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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야생화 들고 서 있는 '촌놈의 노래'

생짜베기 촌놈, 송인상이 서울에서 콘서트를 한답니다

등록|2017.08.21 11:00 수정|2017.08.21 17:23

▲ 지난겨울 권나무 콘서트에서 게스트로 출연해 노래하고 있는 송인상. ⓒ 송성영


"아빠, 8월 27일에 공연하기로 했어."
"진짜? 어디서 허는디?"

서울에서 옥탑방 생활을 하고 있는 작은 아들 송인상이 지난 봄부터 내가 월세로 살고 있는 해미 가야산, 산 깊은 오두막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아궁이에 불 때는 허름한 부엌 딸린 방 두 칸짜리 산막에는 지 형, 송인효 녹음실이 있다. 녹음실이라고 해봤자 두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공간이다.

천장 낮은 그 방에서 두 형제가 기타를 쳐 가며 컴퓨터 녹음 프로그램에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리더니 얼마 전 노래 녹음을 완성했다(자본에 끌려 다니지 않는 '음악의 가내수공업'을 꿈꾸고 있는 송인효의 산막 녹음실 첫 작품이기도 했다).

어쨌든 송인상의 능력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라 여겼던 공연장을 잡아놨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서울 신촌(인디 톡)에. 이제 첫 EP 음반을 낸 무명가수가 공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여겼었다.

"그냥 집 마당에 사람들 불러다 놓고 놀자. 서울에서는 아무리 작은 공연장이라도 대관료가 꽤 비쌀겨...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그런 돈 없다."
"걱정하지마, 아빠. 내가 알아서 할게."

무지막지한 대도시에서 당당하게 생활하고 있던 아들

▲ 두세 살 무렵부터 산골에서 살았던 송인상. 송인효 ⓒ 송성영


▲ 두 녀석은 개 고양이 병아리, 집 옆 개울가 가재나 버들치와 친구 삼아 놀았다. ⓒ 송성영


옥탑방 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아래 알바)로 근근이 입에 풀칠 해가며 살아가는 녀석이 알아서 한다니 기가 찼다. 그리고는 얼마 후 공연장을 턱 하니 잡았다고 전화가 온 것이었다. 80석 규모의 소규모 공연장은 내 생각과는 달리 비용이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그 비용조차 녀석이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치유명상음악가 '평산 아저씨'가 대 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어려서부터 '무대포' 기질이 있었다. 녀석의 어린 시절은 내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적게 벌어 행복해지는 방법'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녀석에 관한 글을 쓰려고 오래된 기억을 들추기 위해 기사를 검색해 봤다. 녀석이 <오마이뉴스>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2월부터였다.

그 첫 기사 제목이 '인상이가 밥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 기사에서도 녀석은 '무대포'였다.

"우리 집 작은 녀석 인상이는 참말로 웃기는 놈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녀석을 놀리기 위해 가끔씩 형광등 불을 끕니다. 하지만 녀석은 침침한 공간에서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무대포'입니다. 뭔가에 열중하면 끝장을 봐야 합니다. 그런 인상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밥'입니다."

산골에서 밥 하나로 즐겁게 생활해 온 송인상, 녀석은 충남 홍성에 있는 대안학교, 풀무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서울로 올라갔고, 서울에서 역시 그 '밥심'으로 버텨오고 있다. 옥탑방 보증금도 틈틈이 모은 용돈으로 마련했다. 한국 청년들의 현실이 그렇듯 지 형 말로는 가끔씩 알바가 없는 날에는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며칠 동안 밥과 반찬 하나로 버티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난한 애비인 내게 생활비를 보태 달라고 단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빠. 인상이한티 전화가 왔는디, 3천 원만 보내 달래."
"3천 원? 왜?"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이 7천 원이 전부라서 현금카드로 돈을 뺄 수 없다네."

현금 카드로는 천 원짜리 지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1만 원을 채워야 돈을 뽑을 수 있다. 하여 1만 원을 채우기 위해 형에게 3천 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고지식한 녀석에게 10만 원을 송금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길래 물었더니 돈이 들어왔는데 어디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녀석은 돈 3천 원에 쩔쩔매가며 째째하게 서울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산골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바닷가 외진 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녀석이었기에 도시 생활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이라는 무지막지한 대도시에서 당당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 자전거를 타고 바닷길을 따라 등교했던 송인상. 기타를 잡기 시작한 것은 전화선도 인터넷도 들어오지 않은 외진 바닷가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였다 ⓒ 송성영


▲ 형과 함께 독학으로 기타와 노래 작곡을 배웠다. ⓒ 송성영


지난 설날에 삼부자가 나란히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말수 없는 인상이 대신 인효 녀석이 인상의 서울 생활에 얽힌 얘기를 해줬다. 그 이야기는 이랬다.

인상이 녀석이 새벽까지 알바를 마치고 망원동 옥탑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한 젊은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가 아주 불쌍한 몸짓으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 사람들 모두 다 등 돌리고 있을 때 인상이가 그 사내에게 다가가 물었더니 '부산이 집인데 돌아갈 차비가 없다'고 하더란다.

거기다가 밥을 먹지 못해 하루 종일 쫄쫄 굶었다는 것이었다. 차비를 빌려주면 꼭 갚겠다고 하여 인상이는 자신의 지갑을 탈탈 털어 거금 8만 원을 다 내줬다. 그 돈은 새벽까지 힘들게 일해서 번 하루 일당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인상이에게 물었다.

"그래, 그 돈은 받았냐?"
"아니."
"그 놈한티 연락은 오데?"
"아니."
"그래도 넌 아무렇지도 않어?"
"잊어버렸어..."

촌놈이 서울 올라가 눈 뜨고 코를 베인 격이었지만 녀석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 사내가 진짜로 지갑을 잃어버린 사내이든 사기꾼이든 인상이 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냥 측은지심에서 준 것뿐이었다. 자식과 애비관계를 떠나서 나는 그런 심성을 가진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싱어송라이터 된 아들, 단독 공연까지 열었다

▲ 서울 생활에 지쳐 내가 살고 있는 산막에 오면 잠만 늘어지게 자는 송인상. ⓒ 송성영


▲ 산막에 오면 때론 장작도 패 주는 건장한 청년, 송인상. 이제 더이상 아궁이 불앞에서 대파를 구워 먹곤 했던 어린 송인상이 아니다. ⓒ 송성영


이런 당당한 녀석이 한동안 서울 생활을 힘들어 했다. 녀석은 일주일에 세 차례 알바를 했는데 밤늦게, 때로는 새벽까지 일하고 옥탑방에 돌아오면 쓰러져 잠들어 일어나면 오후가 된다. 알바 하여 번 돈은 밥 사먹고 나면 끝이었다. 그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 기타를 걸쳐 메고 버스킹을 해가며 자신의 노래를 만들고 싶었지만 생활에 쫓겨 도저히 시간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하루는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서울에 알바를 하러 왔는지 노래를 부르러 왔는지 알 수가 없네."

그 어리석은 일상을 깨닫고 녀석은 알바를 줄이고 먹는 것을 줄여가며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서울의 밤'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서울에는 정말 별이 뜨지 않아서 신기했다.
시골의 밤과 다르게 서울의 밤은 별보다 사람이 많고.
바람대신에 하루 종일 달리는 차들과,
별 대신에 빛나는 빌딩의 조명.
자연이 한 걸음 물러나 도시에게 양보해준 것처럼
나도 촌놈고집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도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려 한다.
서울생활도 나에겐 새로운 방황이고 처음이다.
별 하나 뜨지 않는 서울이 무엇을 느끼게 해 줄지 기대된다."

나는 녀석의 아리송한 글에서 깜짝 놀랬다. 어려서도 그랬듯이 녀석은 내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생각들을 새롭게 일깨워 줬다. 나는 서울 같은 대도시가 자연을 파괴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녀석은 '자연이 한 걸음 물러나 도시에게 양보해 준 것"이라 믿고 있었다.

녀석이 자신의 노래에 대해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난겨울 녀석의 노래 '서울의 밤'을 접한 가수 권나무씨가 자신의 단독 콘서트에 초대가수로 내세웠던 것이다. 권나무씨는 2015년,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대중음악상(최우수 포크 노래)을 받은 가수라고 한다.

▲ 8월 27일 신촌 인디톡. 선배 조한새임의 도움으로 '송인상 단독 콘서트'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 송성영


홍대 길거리에서 기타를 메고 주변 상가 사람들이나 경찰들에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노래하던 녀석으로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무대에 초대가수로 오른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 몇 곡의 노래를 더 만들어 형의 도움으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작은 음반을 냈고 그 여세를 몰아 단독 콘서트를 마련했던 것이다.

녀석이 노래를 시작한 것은 산골 생활을 하다가 호남고속철도에 보금자리를 내주고 외진 바닷가에서 생활했던 중학교 때부터였다. 집 두 채가 전부였던 그곳은, 전화선은 물론이고 인터넷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거나 빈둥빈둥 놀다가 따분하면 기타를 잡았다. 어렸을 때부터 형과 함께 학교 공부를 하면서 학원 한 번, 학습지 한 번 받아 보지 않았듯이 기타며 작곡 등 노래를 독학으로 배웠다.

녀석의 노래에는 지 형 송인효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의 기억들이 낱낱이 새겨져 있다. 두 형제가 함께 부르는 '내가 살던 산동네'에도 나오듯이 아궁이 굴뚝 연기가 있고 고라니 발자국이 있고 가재와 버들치가 있다. 또한 사라진 옛 고향집 앞에 아름드리로 서 있던 둥구나무가 있고 장승이 있다. 그리고 방황하던 청소년기에 자신을 품어 줬던 엄마의 품속 같은 바다가 있다.

녀석은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노래에는 산골과 바다와 함께 어린 시절의 감성이 녹아있다. 살아온 환경이 그러했듯이 녀석의 노래에는 그 만한 나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남다른 정서가 있다. 언젠가 <오마이뉴스>에 '호남고속철도 개발, 아들은 펑펑 울었다'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듯이 녀석은 망가져버린 고향 마을을 노래로 옮긴 '장승아저씨'를 부르면서 펑펑 울기도 했다. 빈틈없이 화려한 서울에서 힘들게 알바를 해가며 옥탑방 생활을 하고 있지만 녀석은 여전히 촌놈이다.

녀석이 앨범을 낼 때 변변치 않은 글로 먹고 사는 가난한 아버지인 나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노래 소개 글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인상'이는 여전히 촌놈이다. 그의 노래 '서울의 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산과 들, 바닷가에서 피어나는 야생화 한 송이를 들고 서 있는 촌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거기 흙 한줌 움켜쥐기 힘든 서울, 밤샘 알바를 마치고 옥탑방으로 돌아와 노래하는 '인상'의 노래에는 잊혀져가는 대자연의 숨결, 귀하고도 소중한 촌놈의 감성이 묻어있다."

송인상의 앨범 타이틀은 '물감'이다. 거기에 인상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았던 추억부터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들었다. 만든 노래마다 각각 다른 색깔이 떠올랐다. 살아온 환경이 바뀌면서 나의 모습이나 감정들이 뻑뻑한 물감처럼 다른 색깔에 덧칠되기도 하고, 촉촉한 물감처럼 번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순간들을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노래로 붙잡아 놓고 싶었다. 완성되지 않을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며 살고 싶다."

내가 사는 산막으로 들어서면서 마을을 벗어나 계곡물이 흐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는 삼삼하게 펼쳐진 솔 숲 길을 만나게 된다. 녀석들은 어려서 할아버지 품 같은 커다란 둥구나무 길을 걸었고 머리가 여물어서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푸르고 붉은 바닷길을 걸었다. 올곧게 바른 세상을 꿈꾸는 청춘, 지금은 사시사철 푸르른 조선 소나무 길을 걷고 있다.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걷고 있는 두 녀석들에게 이 길들은 단지 자신들만의 길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할 또 다른 '노래'이기도 하다. 녀석들과 함께 이 길을 걷다보면 가진 게 별로 없는 애비인 내가 물려줄 수 있는 재산은 녀석들이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는 이 삼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 내가 사는 산막으로 들어서려면 조선 소나무 숲길로 들어서야 한다. 노래하는 두 녀석들에게는 그동안 걸어왔던 산길과 바닷길은 단지 자신들만의 길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할 또 다른 노래이기도 하다. ⓒ 송성영


덧붙이는 글 송인상의 노래 '서울의 밤'을 듣고 싶은 분은 https://youtu.be/i-zGQJskF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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