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종전 72년' 특집방송에 드러난 일본의 속내

13일 방영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의 특집을 지켜보면서

등록|2017.08.15 15:52 수정|2017.08.15 15:52
현재 시즈오카현 이토시(伊東市)에 살고있는 이나바 스스무 (稻葉進, 88살)씨는 1945년 8월 6일 원폭지인 히로시마의 구레항공대(吳航空隊)소속 대원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날, 이나바 씨는 구레항공대로부터 30미터 떨어진 하늘에서 새빨갛게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보았다. 16살 소년의 눈에 비친 원폭 현장은 평생 "비참한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토신문(伊東新聞) 8월 14일치 1면 "종전(終戰) 72년" 특집에서 밝혔다.

이토신문이토신문 기사에서 이나바 스스무 씨는 “비참한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 이윤옥


그런가하면 어제 (13일) 오전 9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에서는 "종전(終戰) 72년"을 맞아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전문가들을 초대해서 종전 72년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참패한 일본은 패전 72년을 맞아 텔레비전과 방송에서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지난 8월 12일부터 이즈반도의 시모다(下田)에 와 있는 기자는 한국의 8.15 광복절을 앞두고 이곳 방송과 신문 등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이곳은 패전(敗戰, 지금은 전쟁이 끝났다는 뜻으로 종전 '終戰'이라 부름)을 맞이하는 지라 "1945년 8월 15일"의 의미는 한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13일 오전 9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에 등장해서 당시를 회고한 다니구치 스에히로(谷口末廣, 97살)씨는 "전쟁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전쟁은 지옥이다. 당시 종전(終戰)으로 진정한 평화가 올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또다시 전쟁 분위기가 일고 있어 안타깝다. 강해지기 위해서 무기를 갖는 게 상대를 위협하기 좋다라든가 약해지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식으로 정부는 말하지 말고 진정한 평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지를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다니구치시즈오카 방송에서 전쟁을 증언하는 다니구치 씨(텔레비젼 촬영) ⓒ 이윤옥


다니구치 2일본군 병사로 전쟁에 참여했던 다니구치 씨의 병사 시절 모습(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13일에 방영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의 특집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착잡한 생각을 가졌다. 그 까닭은 다니구치 씨처럼 전쟁 경험을 한 세대는 전쟁을 두 번 다시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특집 방송을 꾸린 방송국이나 언론들은 조금 다른 의도로 프로그램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의 언론은 제2차세계대전에 대해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양 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날 1시간 동안 방영된 '종전 72년 특집' 내용 중 증언자의 화면 외에 눈에 띄는 것은 연합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주요도시의 피해상황 보도였다. 무너진 건물과 나뒹구는 시체의 모습을 비추면서 자막에는 연신 사상자 수를 내보내고 있었다.

도쿄 대공습시 10만 명의 사망자가 생겼으며, 오사카 사망자 수 12,620명, 고베 7,491명, 오키나와의 경우는 주민의 4분의 1이 희생당했다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사진과 공습으로 310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자막과 내레이션이 흘러 나왔다. 희생자 수가 자막에 뜨는 동안 화면에는 처참하게 죽어가는 시민들과 황폐화된 도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오사카 사망자수연합군의 공격에 의한 오사카 사망자수를 자막에 내보내고 있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전쟁 분위기패전후 일본은 평화국가 건설을 맹세하며 부흥에 힘썼으나 최근 다시 전쟁 분위기로 몰고 가고 있는 점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순진한 눈으로 이날 방송만을 보고 있으면 일본이 대단한 '피해국' 인양 느껴지지만 과연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인가를 묻고 싶어졌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1996.4)"

이는 몇해전 국립 나가사키 평화기념관에 갔을 때 이 기관에서 만든 홍보용 전단에 적혀있는 글이다. 여기에도 일본은 피해자로 비칠 뿐 그 어디에도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 인식은 없다.

하지만 일제 침략의 혹독한 역사를 겪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이러한 '피해자 의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이면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런 류의 방송은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궤변으로 가득한 역사인식이요, 역사왜곡이라는 생각에 씁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러한 역사인식이라면 아무리 종전(終戰)을 돌아보고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그 진정성은 찾기 힘들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의 입장에서 진정성 있는 반성을 단 한번이라도 했는가 묻고 싶다. 1947년 5월 3일 전쟁하지 않는 나라, 일본을 지향하여 만든 '일본국 헌법'을 최근 뜯어 고치려는 모습을 볼라치면 일본의 전쟁야욕을 또 다시 보는 것 같아 우려감이 앞선다.

국회인구의 80%가 전후 세대이며, 국회의원 7%만이 전쟁 전 세대라는 자막 안내(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토론전쟁을 안하겠다는 맹세라는 주제로 전문가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강상중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가 참여하여 균형있는 토론을 이끌어내고 있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일본의 총인구 80%가 전후(戰後)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국민의 5분의 4는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국회의원의 715명 가운데 약 7%인 50명 만이 전전(戰前)에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텔레비젼은 밝힌다. 이것은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국 일본의 역사를 체험한 세대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스컴과 언론이 '종전 72년' 특집으로 내보내면서 '피해자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이다.

정말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의 피해국인가? 기자는 시즈오카방송의 특집프로와 지역신문을 보면서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를 토론자에 넣어 균형있는 의견을 들어보려는 의도는 참신해 보였다.
덧붙이는 글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