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아들 버린 비정한 아빠, 7살에 시작된 걸인 생활
[선감도의 비극 ⑧-1] 보육원 -> 소년수용소 -> 삼청교육대 -> 청송감호소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선감학원 피해자 김성환(62)씨 ⓒ 이민선
깔끔해 보이는 반바지 차림. 예순을 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얼굴이다. 그의 몸 어디에서도 험난한 인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의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했다.
김성환(62)씨는 3~4살 경에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가 됐다. 거리를 떠돌며 보육원을 전전하며 유아기를 보냈고, 지옥의 소년 강제수용소 '선감학원'에서 비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성인이 돼서는 더 힘들었다. 스무 살 시절에는 아무 죄 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고, 서른 이 돼서는 큰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 십수 년을 살며 그 어렵다는 청송보호소까지 경험했다. 60년 생애 절반 이상을 자유가 없는 보육원과 수용소, 그리고 교도소에서 보낸 것이다.
그를 지난 8월 11일 군포 산본 중심상가에서 만났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대화는 커피숍, 식당 등으로 장소를 옮기며 이어지다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을 맺었다.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혀를 차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이런 일이 실제 있었구나, 이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화를 마치고는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 험난한 시절에 고아로 살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별수 없었을 것!'이란 게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이다.
그의 인생에는 빛이 없었다. 어둠뿐이었다. '그래도 찾아 보면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 텐데요?'라고 묻자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별로 없어요, 아니 거의 없어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순간은 언제였느냐?'라는 물음에는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어렸을 때는 선감학원이고, 커서는 청송 보호감호소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와 새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 막사, ⓒ 이민선
아버지는 서너 살 된 그를 업고, 어머니는 두 살 터울인 형 손을 잡고 어디론가 떠났다. 어느 날 그에게 새엄마가 생겼다. 새엄마 등에는 젖먹이가 업혀 있었다.
4살 무렵, 새엄마는 상갓집에서 배부르게 음식을 얻어먹고 온 그를 두들겨 팼다. '떡 한 조가리 안 가져오고 혼자 배부르게 다 먹었느냐!'는 이유였다. 좋은 새엄마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일을 일러바치자 아버지는 밥상을 둘러엎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새엄마는 어린 김성환을 동인천역에 데리고 갔다. 과자를 한 봉지 사주며 '잠깐 다녀올 테니 꼼짝 말고 여기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그를 버린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와 새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그는 그 짧고 여린 다리로 집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걷다 보니 인천역이 나왔다. 놀랍게도 역 앞에 아버지와 새엄마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었다. 성환씨는 이때를 '아버지 맘이 무척 아팠을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4살밖에 안 된 나를 버린 게 괘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때 아버지 속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버린 아들이 찾아 왔으니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그의 어린 시절을 난도질한 보육원 인생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보육원에 맡겼다가 찾아가기를 두세 번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그가 7살 무렵에는 어쩐 일인지 보육원에 맡기지도 않고 서울역에 버리고 만다.
"너 인마 집 없지? 밥도 안 먹었지?"
'네'라고 대답하자 넝마주이는 7살 김성환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따라가 보니 서울 만리동 쪽 공터였다. 걸인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뒤 3일 정도를 쫄쫄 굶으며 서울역 인근을 배회하던 중에 닥친 일이다.
"밥 적게 얻어 온다고 때리고, 기분 안 좋다고 때리고"
▲ 어린 넋을 건져 올리는 홈 맞이 굿이 열린 선감 선착장, ⓒ 김성균
그곳에서 그가 한 일은 '걸 달아 오는 일(밥 얻어 오는 일)'과 앵벌이였다. 서너 살 위 아이들이 버스나 전철 안에서 생고(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구슬프게 하는 것)를 치거나 노래를 하면 모자를 들고 다니며 돈을 모아 오는 게 그의 임무였다.
비참한 일을 하고 살았지만, 분위기라도 화목했으면 그나마 견딜 만했을 텐데, 걸인들 본거지인 만리동 공터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밥 적게 얻어 온다고 때리고, 그냥 맘에 안 든다고 때리고, 기분 안 좋다고 때리고. 따귀는 예사고, 넝마주이 할 때 쓰는 그 큰 쇠집게로 머리부터 사정없이, 어휴~. 그러다가 분이 안 풀리면 번쩍 들어서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데, 그것을 '광대'라고 했어요. 정말 죽지 않을 만큼 때린 거죠."
이 가혹한 폭력을 견디지 못해 그는 약 1년 뒤인 8살 무렵에 도망을 쳤다. 그 뒤 얼마 동안 혼자 걸인 생활을 하게 되는데, 만리동 공터에서 배운 기술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거지 생활도 배우지 않으면 힘들어요. 밥 달라는 말도 안 떨어지고 어디 가야 밥을 잘 주는지도 알지 못하고요. 한남동 부잣집에 가면 밥을 잘 주었어요. 식모가 있는 집이 더 친절했는데, 힘들게 사는 처지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 맘 알잖아요. 문이 열리면 발부터 집어넣어야 해요. 밥 줄 때까지 빼지 않는 거죠. 이게 다 거기서 배운 기술이에요."
비록 춥고 배고프지만, 혼자 하는 걸인 생활은 자유가 있어 좋았다. 폭력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은 그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단속반이 늘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다. 환자를 태우는 병원 구급차가 단속 차였는데, 그 차에 던져지듯 올라타게 되면 곧바로 '보육원행'(서울 시립아동 보호소)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다행스러운 게 아동 보호소에서 저를 천호동에 있는 '애지 보육원'이라는 데로 보냈다는 거예요. 거긴 다른 데 비하면 천국이었어요. 원장님이 여자 전도사였는데, 굉장히 친절했어요. 저를 씻기다가 탈장이라는 병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수술도 시켜주고, 천호 초등학교에 입학도 시켜 주었고요. 거기 선생님들은 때리지도 않았어요. 제가 병원 다닐 때 매일 업고 다니던 누나가 있었는데, 저한테 정말 잘 해 주었고요."
덩치 큰 녀석이 쫓아와 도망쳤는데, 알고 보니 7년 전 헤어진 형
▲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 이민선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는 결국 도망을 치고 만다. 역시 폭력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매를 들지 않았지만, 몇 살 위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힘을 과시하려고 때리기도 했고, 재미 삼아 친구끼리 싸움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 하는 걸인 생활이 시작됐다. 깡통을 들고 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몰래 탄 야간열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아슬아슬한 생활이었다. 그래도 역시 자유가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2년을 떠돌다가 10살 무렵 또 단속반에 걸려 서울시립 아동보호소에 잡혀가게 된다.
"잡혀 갈 때, 아~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유도 없고 매일 맞고, 이런 거 다 경험을 해 봤으니 정말 싫죠. 거긴 밥 먹을 때도 선착순을 시켜요.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죠. 그럼 밥 먹다 말고 뛰어나가야 하는 거예요. 안 맞으려고요. 저는 아예 맞을 각오 하고 먹던 밥 다 먹고, 다른 애들이 남긴 밥까지 먹어 치운 다음에 나갔어요. 매하고 밥을 바꾼 거죠. 그래서 별명이 꼴통, 밥 돼지였어요."
여기서 그는 형과 운명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어느 날, 덩치 큰 녀석이 저를 막 쫓아오는 거예요. 저는 막 도망쳤죠. 때리려는 줄 알고요. 그런데 뒤에서 '너 성환이 맞지'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3살 때 헤어진 형이었어요. 형이 7년 전에 헤어진 저를 알아본 거예요."
이렇게 해서 그는 형과 함께 아동보호소에서 2년을 보낸다. 그러다가 형제는 같이 탈출해 걸인 생활을 하며 거리를 떠돌다 다시 잡혀가기를 두세 차례 반복한다. 그러다가 그가 12살 된 해에 형과 헤어져 선감학원으로 가게 된다. 1968년 7월 31일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가장 불행하게 한 선감학원에 발을 들인다.
"보호소에서 형이 내일모레 도망쳐서 용산역으로 나오라고 했는데, 아 그날이 제가 선감도로 끌려가는 날일 줄이야! 그래서 도망을 못 쳤고, 결국 형과 헤어지게 된 것이죠. 선감학원에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제 진짜 죽었다 생각했죠. 섬이라서 도망을 칠 수도 없는 생지옥이라는 것을 이미 소문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