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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박정희에게 항복 선언 받아낸 조선과 동아

5.16 이후 언론 통제 결정판 언론윤리위원회법... 언론 저항에 시행 유보

등록|2017.09.05 09:51 수정|2017.09.05 09:51

▲ KBS 신관에서 찍은 사진.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소재. ⓒ 김종성


9월 4일 0시부터 KBS와 MBC의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기간에 누적된 적폐를 청산하는 게 파업의 목적이다. 방송을 정권의 시녀로 전락시킨 경영진을 퇴진시키고 방송 공정성을 위한 개혁을 관철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9월 4일은 언론인들이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날이다. 정확히 53년 전인 1964년 9월 4일, 언론인들은 박정희에게서 항복을 받아냈다. 5·16 쿠데타 3년 뒤의 서슬 퍼런 정권한테 굴욕감을 안긴 것이다. 

5·16 이후의 언론 통제는 그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민간의 자율심의라는 그럴싸한 외형을 띤 언론 통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귀에 익숙한 각종 윤리위원회도 이때 생겨났다. <대동문화연구> 제75집에 실린 이봉범 동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1960년대 검열체제와 민간검열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민간 자율심의기구인 각종 윤리위원회는 대부분 5·16 후에 발족된다. 1961년 9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출범을 시작으로 1962년 6월 한국방송윤리위원회, 1965년 7월 한국잡지윤리위원회, 1966년 2월 예술문화윤리위원회, 1966년 5월 한국주간신문윤리위원회, 1968년 8월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 1969년 3월 한국도서출판윤리위원회가 순차적으로 설립되었으며, ······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신문·방송·도서출판·문화예술 등 사회문화의 핵심 영역 전반에 윤리위원회 설치가 완비된 가운데 민간 주도의 자율적 규제가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율규제 형식으로 언론·출판을 통제하겠다는 박정희 정권의 발상은 4·19 혁명 직후의 사회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는 4·19 과정에서 언론·출판의 자유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이런 속에서 부작용도 생겨났다. 일부 기자들이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공갈·협박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기자인 척하며 돈을 뜯어내는 유령 기자도 많아졌다. 1961년 2월 23일자 <경향신문>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흔히 세간에서는 4·19는 언론의 4·19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4·19 이후 속출한 각종 유령 신문기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존 기자층에도 공갈과 협박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함은 주지의 사실로 되어 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4·19 이후에는 악덕 기자 및 사이비 기자를 배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박정희 정권이 민간 주도의 언론 규제를 활성화시키고 각종 윤리위원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의 박정희 흉상. ⓒ 김종성


박정희 악법 거부한 경향·대구매일·동아·조선

박 정권이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 중 하나가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이다. 이 법은 형식상으론 민간에 의한 자율적 규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일협정 추진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박 정권은 국민 정서나 협상 조건 등을 고려하지 않고, 한미일 삼각동맹 결성이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휩쓸려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추진했다. 국민들은 굴욕 외교로 규정하고 저항에 나섰다.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고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박 정권이 고안해낸 게 언론윤리위원회법이다. 위의 논문 '1960년대 검열체제와 민간검열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고조된 가운데, 권력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원가(대학가)에 위수령을 발동하는 한편,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제를 재실시하는 동시에, 학원과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학원보호법과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제정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1964년 8월 5일 법률 제1652호로 제정되고 당일부터 시행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제1조에서 "신문·방송 등 언론의 자율적 규제를 강화"하는 게 입법 목적이라고 선언했다.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으로 구성된 언론윤리위원회가 자율적으로 언론을 심의하도록 하겠다는 게 법률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법에는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을 언론윤리위원회에 강제로 가입시키는 규정이 있었다. 자율 규제라는 입법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제2조에서는 이들이 당연히 위원회에 포함되도록 규정했다.

"위원회는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4조의 규정에 의하여 공보부에 등록된 정기간행물의 발행인과 방송법에 의한 방송국의 장을 당연히 회원으로 하여 구성한다."

제3조에 따르면, 위원회를 구성한 신문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들이 추구해야 할 윤리가 있었다. 이들은 이 윤리에 의거해 언론을 심의해야 했다. 그 윤리 속에는 국가안전보장, 인권 존중, 가정생활의 순결,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공중도덕 외에 국가원수의 명예도 있었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신문사나 방송사가 그런 윤리를 위반할 경우에는 제13조에 따라 권고 또는 경고를 하거나 해명·정정·사과 보도문을 내도록 했다. 윤리 위반의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위원회의 결정으로 해당 언론사 발행인이나 사장의 위원회 회원 자격을 정지 또는 제명할 수 있도록 했다.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이 위원회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도록 해놓고, 위원회의 결정으로 이들을 위원회에서 내쫓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원회에서 쫓겨난 발행인이나 사장은 자기 회사에서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발행인·사장은 위원회 회원 자격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 자격을 박탈당하면 발행인·사장의 지위마저 위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행인·사장은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언론 윤리'를 따라야 했다.

이처럼 언론윤리위원회법은 민간 기구인 언론윤리위원회가 신문사나 방송국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명백한 악법이었다. 그래서 언론인들은 법의 철폐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1964년 8월 5일자 <경향신문>은 "비민주적인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대하여 마침내 일선 기자를 포함한 언론인 전원이 직접적인 항쟁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비장하게 보도했다.

언론인들은 박 정권에 대한 압박에 착수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 투쟁위원회'도 결성하고 전국언론인대회도 열었다. 하지만 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언론인들은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를 발족시키며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다. 

박 정권도 대응의 강도를 높여갔다. 언론사 발행인이나 사장들을 직접 겨냥해, 투쟁을 철회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압박을 받고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언론들이 있었다. 경향신문·대구매일과 함께 동아일보·조선일보가 그랬다. 네 신문사는 박 정권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 서울시 광화문광장 동남쪽의 동아일보 사옥. ⓒ 김종성


박정희의 9.4 특별담화... 사실상의 항복 선언

그 네 곳의 신문사를 길들일 목적으로 박정희는 국무회의까지 열었다. 그는 8월 31일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해 네 언론사에 대한 보복 조치를 강구했다. 이 날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보복 조치는 다음과 같다.  

"정부는 64년 8월 31일을 기하여, 합법적 절차에 의해 제정·공포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준수하지 않고 법 시행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는 기관이나 개인에 대해서는 정부가 부여하는 일체의 특혜나 협조를 배제한다."

저항하는 언론사에 대해 정부 차원의 특혜나 협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보복 조치였다. 이 날 국무회의(각의)에서 결정된 세부적 보복 방법에 대해 그 해 9월 1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각의는 이 밖에도 중앙의 각 부처 중 특수한 몇 부처를 제외하고는 동아·경향·조선·매일(대구) 등 4개 지의 구독을 취소하기로 하고, 지방의 각급 행정관서에 대해서는 내무부장관이 조처하도록 하는 동시에, 전국 27만 공무원의 가정에서도 구독을 가능한 한 중단하도록 조처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발표되지는 않았다."

박 정권이 내놓은 보복 조치는 유치했다. 중앙 관청들의 신문 구독을 끊고 공무원들의 구독 취소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이게 유치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기에, 결정만 해놓고 발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은밀히 집행하고자 한 것이다. 

박 정권이 너무 유치하게 행동하자 저항의 강도는 더욱 더 세졌다. 야당과 종교계는 물론이고 재야 지도자인 함석헌·장준하 등도 저항 운동에 가세했다. 각계각층의 300여 명이 자유언론수호연맹을 결성했다. 국제언론인협회(IPI) 알렌 허낼리우스 회장도 박정희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국내외의 강력한 저항에 박정희는 부담을 느꼈다. 이것은 9월 4일의 대통령 특별담화로 이어졌다. 담화에서 박정희는 법을 철폐할 뜻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보복 조치를 철회하겠노라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오늘, 정부가 취한 몇 가지 지나친 조치를 즉각 시정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9월 4일의 특별담화는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담화에서 박정희는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고수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직후부터 자신의 체면을 살리면서 후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래서 나온 게 법률 시행을 유보하는 것이었다. 5일 뒤에 박정희는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령을 제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행령을 만들지 않기로 했으니, 법률을 사실상 철폐한 것이다. 법률 제1652호는 요란하게 제정돼 놓고 흐지부지 사라진 법이 되었다. 언론인들의 단합된 공격 앞에서 이 법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1964년 9월 4일은 언론인들이 박정희 정권을 상대로 언론의 자유를 지켜낸 의미 있는 날이다. 이로부터 53년 뒤인 2017년 9월 4일, KBS·MBC가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청산할 목적으로 총파업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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