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김근태의 마음을 돌린 '3가지 약속'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⑦] 김근태가 의장을 수락하다
최민화의 삼고초려
1983년 6월 말경, 정문화의 제안을 받은 최민화는 부천 역곡에 사는 김근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간 OB모임에서의 논의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새로 건설할 청년단체의 의장이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김근태는 최민화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더니 자신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고,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최민화 당신이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역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최민화는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공개정치운동과 현장민중운동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형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최민화의 진정어린 뚝심에 결국 김근태가 졌다. 한 시간이 넘는 옥신각신 실갱이 끝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고, 의논할 사람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말고 시간을 달라'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최민화는 첫 만남에서 김근태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 걸 보고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2주 뒤 김근태를 다시 만나러 가면서는 김근태의 수락을 받아내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역시 김근태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최민화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형님이 만일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내가 3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첫째, 새 단체의 재정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운영비를 대겠습니다. 둘째, 감옥 갈 일이 있으면 제가 첫 번째로 가게 해주십시오. 몸으로 때우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셋째, 형님이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앞으로 저는 형님을 저의 정치적 얼터너티브(Alternative)로 모시고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3차원의 충성 맹세를 한 것이다. 최민화의 강력한 대시에 김근태의 마음이 움직인 듯 보였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신중했다. 바로 수락 의사를 밝히지 않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7월 중순쯤 최민화가 근무하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박우섭이 찾아왔다. 박우섭은 다짜고짜 따졌다.
"형이 우리 운동권을 말아먹을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우?"
최민화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은 누군가를 새 청년단체 의장으로 추대하려는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최민화는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고 했다.
"잘하면 이상적인 모양새가 될 것 같으니, 조금만 참아라. 2주 후에 다시 와라."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김근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물러날 박우섭이 아니었다. 박우섭의 집요한 물음에 최민화는 지금 김근태와 교섭 중이라고 전말을 고백하고 말았다.
박우섭은 원래 구월동 시절부터 김근태와 자주 만났던 사이라서 김근태의 인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적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잘못되면 1회용 소모품이 될지도 모르는 민청련 의장에, 김근태를 써먹는 것은 좀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김근태를 자주 만나면서도 그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장 문제가 잘 안 풀리고 있는 이때 최민화의 노력이 성사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7월 말, 최민화가 세 번째 김근태를 만나는 날, 김근태는 결국 새로운 청년단체의 의장을 맡을 것을 수락한다. 최민화의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는 눈물 어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근태의 결단
김근태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영달, 조성우, 이해찬, 박계동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청년운동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맞는 거냐, 또 어떻게 만들 거냐, 누가 책임을 질 거냐, 이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복잡한 문제였죠. 탄압은 엄혹하고, 또 그걸 뚫고 만든다고 해도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되고, 또 일부는 책임자를 누구로 할 거냐를 둘러싸고 좀 갈등도 있고, 다른 한편에 무섭기도 하고, 이런 게 다 겹쳐 있었습니다... (중략)... 최민화가 나한테 와서 설득을 하더군요.
그는 내가 선배 그룹이라는 것, 학생운동을 떠난 뒤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그런 내가 대표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일단 '지금은 공개 정치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란 게 대체로 '그게 옳다,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한 사람보고 '당신이 해봐라'라고 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최민화가 와서 권유한 것도 있지만, 그런 상례에 따라서, 말하자면 뒤집어 쓴 거죠."
사실 김근태는 구월동 사람들과의 논의과정에서 이미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생각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최민화가 찾아와서 그를 의장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김근태는 같은 인터뷰에서 민청련 결성을 필요로 한 당시의 정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공개적으로 국민에 다가가지 않고는 정권과 싸우는 깃발이 있다, 싸우는 리더십이 있다는 걸 국민에게 알릴 수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지 한 3년 가까이 되고, 물가를 잡고 경제도 안정돼 있었어요.
전두환의 헤게모니가 확립됐다, 세상도 그렇게 느꼈고, 또 전두환 그룹도 그렇게 느껴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좀 풀어주기 시작했어요. 학생시위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아주 혼내고 그랬는데 덜 혼내는 분위기였어요. 그 기회, 틈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다가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구속돼서 복역하고 나온 청년들이 많이 쌓였어요. 그들은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를 만들고 그랬는데 그런 거 가지고는 정권과 맞설 수 없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 국민들 속에서 유화 국면이 되고, 분위기가 다시 솟는 시점에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거는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책무다. 그래서 민청련이 결성된 거죠."
김근태가 술회한 대로 그는 최민화의 집요한 노력에 '엮인' 것이었다. 그러나 위 진술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엮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근태는 7월 말 세 번째로 최민화가 찾아왔을 때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8월 중순경부터는 OB, YB가 함께 모이는 민청련 결성 준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김근태 의장이 준비론자?
김근태의 의장직 수락으로 공개청년단체의 건설 작업은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고,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OB, YB를 막론하고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것은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환영했다. 노동현장 쪽의 일부 사람만이 김근태의 공개운동으로의 진출을 소영웅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이들은 당면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협소한 시각 즉, '준비론'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자들 사이에는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논쟁의 결과 대체로 이것은 운동 영역의 문제일 뿐,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노동현장운동을 강조하는 것을,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 현재는 투쟁을 자제하는 준비론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김근태가 '준비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근태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었고 현장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준비론은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것은 오래전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부터 논쟁이 되어왔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략이나 원칙에 있어서의 준비론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전술적으로 준비를 하고 잘 갖춰야 한다, 이런 얘기는 맞지만, 원칙이나 근본에 있어서 준비론, 이런 것은 인간의 약한 면을 반영한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개정치투쟁이냐 노동현장운동이냐 구분하는 것은 형태적인 것일 뿐, 그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태도와 원칙에서 보면 군사독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창립준비모임과 기반 조직 건설
김근태가 전면에 나서면서 8월 중순부터는 기존의 OB, YB 논의구조 대신 김근태를 중심으로 준비모임이 새로 꾸려졌다. 여기에는 실제로 향후 건설될 공개청년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사람들이 참여했다. 최민화, 박계동, 김도연,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홍성엽, 연성수, 이을호, 연성만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각 학교별, 학번별 모임을 활성화하여 광범한 기반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준비모임에서는 무엇보다 이 기반조직 건설에 힘을 기울였는데, 새 단체가 일회성 조직이 아닌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재생산 기능을 할 수 있는 이런 기반조직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 민청협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했다.
우선 서울대는 72학번 이상 선배그룹은 처음에는 박우섭이 조직을 담당했다. 그리고 박우섭이 집행부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김도연, 황선진, 박성규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73학번은 이범영, 74학번은 권형택, 75학번은 이우재, 연성만, 77학번은 유기홍, 78학번은 김성환, 진영효 등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범영이 이들 기별 대표를 만나 정보를 전달하고 조직 작업을 독려했다.
고려대는 처음에는 조성우와 박계동, 설훈(74학번)이 내부 조직 작업에 나섰고, 나중에는 한경남(68학번), 천영초(72학번), 서원기(75학번) 등이 합류했다. 연세대는 최민화(68학번)와 김학민(68학번), 홍성엽(73학번) 등 선배그룹 중심으로 참여했다. 74학번 이하 후배그룹은 노동현장 지향성이 강했고, 그래서 민청련 참여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문화패는 나름의 독자적인 논의구조가 있었는데, 채광석(68학번), 채희완(68학번), 김도연(72학번), 연성수 등이 논의구조를 이끌었고, 이 논의 결과 연성수가 나중에 집행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밖에 이화여대는 최정순(75학번)이 대표로 참여하여 이대 출신들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83년 6월 말경, 정문화의 제안을 받은 최민화는 부천 역곡에 사는 김근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간 OB모임에서의 논의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새로 건설할 청년단체의 의장이 되어줄 것을 간청했다.
김근태는 최민화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더니 자신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이고,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최민화 당신이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역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최민화는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공개정치운동과 현장민중운동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은 형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최민화의 진정어린 뚝심에 결국 김근태가 졌다. 한 시간이 넘는 옥신각신 실갱이 끝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고, 의논할 사람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말고 시간을 달라'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최민화는 첫 만남에서 김근태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 걸 보고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2주 뒤 김근태를 다시 만나러 가면서는 김근태의 수락을 받아내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예상대로 이번에도 역시 김근태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최민화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형님이 만일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내가 3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첫째, 새 단체의 재정문제는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집을 팔아서라도 운영비를 대겠습니다. 둘째, 감옥 갈 일이 있으면 제가 첫 번째로 가게 해주십시오. 몸으로 때우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셋째, 형님이 의장을 맡아주신다면 앞으로 저는 형님을 저의 정치적 얼터너티브(Alternative)로 모시고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3차원의 충성 맹세를 한 것이다. 최민화의 강력한 대시에 김근태의 마음이 움직인 듯 보였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김근태는 신중했다. 바로 수락 의사를 밝히지 않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 1984년 8월, 흥사단에서 열린 ‘전두환 방일 반대’를 겸한 민청련 8·15 집회에서 나란히 자리한 최민화와 김근태. 김근태 바로 뒷자리는 부인 인재근. ⓒ 민청련동지회
7월 중순쯤 최민화가 근무하는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박우섭이 찾아왔다. 박우섭은 다짜고짜 따졌다.
"형이 우리 운동권을 말아먹을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우?"
최민화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은 누군가를 새 청년단체 의장으로 추대하려는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최민화는 적당히 달래서 보내려고 했다.
"잘하면 이상적인 모양새가 될 것 같으니, 조금만 참아라. 2주 후에 다시 와라."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는 김근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냥 순순히 물러날 박우섭이 아니었다. 박우섭의 집요한 물음에 최민화는 지금 김근태와 교섭 중이라고 전말을 고백하고 말았다.
박우섭은 원래 구월동 시절부터 김근태와 자주 만났던 사이라서 김근태의 인품과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적임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다만, 잘못되면 1회용 소모품이 될지도 모르는 민청련 의장에, 김근태를 써먹는 것은 좀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김근태를 자주 만나면서도 그에게 그런 권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의장 문제가 잘 안 풀리고 있는 이때 최민화의 노력이 성사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7월 말, 최민화가 세 번째 김근태를 만나는 날, 김근태는 결국 새로운 청년단체의 의장을 맡을 것을 수락한다. 최민화의 삼고초려를 방불케 하는 눈물 어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근태의 결단
김근태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영달, 조성우, 이해찬, 박계동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청년운동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이걸 만들어서 활동하는 게 맞는 거냐, 또 어떻게 만들 거냐, 누가 책임을 질 거냐, 이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복잡한 문제였죠. 탄압은 엄혹하고, 또 그걸 뚫고 만든다고 해도 역할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예측이 안 되고, 또 일부는 책임자를 누구로 할 거냐를 둘러싸고 좀 갈등도 있고, 다른 한편에 무섭기도 하고, 이런 게 다 겹쳐 있었습니다... (중략)... 최민화가 나한테 와서 설득을 하더군요.
그는 내가 선배 그룹이라는 것, 학생운동을 떠난 뒤 노동운동을 해왔는데 사람들이 그런 내가 대표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일단 '지금은 공개 정치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란 게 대체로 '그게 옳다, 해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 주장한 사람보고 '당신이 해봐라'라고 하는 게 상례였습니다. 최민화가 와서 권유한 것도 있지만, 그런 상례에 따라서, 말하자면 뒤집어 쓴 거죠."
사실 김근태는 구월동 사람들과의 논의과정에서 이미 공개투쟁단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생각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최민화가 찾아와서 그를 의장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김근태는 같은 인터뷰에서 민청련 결성을 필요로 한 당시의 정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때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공개적으로 국민에 다가가지 않고는 정권과 싸우는 깃발이 있다, 싸우는 리더십이 있다는 걸 국민에게 알릴 수 없다는 거였죠. 그런데 당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지 한 3년 가까이 되고, 물가를 잡고 경제도 안정돼 있었어요.
전두환의 헤게모니가 확립됐다, 세상도 그렇게 느꼈고, 또 전두환 그룹도 그렇게 느껴서 자신감을 가지면서 좀 풀어주기 시작했어요. 학생시위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아주 혼내고 그랬는데 덜 혼내는 분위기였어요. 그 기회, 틈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 운동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다가 학교에서 데모하다가 구속돼서 복역하고 나온 청년들이 많이 쌓였어요. 그들은 사회과학서적 출판사를 만들고 그랬는데 그런 거 가지고는 정권과 맞설 수 없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 있고, 또 국민들 속에서 유화 국면이 되고, 분위기가 다시 솟는 시점에서 거기에 돌파구를 내는 거는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책무다. 그래서 민청련이 결성된 거죠."
김근태가 술회한 대로 그는 최민화의 집요한 노력에 '엮인' 것이었다. 그러나 위 진술로 볼 때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엮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근태는 7월 말 세 번째로 최민화가 찾아왔을 때 의장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8월 중순경부터는 OB, YB가 함께 모이는 민청련 결성 준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김근태 의장이 준비론자?
▲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의 한 단면. 1984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정치투쟁을 벌이는 민청련(위 사진)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 현장 모습(아래 사진).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의 의장직 수락으로 공개청년단체의 건설 작업은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하고,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당시 OB, YB를 막론하고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것은 극히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환영했다. 노동현장 쪽의 일부 사람만이 김근태의 공개운동으로의 진출을 소영웅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을 했다. 이들은 당면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협소한 시각 즉, '준비론'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자들 사이에는 공개정치투쟁과 노동현장운동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논쟁의 결과 대체로 이것은 운동 영역의 문제일 뿐,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노동현장운동을 강조하는 것을, 장기적인 투쟁을 위해 현재는 투쟁을 자제하는 준비론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김근태가 '준비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근태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었고 현장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준비론은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것은 오래전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부터 논쟁이 되어왔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략이나 원칙에 있어서의 준비론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전술적으로 준비를 하고 잘 갖춰야 한다, 이런 얘기는 맞지만, 원칙이나 근본에 있어서 준비론, 이런 것은 인간의 약한 면을 반영한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개정치투쟁이냐 노동현장운동이냐 구분하는 것은 형태적인 것일 뿐, 그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태도와 원칙에서 보면 군사독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창립준비모임과 기반 조직 건설
▲ 기별대표를 역임한 1. 박성규(72) 2. 이범영(73) 3. 이우재(75) 4. 연성만(75) 5. 진영효(78) 6. 김성환(78). 괄호 숫자는 학번. 작고한 이범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 사진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가 전면에 나서면서 8월 중순부터는 기존의 OB, YB 논의구조 대신 김근태를 중심으로 준비모임이 새로 꾸려졌다. 여기에는 실제로 향후 건설될 공개청년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사람들이 참여했다. 최민화, 박계동, 김도연, 이해찬, 박우섭, 이범영, 홍성엽, 연성수, 이을호, 연성만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각 학교별, 학번별 모임을 활성화하여 광범한 기반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준비모임에서는 무엇보다 이 기반조직 건설에 힘을 기울였는데, 새 단체가 일회성 조직이 아닌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재생산 기능을 할 수 있는 이런 기반조직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 민청협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했다.
우선 서울대는 72학번 이상 선배그룹은 처음에는 박우섭이 조직을 담당했다. 그리고 박우섭이 집행부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김도연, 황선진, 박성규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73학번은 이범영, 74학번은 권형택, 75학번은 이우재, 연성만, 77학번은 유기홍, 78학번은 김성환, 진영효 등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범영이 이들 기별 대표를 만나 정보를 전달하고 조직 작업을 독려했다.
고려대는 처음에는 조성우와 박계동, 설훈(74학번)이 내부 조직 작업에 나섰고, 나중에는 한경남(68학번), 천영초(72학번), 서원기(75학번) 등이 합류했다. 연세대는 최민화(68학번)와 김학민(68학번), 홍성엽(73학번) 등 선배그룹 중심으로 참여했다. 74학번 이하 후배그룹은 노동현장 지향성이 강했고, 그래서 민청련 참여가 상대적으로 늦었다.
문화패는 나름의 독자적인 논의구조가 있었는데, 채광석(68학번), 채희완(68학번), 김도연(72학번), 연성수 등이 논의구조를 이끌었고, 이 논의 결과 연성수가 나중에 집행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밖에 이화여대는 최정순(75학번)이 대표로 참여하여 이대 출신들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 민청련 창립 논의부터 참여한 각 대학 대표들. 1. 조성우(1990년) 2. 설훈(1987년) 3. 서원기(1991년) 4. 한경남(1988년) 5. 김학민(1987년) 6, 최정순(1981년). 괄호 숫자는 촬영 당시 연도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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