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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한 번 못해본 모태솔로 '탈춤러', 국회의원 된 사연

[나의 찌질한 20대④]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등록|2017.09.02 11:08 수정|2017.09.02 11:08
당신의 20대는 어땠나요? 반짝반짝 찬란했나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나요. 어떤 하루를 보냈건, 누구나 공평하게 10년 동안 20대를 살아내죠. 그렇다면, 금수저 물고 태어났을 것만 같은 정치인들의 20대는 어땠을까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금 그 자리에 있을까요. <오마이뉴스>가 정치인들의 20대, 청춘 한 자락을 들춰봤습니다. [편집자말]

▲ 22년 전인 1995년, 당시 대학생 탈춤패에서 활동하던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비례대표)가 여름 농활에 갔다가 찍힌 사진. 맨 앞줄 오른쪽에서 대학생 채이배가 짙은 한일자(一) 눈썹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웃고 있다. ⓒ 채이배의원


22년 전인 1995년 사진 속, 형형색색 화려한 복장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청년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짙은 한일자(一) 눈썹에 쌍꺼풀 없는 눈, 비교적 또렷한 콧날도 비슷하다. 단 한 가지, 지금보다 머리숱이 눈에 띄게 많은 것만 빼고. 사진 속 주인공은 올해로 43세인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비례대표)이다.

지난달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채 의원은 사진을 보여주며 "20여년 전 사진인데 지금과 많이 다르죠? 아마 머리숱이 제일 다를 것"이라고 말하곤 웃었다(정말 달랐다!). 그가 '내 20대 중 가장 빛나던 시기'로 꼽은, 고려대 탈춤동아리 '탈사랑 우리'에서 여름 농활(농촌봉사)을 갔다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정책통' 채이배 의원의 20대는 어땠을까. 그는 "20대는 제 평생의 친구들을 만난, 제 가치관과 성격을 형성한 시기"라고 말했다. 자신이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그는 대학교 탈춤패에서 활동하며 스스로 외향적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다만 탈춤을 연습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몸치·박치·음치 3박자를 다 갖춘 '허당'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고 했다.

"정말 잘 못하겠더라고요. 서툴러도 계속 연습하다 보면 다른 친구들은 점점 나아지는데 저는 안 나아지는 거죠. 노래도 민요 같은 걸 배우다 보니 깨닫는 게 '아 나는 정말 음치였구나. 몸치에 박치까지 있구나', 그때 안 거죠. 해도 해도 안 되더라고요(웃음)."

그의 젊은 시절을 정리해보니 탈춤·야학교사·모태솔로가 키워드로 꼽힌다. 듣다 보면 '바른생활 청년'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지만, '찌질한 역사'도 있다. 그는 대학생 때 연애 한 번 못 해본 '모태솔로'였다고. "돌아보니 그게 가장 후회 되더라"는 그는, 고백했다 차인 여학생과 졸업 뒤 다시 만나 결국 결혼했다. "제대로 연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몸치에 음치·박치, 그래도 어떻게든 탈춤패는 하고 싶었다"

▲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 남소연


탈춤패와의 인연은 어디서부터였을까.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소풍을 갔다가 풍물패와 사물놀이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풍물 공연이 있어서인지 자기들끼리 리허설을 하고 있더라고요. 또래 친구들은 놀이기구 타느라 바쁜데, 저는 그 사람들 연습하는 게 너무 재밌어 보여서 계속 그 주변에서 종일 구경만 했어요."

그 풍경이 인상 깊게 남아 있던 그는, 2년 뒤 대학교에 합격한 뒤 '운명처럼' 다시 탈춤패를 만나게 된다. "합격증을 받으러 왔는데, 광장 앞에서 풍물을 치며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입학하고 나서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나처럼 직접 찾아간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더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들어간 탈춤패였지만 '음치·박치'인 탓에, 춤이나 풍물이 아닌 극본 쓰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마당극이란 풍물과 탈춤·민중요·연기 등을 합친 사회참여적 연극으로 채 의원은 "한국판 종합예술, 한국식 뮤지컬"이라고 설명했다.

"저는 춤을 못 추는 박치다 보니, 사회과학 세미나와 극본 쓰는 걸 주로 담당했어요. 그런데 사회과학 탈춤패니까 아무래도 사회 비판적인 극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주로 철거민과 등록금 투쟁, 동학농민혁명…. 그때 빈민활동 하는 친구들 얘길 듣고, 철거민 투쟁도 함께 했고요."

채 의원은 "20여 명 선후배와 다양한 주제로 싸우면서 인생을 배웠다, 그 3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까지 얘기했다. 인터뷰 도중, 어색해하면서도 일어서서 시범 동작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한 번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맡은 적이 있다며 공연 중 남몰래 실수한 경험도 털어놨다.

"탈춤을 변형시켜 집단무를 추는데, 저 혼자 박자 놓쳐서 계속 실수했어요. 남들 일어날 때 앉고, 남들 앉을 때 서고. 근데 관객들은 제가 주인공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망나니가 칼춤 추는 장면에선 나무로 만든 칼 머리가 날아간 적도 있었네요. 물론 공연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끝냈지만."

그가 "제 젊은 시절을 다 바친 곳"이라며 그렇게 애정을 쏟았던 탈춤패는 그러나 2009년 문을 닫았다. 독재정권 말기인 1978년에 창립해 3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운동권 성격을 띤 탓에 점차 신입생이 없어지면서 결국 폐쇄된 것이다.

그는 "졸업한 선배들이 다시 다 모여서 30주년 탈춤극을 추기도 하고, 신입생 모집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봤는데도 사람이 안 왔다"며 "후배들이 없다는 생각에, 더는 탈춤패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마음 아프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당시 함께 활동했던 "평생 친구들"은 여전히 주기적으로 따로 모인다고.

▲ 지난 2008년, 고려대학교 마당극 동아리 '탈사랑 우리' 30주년 기념공연을 한 뒤 친척 조카와 함께 찍은 사진. 탈춤패는 1978년 창립돼 3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점차 신입생이 없어지면서 결국 폐쇄됐다고 한다. ⓒ 채이배의원


누룽지 맛있게 굽는 '이배 쌤'...학생 땐 연애 한 번 못해본 '모태솔로'

'20대 채이배'를 말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모태솔로'다. 그는 대학생 때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며 "나이 들고 만나서 다 누굴 좋아했는지 털어놨는데, 그때도 절 좋아했다는 후배가 한 명도 없었다. 물어보니 제가 자꾸 가르치려고만 들었다더라"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 때 전 딱딱하고 재미가 없었다"는 자기 고백이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들은 있었는데…. 왜인지 한 번도 연애에 성공해본 적은 없어요. 고백 받아본 적요? 한 번도 없습니다. 연애도 결국 저 자신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돌아보니 그걸 놓친 게 제일 후회되더라고요. 그래서 후배들 만날 때마다 꼭 연애하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현재 부인은 그의 '첫사랑'이다. 대학교 때 만나 쫓아다녔지만 받아주질 않아 포기했다가 대학 졸업 뒤 다시 만났다. 회계사를 준비하던 그가 두 살 어린 그녀에게 "이젠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말한 게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을 지낸 장하성 교수(현 청와대 정책실장)를 만난 재벌개혁에 눈을 돌리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 남소연


채 의원의 숨겨진 또 다른 과거에는 '야학'도 있다. 종로 혜화동 소재,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야학 '씨알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활동한 경력이 그것이다. 2008년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던 중 아는 선배가 교사를 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원한 게 인연이 됐다. 2010년 5월께부터, 국회에 들어오기 직전인 2015년 가을까지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급여는 전혀 없었고 주로 후원으로 야학을 운영했다. 학생들이 자기 삶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걸 볼 때 제일 뿌듯했다"는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 야학을 졸업해 최근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난 한 20대 학생을 꼽았다.

채 의원은 "공사현장에서 막일을 하며 돈을 모으더니, 디자인 대학에 합격해 유학을 간다더라. 그 친구를 보며 야학이란 게 점수 뿐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채 의원이 나중에 보내온 A4용지 20장 분량 '2014년 씨알학교 소식지'에는 2014년 '고1 수학: 채이배 선생님'이 써 있었다. 여기엔 졸업하는 한 고3학생이 "그간 이배쌤께 제일 신세를 졌다"며 "언젠가 저도 씨알학교에 꼭 돌아와 공헌하고 싶다"고 쓴 글도 실려 있었다.

당시 소식지에는 '이배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도 있다. 한 남학생은 야학에서 제주도로 3박4일 수학여행을 다녀온 소감을 쓰면서 "이배 쌤이 가져오신 누룽지를 먹었는데 정말 구수하고 맛있었다"고 말했다. 현재도 운영 중인 '씨알학교(씨알배움터)는 공부 외에도 봄 운동회, 농촌봉사활동, 여름수련회, 졸업여행 등을 함께 다닌다고 한다.

▲ 야학교사로 활동하던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비례대표)가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앞줄 아래) ⓒ 채이배의원


한편 행정학과로 입학했지만 자신이 행정학보다는 경영학에, 명확한 값이 있는 '숫자'를 좋아한다는 점을 깨달은 그는 결국 회계사로 시작해 재벌개혁·소액주주 운동을 이끄는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참여연대에서 시작한 경제개혁연구소 등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 2016년 4월,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초선)으로 당선됐다.

그는 "학생 때 제가 정치인이 되리라곤 한 번도 생각 못 해봤다"며 "다소 갑작스러웠지만, 국회의원이 되면 제가 하고 싶었던 경제·재벌개혁을 더 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 정무위 소속인 그는 청년 연령을 확대하는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 대학 입학금을 폐지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 등 활발한 입법 활동 중이다. 그의 다음 꿈은 무엇일까.

"이번 정부에서 재벌·경제 개혁은 상당 부분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찌 보면 저는 장하성 교수가 잘 만들어 놓은 개혁 운동에, 제자이자 동지로서 지금껏 올라타고 온 거죠. 장 교수가 재벌개혁 외치며 활발히 활동했던 나이가 딱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그런 역할을 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20년을 내다보고 활동을 준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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