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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 나온 여군 대위, 군에 맞서다

[인권 이즈 커밍③] 방대위에서 방간사로... 5년 군복무 후 5개월 차 인권활동가 방혜린

등록|2017.09.05 10:11 수정|2017.09.08 10:26
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 군인권센터 방예린 활동가 ⓒ 이희훈


'감봉 3개월에 처함'

통지서에 쓰인 내용은 간단했다. 잘못했으니 처벌한다는 거였다. 감봉 3개월은 경징계 중 최대처분이었다. 징계 수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감찰실이 문제 삼은 '정치적 중립을 해하는 행위'라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대위였던 방혜린씨가 '제대하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먹은 건 이 때문이다. 1년 뒤, 혜린씨는 5년간의 군 생활을 정리했다.

시작은 SNS였다. 해군 해병대사령부 해병 2사단 감찰실은 혜린씨가 올린 2015년 9월 글을 문제 삼았다. 민원이 들어왔다고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가 한 발언을 두고 혜린씨가 쓴 글 때문이었다.

당시 박근령씨는 한국이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로 일본에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 의견을 밝혔다. "(일본의) 사과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발언한 것이다. 혜린씨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버지고 딸이고 아들이고 다 똑같다'는 짧은 글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감찰실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모욕했다며 이 글이 '상관모욕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감찰실에 민원을 넣은 5~6명은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 사용자였다. 이들은 실시간으로 일베 게시판에 자신들의 민원을 인증했다. 일베 사용자들이 처음에 혜린씨를 찾아낸 건 혜린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쓴 글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사회에 드러난 여성차별적인 시선을 비판하며 '한남충'(한국 남성을 벌레에 비유한 신조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후 혜린씨는 일베에서 메갈('메갈리아'의 준말)로 지목 당했다. 일베는 전체공개였던 혜린씨의 SNS를 찾아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대위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혜린씨의 신상을 털었다.

일베는 행동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공익신고'였다. 혜린씨의 SNS를 캡처해 해군에 민원을 넣었다. 신고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기무사, 청와대 신문고에도 민원을 넣자'고 서로를 부추겼다. 감찰실은 재빠르게 응답했다.

▲ 군인권센터 방혜린 활동가 ⓒ 이희훈


"민원은 감찰실장과 사단장의 성향에 따라 처리 속도나 결과가 달라져요. 어떤 민원은 대충하고 어떤 민원은 진지하게 접근하거든요. 제 건은 빠르고 진지하게 처리된 편이죠."

징계를 받기 전, 왜 자꾸 정치적인 글을 쓰냐고 주의를 주던 헌병대가 떠올랐다. 어떤 정치인을 지목한 것도 정당을 말한 적도 없는데, 헌병대와 감찰반은 모든 발언을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감찰반이 일베의 민원을 얼마나 반겼을까, 혜린씨는 씁쓸했다.

'여생도'가 이유라면, 그건 틀린거였다

사실 혜린씨는 명예 남성이었다. 해군사관학교 여생도 시절을 돌이켜보며 그는 자신을 "남성적 시각에 길든 여성인 명예남성"이라 표현했다. 남성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그렇게 됐나, 생각한 적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군사관학교의 여생도는 전체 모집정원의 10%에 불과했다. 규정이 그랬다. 08학번인 혜린씨의 입학동기는 143명, 그 가운데 여생도는 13명이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성차별은 일상적이었다. 사관학교에는 동기생 평가제도가 있었다. 서로를 평가해 순위를 매기는 제도다. 꼴등을 포함한 하위권은 당연하다는 듯이 여생도의 몫이었다.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 덜 하는지 꼼꼼히 따져 받은 점수가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듯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여생도는 남생도의 순위권 바깥에 존재했다.

사관학교 생활 중 하나인 '근무제'도 그랬다. 근무제는 사관생도가 학교생활을 하며 한 가지씩 직책을 맡는 것을 말한다. 보통 지휘나 군기 담당은 남생도가 맡았다. 여생도는 고정된 직책이 있었다. 인사나 청소, 보급 업무였다. 누가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규율로 정해진 건 없었지만 여생도의 업무는 한결같았다. 학내 만찬행사가 있을 경우 누구 옆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정해지기도 했다. 동료가 아닌 '여성'의 역할을 맡고 있는 기분이었다.

▲ 군인권센터 방혜린 활동가 ⓒ 이희훈


"여성인 거 티 내지 마라."
"쉽게 아프다고 말 하고 다니지 마라."
"생리 너만 하냐. 유난 떨지 마라."

자신이 차별을 겪었으면서도 혜린씨 역시 후배에게 차별을 대물림 했다. 여생도를 모아 집합을 하면 늘 세 가지를 강조했다. 여성을 드러내지 않아야 군복무 생활이 편할 거라는 그 나름의 조언이었다. 그 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여성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생도와 동등하게 훈련을 받으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치우고 닦고 따르고 꽃처럼 피어 있어야 하는 것이 여생도의 몫이라면, 그건 틀린 거였다.

"입은 닫아라"

군대는 꾸준히 일방적이었다. 2008년이었다. 국방부가 23권의 책을 군내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그 차단대책을 논의했던 때다.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책장의 책 몇 권이 보이지 않았다. 옷장 정리, 책장정리를 빈틈없이 했기에 책 몇 권이 비면 바로 티가 났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체게바라 평전>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항의할 수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입 닫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군대는 세월호 배지와 리본 그 어느 것도 달지 못하게 했다. 리본을 달면 '정치적 중립 위반'이 된다고 했다. 세월호 배지 모양과 비슷한 배지는 그 어떤 거라도 달 수 없었다. 지휘관은 "그런 거 달면 정치적 중립 위반, 군인 복무규율에 어긋나는 것 아시죠?"라 재차 강조했다.

불편하고 찜찜했지만, 실체를 몰랐다. 답을 찾은 건 4년의 사관학교 생활 후 해병대에 복무하면서부터다. 경상남도 진해에만 있다가 해병대에 복무하며 김포로 발령을 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서울을 오갈 수 있었다. 읽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무엇보다 누군가 주입한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이 간절했다. 친구들과 시사 이슈를 갖고 토론하고 글 쓰는 모임을 만들었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만나 열심히 나누고 썼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인가, 경제적 M&A인가',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 주제는 다양했다. 생각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었다. 사관생도 시절,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논문을 썼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상태에서 해로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중국의 팽창을 견제할 해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논문공모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평화는 낯설고 국익은 중요한 시절이었다. 제주도 행군을 갔을 때, 강정마을 사람들이 쫓아온 적이 있었다. 해군사관생도들의 '해양정화활동'이었을 뿐인데, 마을 사람들이 군인을 보고 긴장한 것이다. 사관생도 몇몇이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인지 돌인지를 던졌다며 투덜거렸다. 이게 이렇게 반대할 일인가, 참 이상했다. 국익이 중요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는데 그 단어가 참 낯설었다.

2년이 지나서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국익은 무엇인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는 공동체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가. 안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를 고민했다. 덩달아 사관학교에서 찜찜했던 일들의 실마리도 찾았다.

▲ 군인권센터 방혜린 활동가 ⓒ 이희훈


'내 차례가 왔구나'

"내가 예민해서 불편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인터넷에서 한국 남성들의 여성 혐오적 행태를 꼬집는 움직임이 나타났어요.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토해냈죠. 사관학교에서 여생도에게 쏟아내던 차별과 불편한 시선, 내가 이상했던 게 아니었어요."

해병대에서 소위로 복무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는 많고 계급이 아래인 부사관이 여군들의 몸매를 품평했다. 혜린씨의 허벅지도 대상이 됐다. 살이 쪘는지 묻고 다리가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들끼리 야동을 공유하는지 시시덕거리며 들으라는 듯 그 이야기를 나눴다.

행동도 있었다. 부서 사람들과 회식 겸 휴양을 갔을 때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 큰 방에서 잤다. 느낌이 이상해 눈을 떠보니 옷이 풀어져 있었다. 부사관의 짓이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부사관을 붙들고 30분을 말했다. 이러지 말라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다음 날, 부사관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했다. 혜린씨는 간밤의 일에도 다음 날 그의 행동에도 놀라지 않았다. 내 차례가 왔구나, 다들 겪는 일을 나도 겪었다고 생각했다.

"여군에게 성폭행은 너무 일상이에요. 그래서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어요. 부사관이 그 정도에서 멈췄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들 당하는 일을 나 역시 당했구나 싶었어요. 복무 중에 언젠가는 한 번,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혜린씨는 성폭력 사실을 군에 알리지 않았다. 상관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끝날지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겪은 군대는 성폭력 사건이 나면 여군을 부르는 곳이었다. 피해자에게 조심하라는 교육을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데 모아 성교육을 하기도 했다. 밝힐 이유가 없었다.

다만 궁금한 건 있었다. 당시 그 방에는 7명이 있었다. 남군도 여군도 모두 있었다. 부사관이 혜린씨 옷을 벗기는 동안 혜린씨가 30여 분을 그만하자고 말하는 동안, 정말 모두 잠들어 있었던 걸까.

▲ "숨기기는 참 쉬운데 진실을 밝혀내는 건 어렵다는 걸 배우고 있어요" ⓒ 이희훈


'더는 도망가지 않겠다'

혜린씨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남 일이라는 듯이 지켜보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또 하나의 계기였다. 사람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토해냈다. 성추행과 시선폭력, 강간과 성차별. 그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피해 여성이 '나 대신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린씨 역시 언제든 피해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다.

주말이면 광화문광장에 나갔다. 촛불을 들었고 소리내 외쳤다. 낙태죄 폐지를 내세운 검은시위에도 목소리를 더했다. 더 이상 대통령이 군통수권자라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부당한 대우들, 술상무로 자리를 지켜야 했던 군 생활, 몸을 사리고 스스로 검열해야 했던 시간을 거쳐 혜린씨만의 발화를 시작했다.

지난 2월 제대하고 군인권센터에서 일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인권활동가라 말하기 민망할 때도 있다. 군과 센터는 참 달랐다. 군대는 숨길 수 있으면 모든 걸 다 숨기려 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군인권센터는 정 반대다.

"군대는 설사 5초만 숨길 수 있다고 해도 그 5초라도 숨기고 싶어 하는 곳이에요. 제가 겪은 군은 그랬어요. 그런데 시민사회활동가는 그 5초의 진실을 위해 일을 하죠. 억울한 사람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 온 힘을 쏟으면서요. 숨기기는 참 쉬운데 진실을 밝혀내는 건 어렵다는 걸 배우고 있어요."

혜린씨는 현재 군인권센터에서 간사로 일한다. 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상담을 하고 여군인권을 담당하고 있다. 그가 지나온 경험 덕분에 여군이 군인권센터로 전화 하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해볼 만한 것들은 다 했고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이라는 것, 죽기 직전에 겨우 마지막 힘을 낸 전화라는 걸 안다.

▲ 군인권센터 방혜린 활동가 ⓒ 이희훈


"여군이 상담 전화를 한다는 건 남군하고 좀 다른 의미에요.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니까요. 대부분 끝에 몰리지 않는 한 입을 열지 않는데, 여기까지 전화를 했다는 건 정말 마지막이라는 거죠. 대부분은 성폭행 관련 상담이 많아요."

그는 "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도울 수 없을 때 참담한 마음"이라고 했다. 변호사 선임과 병원 치료밖에 할 말이 없을 때, 듣는 것 외에 도리가 없을 때, 여군이 처한 환경과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음이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초를 되새기고 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의 5초. 숨기고 가리기에 급급했던 생활이 아닌 옳은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그 사이 월급은 반 토막이 났고 은행 신용도는 떨어졌다. 밥 잘 사던 선배에서 어느새 밥 얻어먹는 선배가 됐다. 한국사회에서 젊은 여성 인권활동가로 살아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 깨닫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인권 이즈 커밍' 공동기획팀
신나리·신지수·선대식(글), 이희훈(사진), 최유진(편집)

▲ 인권이즈커밍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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