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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의 일탈, 이 정도라면 괜찮은 걸까요?

[넘버링 무비 15] 프랑스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또 하나의 영화 <파리로 가는 길>

등록|2017.08.25 12:18 수정|2017.08.25 12:18
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파리로 가는 길> 포스터 ⓒ (주)티캐스트


01.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난 휴양지에서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고, 상대는 정작 일에 치여 제대로 된 시간을 함께 보낼 수조차 없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게다가 멀쩡하던 귀까지 갑자기 아파져 오며 컨디션마저 나빠지기 시작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이 상황을 지금 앤(다이앤 레인 역)은 마주하고 있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 역)이 평소에도 바쁜 일정 때문에 오롯이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휴가까지 와서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아침부터 귀가 아프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 양말부터 찾아달라고 성화다. 화가 날 법도 한 상황.

하지만 앤은 내색하지 않는다. 이런 일 따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러던 중에 귀때문에 비행기를 못타게 되고, 남편의 동료인 자크(아르노 비야르 역)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는다. 어차피 자신도 파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고 지금 당장 비행기 표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그 길에 동행하지 않겠냐는 것. 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를 따라나서기로 한다.

<파리로 가는 길> 스틸컷알렉 볼드윈이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장면. ⓒ (주)티캐스트


02.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아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이다. 어떤 특별한 장치나 기교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고, 주인공 앤을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 또한 거의 전환되지 않는다. 이 작품을 연출한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이 이제 막 첫 장편 작품을 내놓은 신인 감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녀가 평소에 다큐멘터리, 설치 미술과 같은 문화적 장르에 관심이 많았다고는 하나, 과거에 메가폰을 잡아 본 경력은 없었다.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칸에서 파리로의 여정을 담은 이 간단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만 6년이 걸렸다고 한다. 8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번 도전이 가능했던 건 어쩌면 그녀의 열정 뒤에서 묵묵히 응원을 보냈던 남편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대부>(1972), <지옥의 묵시록>(1979)으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아내이기도 하다. 이 작품 또한 그녀가 남편의 칸 영화제 초청에 동행하면서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니, 가장 간단하면서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평소에 생각해 왔던 삶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03.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 마음이 가는 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마이클과 앤, 그리고 자크, 세 인물의 모습이 짧은 이야기 속에 잘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작품의 초반부에서 이별한 뒤 이따금씩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마이클이다.

앤 없이는 양말 한 켤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진 인물이라고 대범하고 쿨한 척하다가도 자크가 프랑스 남자라고 불안해하는가 하면, 몇 차례 아내와의 통화에 실패하자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오겠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그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짧은 등장에도 그의 존재는 아내인 앤의 심리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됨과 동시에, 자크라는 인물의 외면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준다.

<파리로 가는 길> 스틸컷그녀의 사진 속에는 담기지 못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 (주)티캐스트


04.

그런 그와는 달리, 앤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모습보다는 그녀가 갖고 다니던 카메라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삶과 관련해 생각해 볼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그녀의 카메라를 상징하는 Leica의 빨간 로고를 보며 물체의 심미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그 카메라는 앤이라는 인물의 심리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과 자신의 삶을 채웠던 일의 조각들, 지금 느끼고 있는 소담한 맛의 기쁨과 처음 마주한 프랑스 남부 도시들의 짧은 여운도. 그녀의 그 카메라 속에는 평생을 사랑해 온 것들이 담겨 있었고, 또 지금 사랑하게 되어 버린 것들이 차곡히 채워지고 있었다. 단 하나, 그녀 자신의 모습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누군가의 어머니로, 또한 누군가의 아내로만 여겨지면서. 스스로의 마음은 정확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돌아보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말이다. 그녀의 삶은 카메라 속에 담긴 사진들과 같았으며, 외롭고 공허해 보이기만 했다. 결코 이 영화가 누군가의 외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으로 자신의 행복에 대해 물어오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인생에 담아주고자 하는 이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흔들릴 여지가 생기게 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이야기 역시 영화 속 자크의 대사처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조금 더 자세히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끝 키스만 남긴 채 끝나게 된다.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로 가늠해볼 수밖에 없지만, 만약 그녀가 그에게 잠시라도 흔들렸다면 그건 그가 프랑스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애써 준 그 마음과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05.

그런 그녀의 카메라를 조금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인물, 자크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의 장면마다 미소를 남기는 이유는 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그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밉지는 않기 때문이다. 감독인 코폴라는 프랑스 남자는 바람기가 많고 여성을 좋아한다는 통념과 로맨틱하다는 이미지를 그의 캐릭터를 통해 묘하게 그려낸다. 7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파리를 굳이 엑상프로방스, 가르 수도교, 리옹과 뤼미에르 박물관 등 남부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끄는 그의 모습은 물론, 그녀가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최상의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리드하는 모습까지 모두.

물론 영화가 끝날 때가 되면 그의 모든 행동이 하나의 짜여진 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 그가 왜 그녀의 카드로 계산을 했는지에 대한 부분도 설명이 된다 – 리옹에서 만난 박물관 관장이 앤에게 해 준 귀띔의 내용만 유추해 보더라도 그의 마음과는 별개로 이와 유사한 여정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처음으로 그녀의 취향에 맞춘 디저트 메뉴를 주문하던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 마지막 식사야말로 어쩌면 그녀가 좋아했던 초콜릿을 통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구애를 펼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식사였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파리로 가는 길> 스틸컷그는 유쾌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 (주)티캐스트


06.

우리는 가끔, 지금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헤매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해야 하는 일 쪽으로 무게가 쏠리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오는 얕은 유혹 등 단호히 거절하기가 힘든 경우들도 생긴다. 그런 것들을 일탈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탈이라는 단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대한의 금을 넘지도, 밟지도 않을 것. 이 영화 속에서 앤 역시 잠시의 일탈을 경험한 게 아니었을까. 자크로부터 날아온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기는 했지만, 당장 파리로 돌아오겠다던 마이클의 급한 목소리에 대단히 기뻐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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