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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삐삐를 기억한다면... 반가울 소설

[서평] 세 자녀의 부모 뒤치다꺼리 모험담 <당신의 코끼리와 춤을>

등록|2017.08.07 10:15 수정|2017.08.07 10:15
북유럽에 대한 망상과 환상이 있다. 너무 춥고 평화로운 걸 제외하면 모든 게 좋은 나라 혹은 나라들. 디자인,복지, 치안, GNP 등등. 죄다 좋아 보인다. 이민을 간다면 혹은 노년을 보낼 나라를 고를 수 있다면 북유럽으로 하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막연한 동경이다. 내 부모 세대가 미국을 동경했듯 나는 북유럽을 동경한다.

그 막연한 부러움의 시작은 '말괄량이 삐삐'다. 어린 눈에도 삐삐가 미국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삐삐라는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미국풍이 아니었다. 거기에 행동거지는 너무 제멋대로다. 원래 어린이 프로그램 주인공들이야 어른들 말 고분고분 들어서야 인기가 없는 법이지만 삐삐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선 캐릭터였다.

예측불가능함으로 꽁꽁 뭉쳐진 아이였다. 그런 애가 어딘가에 산다면 미국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삐삐가 미국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당시 나에게는 미국인이 아닌 최초의 서양인 캐릭터였기에 무척 신기했다. 미국 아닌 서양의 존재를 처음 일깨워 준 신기원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게 부럽지는 않았다. 부러운 건 따로 있었다. 자기 결정권. 삐삐에게는 그게 있었다. 학교에 갈지 말지. 별장에서 살지 말지. 같이 살 친구로 말과 원숭이를 둘지 말지. 부모님이 없어도 삐삐는 혼자서 결정하고 생활할 수 있었다. 몸집이 작은 어린애에 불과했지만 어른과 동등한 실행력이 있었고 때때로 어른을 압도했다.

돈과 괴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삐삐처럼 살 수는 없다. 보통의 아이에게 돈과 괴력이 주어지면 그건 저주다. 어른에게 이용당하는 착취 인형이 될 공산이 크다. 삐삐가 그 길을 가지 않은 건 단호한 자유 의지 덕분이다. 확신하건대 그 독립성은 학교 교육으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부모의 잔소리로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도 자유 의지는 있었으나 그 미약함을 삐삐처럼 크고 강하게 키우지는 못했다. 명절이면 친척들과 섞이지 않고 혼자 좋아하는 텔레비전이나 끼고 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폭력이 아니면 뭘 할 줄 모르는 교사들이 득실대는 학교 따위는 예저녁에 때려치우고 싶었으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문제풀이로 청춘을 날려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내가 풀고 버린 문제집은 티코 한 대의 내부를 꽉 채우고도 넘칠 정도였다. 나는 꾸역꾸역 끌려가는 삶이었고, 삐삐는 뻥뻥 걷어차며 나아가는 인생이었다.

당신의 코끼리와 춤을누구나 마음속에 코끼리 한 마리쯤 키우지 않나요? ⓒ 사계절

그러다가 <당신의 코끼리와 춤을>을 만났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덴마크에 사는 세 자녀의 부모 뒤치다꺼리 모험담쯤 된다. 아이들이 부모를 걱정하는 거꾸로 뒤집힌 상황. 덴마크, 북유럽. 자유의지를 관철시키는 아이들의 뒤죽박죽. 다시 삐삐다.

삐삐와 다른 점이라면 이 책은 덴마크 풍속여행기를 겸한다는 것이다. 덴마크, 코펜하겐이 던지는 이미지야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체로 그 톤이 밝은데 이 책에서는 그 풍경이 마냥 밝고 명랑하지만은 않다. 마약, 재활원, 폰섹스, 매춘부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것도 미성년자들과 함께.

또, 삐삐가 부모의 부재로 시작된 독립성을 세상으로 확장한 이야기라면 <당신의 코끼리와 춤을>은 부모의 부재를 복원하기 위해 독립성을 발휘하는 이야기다. 삐삐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이는 퇴행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삐삐라고 일평생 엇나가는 삶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했을 것 같지는 않다.

세상과 어느 정도의 타협을 했다면 피뇌 3형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삐삐가 돈, 괴력, 독립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면 3형제는 좀 더 세련된 형태로 그 능력이 변화 혹은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듯 다른 삐삐와 피뇌 3형제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경직에 대한 조롱과 풍자다. 힘의 역전, 나이의 역전을 통해 권력 있는 어른들과 그들의 악취에 대고 강력한 방귀를 뀐다. 어른 골탕먹이기를 멋지게 성공한다. 아이의 눈으로 본 어른의 세상은 늘 비뚤어져 있고 위태롭다.

마냥 천국인 세상은 어디에도 없기에 그렇기도 할 테지만 이는 북유럽 뿐 아니라 인류 공통의 통과의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속된 세상에 맞게 미처 자신을 깎아내지 않은 미성숙의 인간이 고통을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곰도 인간으로 합류하기까지 쑥과 마늘을 삼키는 고통이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책이 지닌 무게는 가벼운 듯하면서 무겁다. 하지만 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밝다. 밝은 톤 사이사이 무거운 심이 박혀 있다고나 할까. 따라서 이 책을 가볍게 보고 싶은 자 경쾌하게 읽을 것이요 무겁게 보고 싶은 자 한없이 느리게 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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