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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에 육체노동,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

['노가다'전] 청년목수 박정훈씨 이야기

등록|2017.08.28 19:54 수정|2017.08.30 09:46
도색공이었던 아버지가 현장에서 사다리를 타다 낙상을 했다. 허리에 인공뼈를 넣었다. 5급 장애 진단을 받았다. 집안 경제도 주저앉았다. 이어진 불운은 가족들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붙잡고 긴 세월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그 일이 있기 몇 해 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동안 모은 돈과 은행 빚에 친척들 돈까지 무리하게 끌어들여 10층짜리 건물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IMF 사태가 터졌다. 건물 임대에 직격탄을 맞았다. 무리해서라도 건물을 지어 올렸던 계산은 허무맹랑한 숫자 놀음이 되었다. 빚에 붙은, 계산을 빗나간 이자는 매 달 목을 죄었다. 1998년 말, 고등학교 2학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삼촌이 남동생 하나에 장남인 그를 불러 앉혔다. 어머니가 절박한 울음 끝에 말을 이었다.

"공부 그만두고 일을 해라. 이자를 갚아야 한다."

열여덟 살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박정훈씨의 삶을 바꾼 말이었다.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성적이었다. 공부가 좋았고 공부를 하고 싶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에서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 졸업 무렵 지역에서 명문으로 불리는 학교에서 따로 연락을 해와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을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위인전에 나오는 모든 훌륭한 사람들에겐 역경이 있었다. 그들처럼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자식으로서 부모를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런 당연한 마음 뒤에 더 솔직한 깊은 마음이 있었다.

정훈씨는 공부를 멈추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의 강권으로 등을 떠밀리는 느낌이었다. 아들에게 학교를 포기하고 일을 나가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했던 어머니는 빚더미 건물 일층에 만든 작은 가게 속, 자기 세계에 집착했다. 고등학생 아들에게 공부를 포기하고 노동을 종용했던 어머니는 자신의 노동은 생활비도 벌지 못하는 작은 가게 안에 가두었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학교 측의 배려로 학비를 면제 받았고, 학교를 다니면서 노동을 시작했다. 학적은 유지했지만 공부는 포기했다.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할 만큼 부모님은 배움이 짧았다. 친척들도 대개는 그랬다. 아버지가 평생을 도색공으로 살았던 것처럼 삼촌도 고모부도 '철근공' 이었다. 몸을 써서 일할 곳은 어디에나 있었다. 학교를 다니는 평일 야간에는 아버지 친구 분이 하는 쓰레기 분리수거 일을 했고, 주말에는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했다. 학교에 가면 자는 게 일이었다. 일해서 번 돈은 모두 허울뿐인, 건물 명의를 지키는 이자를 갚는 데 쓰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 부산 아파트 건설현장에선 박정훈씨. ⓒ 김지영


수험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고3 시절을 노동으로 보냈다. 그런데도 성적은 십위 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전에 한 공부의 양이 많았다는 걸 알았다. 무엇을 하든 한 가지를 꾸준하게 오래 하면 보상이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어머니는 그가 학교를 졸업하면 노동을 더 많이 하고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길 원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정훈씨는 말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 마음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요. 고3인데...남들은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기간에 하고 싶은 대로 공부하고 시험 보잖아요. 그 때 저는 학교 끝나면 쓰레기 하수처리장으로 가서 분리수거 일을 하고, 주말에는 노가다 했어요. 고3인데...겨우 열아홉 살인데..."

당연히 대학은 갈 수 있는 형편도 그런 상황도 아닌 줄 알았지만 그래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성적은 부산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아야 갈 수 있는 학교와 학과의 커트라인을 넘었다. 그러나 대학은 생각지도 못했다. 간다 해도 돈을 벌어 이자를 갚아나가야 할 책임은 여전히 장남인 그의 몫이었다. 그래도 그냥 포기해버릴 수는 없었다.

D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입학금 등록금 무료에 4년 전액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어 가능했다. 2000년, 스무 살이었다. 건물에 붙은 대출 원금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갚아야 할 매 달 500만 원의 이자도 그대로였다.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는 300만 원이었다. 모자란 200만 원이 정훈씨와 가족들의 삶을 매 달 짓눌렀다. 겨우 그 돈을 마련해서 은행에 주고 나면 책 살 돈은 물론이고 차비도 밥값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난은 지독하고 끈질겼다.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은 사치였다.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하고, 주말 내내 다시 일하는 노곤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일 년 뒤 공군에 입대했다. 군에 있는 동안 삶을 짓누르던 대출금 이자와 가난을 피할 수 있었다. 2003년 제대를 했다.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한 건 없었다. 아버지의 병세도, 빚더미 건물도 따라서 매 달 갚아 나가야 할 이자도 그대로였다. 오히려 그가 없는 사이 빚은 더 불어 있었다. 지독한 가난은 여전히 그와 가족들의 삶 구석구석을 옥죄고 있었지만 공부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는 싫었다.

일 년 동안 낮에 공부하고 밤과 주말에 일하는 빈틈없는 일상을 보내다 2005년 대학에 복학했다.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서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외국대학에 단기유학을 보내주는 누리사업에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시험을 봤고 합격을 했다. 졸업반 위주의 합격생들 중 유일한 2학년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육 개월 공부하고 중국 선전대학에서 다시 육 개월을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왕복 항공비와 체류비용 일체가 지원이 되는, 공부하기만을 원했던 그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거기에 학교에서 별도로 장학금도 제공 되었다. 항공권 구입과 유학준비를 위해 돈은 곧 입금되었다. 천만 원이 넘는 큰 돈 이었다. 그 돈은 학생신분인 그가 아닌 아버지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부모님은 정훈씨와 한마디 상의 없이 그 돈을 빚 갚는데 써버렸다. 부지런히 당겨지던 그가 바라던 미래가 뚝 하고 끊어지면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가장 컸던 일화죠. 지금도 그 원망과 충격이 제게 남아 있어요. 물론 부모님은 나름대로 그래야만 했던 사정이 있었겠죠. 하지만 그 돈은 학교에서 제게 공부하라고 준 돈이잖아요. 학생신분이라 제게 직접 주지 않고 부모님 통장으로 입금한 거였는데...상의 한 번 없이 그랬다는 게 솔직히 지금도 이해되지 않아요."

학교에 사정을 했다. 미국 일정을 포기하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 어렵게 중국 선전대학 팀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6개월 동안 중국어 공부만 했다. 함께 간 4학년 선배들이 여기저기 중국 땅을 여행할 때 숙소에 혼자 남아 공부를 했다. 돈도 없었지만 그동안 하고 싶어도 마음껏 할 수 없었던 공부였다. 원 없이 했고 정말, 열심히 했다. 6개월이 다 되어갈 때 기본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약속된 기한이 다 되어 모두들 한국행 비행기를 오를 때 그는 중국에 남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이 벌려 놓은 빚 감당을 다시 되풀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언제 헤어 나올지 알 수 없는 가난의 구렁텅이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현지 한인회의 추천을 받아 중국 선전에 본사를 둔 홍콩법인의 물류회사에 취업했다. 대학 2학년 복학생이었던 2005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이었다.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선사였다. 상사들과는 영어로, 직원들끼리는 중국어로, 거래처인 한국 사람들과는 모국어로 대화를 했다. 회사에서 그를 뽑은 이유였다. 회사로부터 아파트와 가정부와 운전기사가 딸린 자동차까지 제공되었다. 만약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이대로만 중국에 적응하고 경력을 쌓다 보면 더 좋은 미래가 열릴 것은 분명한 이치였다. 그는 거기 그대로 오랫동안 남았어야 했다고 훗날 그를 잘 하는 사람들은 말을 했다. 깊은 아쉬움의 한숨과 함께.

1년 6개월. 머나먼 타국에서 젊은 나이에 누렸던 그의 황금기였다. 그가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던 건 이번에도 역시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한국의 가족들 사정이 너무 비참하고 힘들다고 했다. 도와 달라는 어머니의 말을 그는 그 때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게 그의 약점이었다. 가면 안 좋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 그는 또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어머니와는 항상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어머니 앞에 포기는 그에게 숙명이었다. 비록 또 다시 숙명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이번에 돌아가면 대학공부를 마치고 대기업에 취업하겠다는 선명한 목표를 가졌다. 2007년, 스물일곱의 나이였다.

굴곡진 인생이 그에게 허용한 시간은 '딱 일년'

▲ 인터뷰를 마치고 촬영했다. ⓒ 김지영


짧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모은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귀국한 그는 대학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 처음 입학 때 받았던 4년 장학생 신분은 몇 해 전 중국 유학이 끝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던 그 날 상실되었다. 정훈씨는 귀국하면서 가져온 돈을 밑천으로 졸업하고 취업하는 기간 동안 적게 일하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귀국 후 일 년 동안은 그의 바람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굴곡진 인생이 그에게 허용한 시간이었다.

2008년,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던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병세가 악화된 지 3개월 만이었다. 음식점으로 업종을 바꾸었던 어머니는 그 3개월 동안 딱 하루 병원을 찾았다. 아버지가 죽자 그의 꿈도 무너졌다. 어머니가 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은행이자가 두 달이 밀렸다. 다음 달이면 건물에 경매가 붙고 날아가게 생겼다. 지금 중요한 게 네 공부가 아니다. 당장 건물은 살려놓고 봐야 하고 가족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 우선은 이자를 갚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게 급선무다."

어머니는 십년 전 그 때, 그러니까 아버지가 현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앉혀 놓고 울면서 했던 말을 십년이 지난 후 그대로 되풀이했다. 절박한 울음과 함께 아들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그래서 스스로 만들어 나갈 미래를 포기해 주기를 호소했다.

"그 때 제가 또 포기했어요. 물론 그 선택이 안 좋은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군대도 갔다 오고 짧지만 외국에서 회사생활도 하고 나이도 아주 적은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 말대로 따르는 게 저에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 지는 분명하게 알았어요. 알지만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저에겐 언제나 큰 약점이었어요. 그냥 그렇게 살아왔어요. 알지만 포기하면서."

대학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학부를 야간으로 옮겨 낮에 일 하고 밤에 수업을 들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포기되었던 좌절감 때문인지 공부도 되지 않았고 수업은 출석만 건성으로 하는 식의 생활이 이어졌다. 일도 돈을 쫓아 강도가 세고 험한 일을 찾아 했지만 기술 없는 막노동으로는 한 달 2백만 원이라는 이자 돈을 맞출 수가 없었다.

2009년 생활정보신문을 보고 성인오락실에 취업했다. 돈은 넉넉히 받았지만 그것도 육 개월 만에 단속 나온 경찰을 피해 손님들 틈에 끼어 오락실을 나서면서 그 길로 그만 두었다.

2010년 대학을 십 년 만에 졸업했다. 나이 서른이었다. 친구 아버지의 권유로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모텔에 취업해 카운터에서 일하며 공부를 했다. 그 해 일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불운이 따랐다. 모텔 일을 쉬는 날이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용역 일을 나갔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필기시험 합격 후 이어진 체력장 시험에서 탈락했다.

대학까지 졸업한 마당에 계속 용역 일이나 오락실 혹은 모텔 같은 곳에서 일 할 수는 없었다. 동생도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 직원으로 취업했다. 덕분에 매달 혼자 책임졌던 대출 이자를 동생이 함께 부담해 주었다. 그도 이젠 어엿한 직장인으로 살고 싶었다. 경찰공무원 떨어지고 얼마 안 된 시점에 정훈씨가 졸업한 대학 병원행정직 채용공고가 떴다.

대학을 졸업한 그 해 그는 대학병원 취업에 성공했고 진단검사의학실 행정지원과로 발령을 받았다.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졌던 야심대로라면 성에 차지 않은 직장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죽고 어머니의 눈물로 공부를 포기하고 희망을 버렸던 2년 전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 비로소 직장다운 직장이었다.

2011년 병원에 취업하고 일 년 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었을 때, 그동안 그와 가족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옥죄고 있던 건물이 드디어 팔렸다. 말하자면 경매로 넘어간 게 아니라 팔린 것이다. 팔면서 받은 뭉칫돈으로 덩치 큰 대출금부터 갚았다. 그래도 여전히 빚은 남았지만 오랜 세월 그와 가족들의 삶을 비틀리게 했던 이자 돈은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지옥 같은 생활이었어요. 건물 옥상에 가건물을 지어 살았는데 신고가 들어와 철거 되면서 일층 어머니 가게 안 창고에서 네 식구가 먹고 산 세월도 몇 년이었어요. 그 이백 만원 이자 때문에 무려 십일 년이라는 제 인생이 엇나갔고요. 그런 건물이 팔려나가고 큰 대출금을 갚고 나니 제 기분이 어땠겠어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기쁘고 홀가분했죠."

하지만 함께 살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여전했다. 문제는 항상 돈이었다. 건물을 팔았어도 갚아야 할 빚은 남았고 어머니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다. 건물 가게에서 나온 어머니는 식당을 차렸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그전 가게에서처럼 어머니의 관심은 장사가 아니라 식당이라는 자기만의 세계였다. 그나마 직장생활을 하는 동생이 있어 부담은 줄었지만 장남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주어진 몫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사정을 아는 친척들도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그의 인생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2013년, 그는 어머니 집을 나와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어머니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젠 그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천국이었어요. 생활비는 계속 보내드렸지만 어머니 없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저 만의 일상을 살고 저 만의 미래를 꿈꾸게 되었어요."

직장 생활은 처음에는 좋았다. 그에겐 제대로 된 첫 직장이었고 임시 계약직에서 곧 안정적인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도 되었다. 언젠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공채정규직 채용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의사들을 돕는 행정지원 업무도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젊은 청년인 그에게 여직원이 많은 근무 환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입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의 눈에 직장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의사중심으로 서열화 되어 있는 병원 구조 속에서 여직원들로부터 관행적으로 안마나 지압을 받는 의사들의 행태가 눈에 들어 왔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직원들은 수치를 참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병원 내 근무환경은 그가 잘 알고 있는 근로기준법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었다.

휴식으로 보장 받아야 할 휴게시간과 식사시간이 함부로 무시 되었다. 늘 부족한 상태인 업무대비 근무인원에 대한 문제를 일상적인 야근으로 해결하면서도 비용은 전혀 지불되지 않았다. 모든 게 그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관행이었다. 그 관행이란 것들이 대개는 병원의 이익에는 충실했지만 직원들에게는 불의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다른 위법한 관행들은 그 판단을 따지는 게 모호하거나 복잡한 시시비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상으로 벌어지는 야근이라는 이름의 연장근무에 대한 지급의무 위반은 너무 명백했고 증거도 분명했다.

서른 다섯, 다시 거리에 섰다

2014년 그는 증거를 모아 병원에 문제제기 했다. 병원 문을 나오기까지 일 년 동안 그는 하던 업무에서 배제됐고, 직장생활을 오래 해야 하는 다른 직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나중에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말 한마디 못해 본 날도 헤아릴 수 없다. 같은 직원 신분이었지만 떠남이 예비된 자와 어떻게든 머물러야 하는 사람의 차이가 불러 온 안타까움이었다. 받지 못했던 초과 근무 수당과 응당 받아야 하는 퇴직금까지 받아내고 병원을 그만 두었다. 다시 거리에 섰다. 2015년, 서른다섯이었다.

일반 기업에 들어가기엔 늦은 나이였다. 재취업에 유리한 경력도 없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는 와중이었다. 축구를 좋아해서 동호회에 가입하고 운동을 해왔는데 그 동호회 선배들 사이에 스포츠 베팅이 유행했다.

직장은 사라지고 아직 갚아야 할 부모님의 빚은 일억 가까이 남아 있었다. 동생과 함께 갚아오고 있었지만 장남인 그의 몫이 더 컸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도 빚 탕감에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 전에는 도박이나 복권 따위 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몇 번 스포츠 베팅을 했는데 의외로 큰돈이 걸려들었다. 그의 일상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라지지 않는 은행 빚이 어쩌면 빨리 갚아질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다 한두 번이 일주일에 서너 번이 되었다가 매일이 됐고, 만 원 이만 원이 백만 원 이백 만원이 되었다가 이천만 원까지 됐다. 처음에는 돈이 벌렸다. 할 수 있는 모든 종목으로 손을 뻗쳤다. 축구, 농구, 배구, 야구, 하키까지. 자연스럽게 공무원 시험은 없던 걸로 되었다. 나중에는 단타 주식하는 것과 진배없는 피폐한 일상이 되었다. 일 년 반을 그렇게 살면서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종일 인터넷 카페와 단톡방을 들락거리며 정보를 파악하고 베팅을 했다.

가지고 있던 돈이 모두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그가 인터넷 카페와 단톡방에서 보았던 정보란 것들이 결국은 그가 가진 돈을 모두 베팅할 때까지 그를 붙잡았던 미끼였다는 것을. 하필 그 즈음에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다 발목이 부러지는 큰 부상까지 입었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가 주저앉아 있다고 갚아야 할 빚과 이자가 친절하게 기다려 주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든 주저앉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나야 했다. 부러진 다리뼈가 맞물려가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도박으로 잃으면서 깊게 베인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쯤이었다. 아픈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려면 온전하게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네 목욕탕을 다니면서 알게 된, 목수일 하는 형님에게 부탁을 했고 그 팀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2016년 8월 20일이었다. 일은 힘들었다. 기술자들에게 필요한 자재를 꾸준히 날라야 했는데, 그 자재가 하나같이 무겁고 또 무거운 것들뿐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하루 종일 들고 나르고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전 사행성 도박에 빠져 살았던 죗값을 단단하게 받는 거라 스스로 위로했다.

일이 힘든 만큼 꾸준하고 성실하게 죗값을 받았다. 물리적인 노동 강도는 여전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육체노동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그 전에 다른 일을 할 때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잡역부로 일을 할 때도, 분리수거 일을 할 때도, 병원 직원으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무력했고, 자존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일을 할 수 없이 내가 대신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새벽 거리를 나서 현장에서 일을 하다 때 되면 휴식했고, 때 되면 밥을 먹고 때 되면 정확하게 일이 끝났다. 아직 이른 오후 집에 돌아와 샤워할 때의 뿌듯함과 상쾌함을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매일 노동은 고단했지만 어쩌면 매일 고단했기에 매일 뿌듯했고 매일 상쾌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매일 새벽기상에 대한 부담은 쓸데없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쓸데없는 생각도 지워버렸다. 삶이 단순해지고 건강해졌다.

보상도 다른 일에 비하면 적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 육체노동을 하는 이는 박정훈씨가 유일하다. 아직 기술을 배우는 조공신분이지만 다른 사무직 일을 하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그는 고소득자다. 그럼에도 아직 그에게는 올라가야 할 일당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저는 여기에서 미래를 보았어요. 같이 일 하는 어르신들은 처음에 제가 노가다 할 인물이 못된다고 했어요. 그 분들 눈에는 임시방편으로 일 하는 가방 줄 긴 젊은 친구로 보였겠죠.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하면서 깨달았다고 했잖아요. 무언가 하나를 성실하게 오래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걸 알았다고요. 이 일이 제게 맞는 일이 아니었으면 자존감도 낮아지고 마지못해 일상을 보내고 다른 일거리를 기웃거렸을 거예요. 하지만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제가 당당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요즘처럼 하루를 꽉 차게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매일 노동하고 집에 돌아 와 샤워하고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보다 잠이 들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 일상이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노동현장에 들어간 지 일 년이 되었다. 아직 스스로 그리는 그의 미래는 확고하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말해요. 진심으로요. 굉장히 만족해요. 현장에서는 일에 집중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고나 부상으로 이어지죠. 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다음 날을 위해 몸을 챙겨야 해요. 스스로 몸을 아껴야 하죠. 돈도 제가 하루 종일 몸을 써서 땀 흘려 벌었잖아요. 그런 돈은 함부로 써지지 않아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몸도 생각도 그리고 생활까지도 단순해지고 건강해지는 걸 느껴요."

"십년 뒤 제 미래요? 그 때가 되면 남은 빚도 다 갚고 당당한 기술을 가진 목수가 되어 있겠죠. 어쩌면 가정도 이루었을 거고요. 그냥 좋은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육체노동이 제 미래예요."

젊은 사람이 가장 기피하는 3D 업종의 대표주자 격인 건설현장에서 목수로 일하는 박정훈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버는 돈 중 일부로 빚을 갚고 어머니 생활비를 계속 보내고 있다. 그리고 매달 백 만 원이 넘는 돈을 적금에 쏟아 붓고 있다. 동 시대 또래들과 비교하면 형용할 수 없는 굴곡진 인생을 보낸 그에게 지금, 노동은 곧 그의 미래였다.

2017년, 그의 나이 아직 서른일곱이다.

▲ 노동이 곧 자신의 미래라고 확신하는 박정훈씨.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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