되레 그리움에 복받쳐 더 힘들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여러 생각을 뒤로하고 더이상 기자가 아닌 관광객으로서 일정을 시작한다.

자강도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자강도는 처음이다. 이제 자강도만 가보면 북한의 모든 도(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남북도, 량강도, 자강도)를 다 돌아본 셈이다. 마켓에 들러 김밥, 김치 그리고 이런저런 반찬거리를 사서 차에 오른다. 고속도로 주변 경치 좋은 곳에서 소풍 겸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출근 시간도 아닌데 도로가 차로 붐빈다. 북한에서 일고 있는 여러가지 변화 중 하나가 바로 '늘어나는 교통량'이다. 때문에 평양의 대기 상태도 내가 처음 북한을 방문했던 2011년에 비해 많이 나빠졌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대도시에 비하면 평양의 공기는 여전히 신선하다.

옆 차량 안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보인다.

"경미야, 저 차 안에 있는 여성은 마스크를 쓰고 있네."
"차들이 늘다나니 시민들이 예민해 져서 기렇습니다. 기래도 저 여성은 좀 심했습니다.  중국에서 부터 황사가 날아오는데 기때는 많은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만 오늘같은 날은 안 기래도 되는데... 얼굴도 고운데 왜 가리고 다니나."

경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린다.

우리의 옛 모습 

▲ 추수가 한창인 평안남도의 농촌. ⓒ 신은미


▲ 추수가 한창인 평안남도의 농촌. ⓒ 신은미


차가 시내를 빠져나와 평안남도의 농촌을 지난다. 추수가 한창이다. 이제 햇곡식이 나오면 당분간 식량 걱정은 없을 게다. 그저 풍년이길 바라며 쌓아놓은 볏짚단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농촌 주택의 모습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오래되고 보수도 제대로 못한, 흉한 모습의 기와집 대신 산뜻한 색상의 지붕을 얹은 주택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남편이 '볼 일' 때문에 차를 세우잔다. 북한의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볼 일'을 본다. 여성의 경우 보물찾기 하듯 나무숲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보인다. 반면 남자들은 그저 저만치에서 등만 돌리고 일을 보기 일쑤다. 마침 안주로 가는 출구에 자동차가 다다르자 차에서 내린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충 일을 치른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고속도로를 달린다. 점심식사를 위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음식을 풀어 놓으려니 마실 것이 보이질 않는다. 그만 깜빡하고 음료수를 사지 않았다. 경미가 제안을 한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개천군이 나옵니다. 거게서 식당을 찾아 들어가 음료수를 사서 풀어놓고 먹읍시다."
"음식도 안 시키고 음료수만 사서 먹자구? 미안해서 어떻게 그러니, 경미야."
"일없습니다."

▲ 평안남도 개천군으로 가는 입구. ⓒ 신은미


▲ 평안남도 개천군으로 가는 입구. ⓒ 신은미


고속도로를 나와 개천군으로 향한다. 북한의 시골 풍경이 예전 남한 농촌의 모습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옛 정취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에 차를 세웠다. 한 여인이 머리에 짐을 이고 어디론가 걸어간다. 

우리는 가끔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산업화로 인한 문명의 편리함이 되레 우리의 인성을 해쳤다면서 "그때가 좋았다"는 말도 꼭 덧붙인다. 어떤 이는 문명의 이기를 뒤로 하는 삶을 살기도 한다. 한 번 잃어버린 과거는 여간해서 되찾을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 하교하는 초등학생(평안남도 개천군). ⓒ 신은미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붉은 소년단 머플러를 두른 초등학교 학생이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평안도 농촌의 어린아이는 왼손 팔목에 예쁜 시계를 찼다. 언젠가 오른손에는 휴대전화가 쥐어져 있을 게다. 그때가 와도 지금의 아름다운 심성을 간직하고 있길 소망한다.

평안도 육개장

▲ 식당을 묻는 우리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는 평안남도 개천군의 여성. ⓒ 신은미


개천군 시내에 도착해 식당을 찾는다.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고 길 가는 여성에게 식당을 묻는다. 단정한 옷차림의 이 여성은 옆구리에 핸드백을 낀 채 한 손에는 화장품 튜브를, 또 다른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있다. 개천역 부근에 식당이 몇 군데 있다면서 친철하게 알려준다.

▲ 연탄과 '타이어' 굴렁쇠. ⓒ 신은미


역으로 가는 길에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고 깜짝 놀란다. 어린이들이 자전거 타이어를 이용해 굴렁쇠 놀이를 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 남자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다.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중계방송하던 한 외국인 아나운서는 개막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면서 그라운드를 횡단한 장면이라고 말했던 기억이다.

북한에서 굴렁쇠를 보리라곤 상상해보지 못했다. 굴렁쇠가 한민족 어린이의 놀이인 것을 발견하곤 울컥한다. 빈터에는 막 찍어낸 연탄을 펼쳐놓고서 말리고 있다. 벌써부터 월동준비를 하는가 보다. 이 또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 평안남도 개천의 모습. ⓒ 신은미


▲ 평안남도 개천역. ⓒ 신은미


개천역 근처에 차를 세우고 식당을 찾는다. 역에는 예외없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걸려 있고 양옆으로 붉은 붓글씨체의 구호가 적혀 있다. 역 앞에는 짐을 싣는 리어카도 보이고 손님을 기다리는 승합차도 서 있다. 역 건물이 꽤 오래돼 보인다.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본강점기 당시 지은 역 건물도 근처에 있단다. 점심을 먹고 개천을 떠나기 전 들러보기로 했다.

▲ 평안남도 개천군의 한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었다. 이 육개장 속 고기의 정체가 의심스러웠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 신은미


식당에 들어가 들녘에서 먹으려고 준비해온 김밥, 풋배추김치, 계란간장조림, 오징어젓, 오뎅튀김 등을 펼치고 식당에서 주문한 육개장을 곁들인다. 이 식당의 육개장은 다른 식당의 육개장과 다르다.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가지 않아 맑은 소고깃국 같은 느낌이다.

대체 어떻게 요리를 했는지 고기가 아주 연해 부담 없이 맛있게 먹는다. 다 먹고 식당을 나오자니 남편이 내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인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먹은 고기가 소고기가 아니라 개고기인 것 같아, 소고기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없어"라면서 내 비위를 건드린다.

갑자기 남편의 말이 맞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버쩍 든다. 왜냐하면 북한의 다른 지방에서 먹은 육개장도 남한의 육개장처럼 고춧가루를 넣어 붉은 색이었다. 게다가 북한에서는 남한식 육개장 앞에 '소'자를 붙여 꼭 '소육개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 경미가 육개장을 주문할 때 '소육개장'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육개장'이라고 불렀다. 경미한테 물어 보고 싶지만 도저히 겁이 나서 묻지 못하겠다. "설마...?" 남편을 노려보며 '절대 개고기가 아닐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자주 그리고 자력갱생 

▲ 지금은 유적지로 꾸며진 옛 개천역. 일제시대 당시 지어졌다고 한다. ⓒ 신은미


▲ 지금은 유적지로 꾸며진 옛 개천역. 일제시대 당시 지어졌다고 한다. ⓒ 신은미


일본강점기 때 사용했다던 옛 개천역을 전문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참관한다. 정말 깨끗하게 잘 보존하고 있다. 전문해설사까지 상주하고 있는 옛 기차역이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이유를 알았다. 바로 김일성 주석이 열한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조국 해방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갈 당시 이 기차역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북한의 혁명사를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 아주 중요한 유적지라는 설명이다.

▲ 김일성 주석이 11살 때 조국해방의 뜻을 품고 중국으로 향할 때 머물렀다는 '서선여관'. ⓒ 신은미


▲ 김일성 주석이 11살 때 조국해방의 뜻을 품고 중국으로 향할 때 머물렀다는 '서선여관'. ⓒ 신은미


역 바로 앞에 또 하나의 유적지가 있다. 김일성 주석이 역에서 내려 하룻밤을 머물렀다는 여관이다. 그 당시 여관에서는 가격에 따라 제공하는 음식의 반찬 가짓수와 덮고 자는 담요의 숫자가 달랐다고 한다.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어린 김 주석은 가장 싼 걸로 주문을 했으나 이를 눈여겨본 여관 주인이 제일 비싼 가격의 식사와 침구를 제공했다고 한다. 후일 해방이 되고 김일성 주석은 이 여관의 주인을 찾았지만 여관을 팔고 어디론가 떠난 주인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해설사는 말한다.

▲ 평안남도 개천의 주민들과 구호 '자력갱생'. ⓒ 신은미


옛 개천역을 참관한 뒤 시내를 가로 질러 고속도로로 향한다. 길에는 '자력갱생'이라는 구호가 화강암 돌탑에 적혀 있다. 수십 년간 제재를 받고 살아온 나라의 고통과 다짐이 저 구호 속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착잡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평안남도 개천을 뒤로한다.

시아버님 친구의 고향 

▲ 평안남도 개천군의 농가. ⓒ 신은미


▲ 평안남도 개천군을 지나는 청천강 위의 다리. ⓒ 신은미


시내를 지나자 평안남도 개천군의 농촌길로 다시 들어선다. 이 길을 따라 고속도로로 향한다. 개천군은 나의 시아버님과 같은 대학에 재직하며 영문학을 가르치시던 절친한 친구 교수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고향땅을 얼마나 그리워 하셨을까. 아마도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신작로 옆 논두렁에서 친구들과 몸을 뒹굴며 꿈을 키워 오셨겠지. 생전에 얼마나 이 개천을 목놓아 부르셨을까. 그분의 고향 마을을 뒤돌아보며 그분의 심정으로 평안남도 개천을 내 마음에 새겨둔다.

우리를 태운 차가 평안북도 녕변(영변)을 지난다. 2011년 10월 이곳을 처음 지나며 느꼈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남편이 당시 안내원에게 "이 근처에 약산이 있냐"고 묻자 안내원은 그런 산이 있다며 '봄이면 진달래꽃을 비롯해 들꽃이 만발한다'고 했다. 순간 이 '녕변'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나오는 바로 그 '영변'이라는 걸 알게되고 눈시울을 적셨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한아름 가슴에 품고 이곳을 지난다.

▲ 향산호텔 수영장. ⓒ 신은미


▲ 칠색송어. 빛깔이 곱다. ⓒ 신은미


오늘 밤 묵을 묘향산 향산호텔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일정에 없던 옛 개천역 유적지 참관 때문이다. 피곤한 우리는 사우나를 하기 위해 수영장으로 향한다. 북한 투숙객 몇몇과 어울려 수영도 하고 찜질도 한다. 한 북녘동포가 묻는다.

"평양에서 왔습니까?"
"아니요, 미국서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재미(재미동포)시군요."
"네."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인데 머뭇머뭇 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식사 시간에 늦을까 싶어 서둘러 수영장을 나선다.

오늘의 전식은 묘향산 칠색송어회. 얼음으로 조각한 우묵한 그릇에 예쁘게 회를 얹었다. 초고추장을 비롯해 세 가지 소스를 내준다. 함께 나온 나막김치가 새콤하니 먹기 딱 좋게 익었다. 대동강맥주와 곁들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 안내원 경미와 경미 남편이 나논 메시지. ⓒ 신은미


경미가 남편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는다. 먼 길 떠났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낮에는 주로 문자 메시지로, 근무시간이 끝난 저녁 때는 전화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단다. 내가 "북한의 문자메시지 시스템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하니 경미가 거리낌 없이 남편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준다.

남편의 아이디는 'Dariling'이다. 'Darling'(달링)을 잘못 입력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둔다면서 피식 웃는다. 서로 존댓말을 다정하게 사용하고 있다. "주사가 넘 아파요"라는 대화를 보니 우리 아이들이 나와 문자를 나눌 때 사용하는 바로 줄임말이다. 이곳 북한에서도 문자를 주고받을 때 줄임말을 쓴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방으로 돌아와 발코니로 나간다. 2011년 10월 첫 북한 여행 때 바로 이곳에서 은하수를 봤다. 오늘도 북녘의 밤하늘을 쳐다본다. 반짝이는 별들이 하나 가득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