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돈도 국민 세금인데..." 보수인사도 개탄하는 '관제시위' 의혹
[집중분석-국정원 9대 적폐사건⑦] 보수단체 지원 의혹 사건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국정원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은 '정보기관의 가장 나쁜 선례'였다.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만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그 9년의 시간 동안 일어난 '적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국정원 개혁을 얘기할 수는 없다. <오마이뉴스>는 국정원개혁발전위(13개)과 국정원감시네트워크(15개)가 선정한 국정원 적폐사건 목록 가운데 총 9개를 추려서 '어떤 사건'인지, '무엇'을 재조사해야 하는지를 집중 분석한다. [편집자말]
▲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15년 10월 6일 오후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수감된지 24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 구치소를 빠져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2심 실형선고로 구속 되었다. ⓒ 이희훈
보수단체와 보수정권의 '유착'은 오래된 의혹이다.
보수단체 전열이 정비된 직접적인 계기는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대규모 반대 시위로 정국이 들끓자 두 차례나 사과 담화를 발표해야 했다(2008년 5월 22일, 6월 19일).
모든 음식점의 쇠고기 원산지 표시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농산물품질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비판 여론은 수그러들었지만, 정권 수뇌부는 이 사건을 '치욕'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진보단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보수단체의 '조직력'을 두고는 여러 가지 뒷말이 나왔다.
국정원의 손을 거친 보수단체의 신문 광고
원세훈 국정원장이 이명박 정부에서 4년간 자리를 지키는 동안 '댓글부대'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우군'을 만드는 데도 전력을 다했음이 검찰의 국정원 수사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났다.
원세훈 원장은 취임 첫 해(2009년) 부서장회의에서 보수단체 지원을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보수단체에 대한 운영비 지원 문제도 재검토하세요. 좌파 정권이 없어졌는데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으면 뭐야? 자유총연맹이라든가 이런 데는 구청 같은 데도 다 사무실 제공해주고 그랬어요. 좀 다시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원세훈 원장의 지시는 중요한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구체적으로 내려왔다.
"각 부서장들은 관계 단체들에,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오찬간담회를 해서라도, 일주일에 한 번, 두세 번이라도 가서 거기 주요 멤버들 돌아가면서 또 시군별로까지도 불러가지고, 자꾸만 그 사람들에게 우리 우호세력을 그정확하게 알리란 말이야. 혹세무민된 거 정당화시키자는 얘기다. 그거 활동상황 보고를 해요. 그게 내가 볼 때는 오프라인 쪽에서 중요하고, 온라인 쪽에선 우리 직원들이 나서서 계속 대처하고..."(2011년 11월18일 부서장 회의)
국정원의 '민간인 댓글부대' 운용이 최근에야 밝혀진 것처럼 보수단체와의 커넥션 규명도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보수단체의 왕성한 활동 배후에 국정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지난달 24일 검찰은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대웅)의 원세훈 원장의 파기환송심 결심 재판에 몇 건의 신문광고를 추가 증거로 제출했다. 2011년 보수단체 자유주의진보연합이 낸 신문 광고들(7월 21일 문화일보, 8월 2일 동아일보, 12월 28일 조선일보)인데, 이 모두가 국정원의 '손길'을 거쳤다.
<문화일보>의 의견 광고는 당시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에서 농성 중이던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지하는 재야단체들의 '희망버스' 캠페인을 '절망버스', '폭력버스'라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이 문안을 다듬어준 곳이 국정원이었다.
▲ 2011년 12월28일자 조선일보 35면(오피니언)에 실린 자유주의진보연합의 의견광고 ⓒ 조선일보 PDF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2011년 12월 17일) 이후에 나온 <조선일보> 의견 광고도 마찬가지였다. 불필요한 정쟁을 중지하고, 국민들이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평이한' 내용이었지만, 광고에 담길 문구를 자유주의진보연합에 이메일로 보내준 사람은 국정원 직원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이러한 광고들에 대해 "결국 기획은 국정원 심리전단이 하고 오프라인 활동은 보수단체가 했다. 심리전단은 이를 확대재생산해 유리한 여론 조성을 꾀했다"고 밝혔다.
보수단체와의 오찬 모임, 이병기 원장 "우파 진영이 하나로 뭉쳤야"
국정원의 보수단체 지원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2014년 7월 남재준 후임으로 국정원장에 취임한 이병기는 2015년 2월 12일 보수단체들과의 오찬 약속을 잡았다(<시사저널> 보도). 일부 참석자들은 당시 오찬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이병기 원장이 '우파 진영이 하나로 뭉쳤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돈 지원해 주는 창구를 하나로 해야 쉽게 그 창구에다 (돈을) 넣는다는 거였다."(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
"(이병기 원장이) 집회를 각 단체에서 나눠서 할 것이 아니라 (창구를 단일화해서) 한 단체에서 하는 것이 어떠냐고 이야기를 했다."(구재태 재향경우회 회장)
국정원이 보수단체에 자금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정치 불관여'를 규정한 국정원법 위반 논란이 생길 만한데, 그걸 훌쩍 건너뛰어 아예 자금 창구를 단일화하는 논의를 원장이 주도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모임이 있은 지 보름 만에 그는 국정원장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달 17일 발견된 '박근혜 청와대'의 정무수석실 캐비닛에서는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보수단체들이 힘을 모아 정부 지원세력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독려하라"는 취지의 문건이 나왔다고 한다. 총선 시기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이병기는 여당(새누리당)이 선거에서 패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3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 남소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올해 초 이병기로부터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단체에 대한 (자금) 지원은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기조실장한테 그런 내용을 보고받았지만, 계속 그런 지원이 있어왔기 때문에 국정원장이 굳이 터치할 입장은 안 됐다. (내가 원장에서 물러난) 지금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한겨레> 보도).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보수단체를 우군화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있었는지는 앞으로 규명해야 할 부분이다.
박영수 특검팀의 한 관계자는 "올해 초 (이병기 전 원장에 대한) 조사는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참고인 조사였다"며 "국정원장 시절 행적은 검찰에서 따로 살펴야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MB정부의 국정원, 보수단체와 가까워"... "관제데모 지원은 잘못된 것"
보수진영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지원설에 대해 엇갈리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는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보수단체와 가까웠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는 멀어졌다. 담당자가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담당하는 정도였지, 보수단체나 미디어를 관리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변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댓글 사건이 터지면서 정권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자 보수진영을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어버이연합 하나 키우고 말았고, 나머지는 모른 체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반면,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대표는 "국정원 돈도 국민 세금인데, 그 돈으로 관제데모를 지원했다면 아주 잘못된 것"이라며 "사람이 죄 짓고는 못 사는 거다. 이번 기회에 잘못한 게 있으면 밝히고, 수사할 게 있으면 수사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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