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는 귀신이 산다
전쟁이 남긴 슬픈 상처, 아직도 라오스를 울리다
▲ 빠뚜사이(Patuxay). 비엔티안. ⓒ 정승구
라오스(Laos)에는 귀신이 많다. 아니 귀신 이야기가 많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라오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난 5월 아시아영화학교 강의를 갔다가 '작키'라는 라오스 영화학도를 만났다.
라오스는 1975년 공산화된 후 2008년에야 자국 장편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했다. 수도 비엔티안(Vientiane)에는 극장이 둘 뿐이다. 그런 나라에서 온 친구가 미신을 소재로 귀신 영화를 시도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애니미즘에 가까운 라오스 문화가 내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귀신'과 '이야기' 둘 다 환장하게 좋아하는 나로서는 라오스를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귀신을 삶의 일부로 여기는 라오스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 파탓루앙( Pha That Luang) 후문. ⓒ 정승구
"라고스(Lagos)를 간다고?" 내가 라오스를 간다고 하자 미국인 친구가 농담으로 물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라오스'라는 국명을 제대로 발음도 못 한다. 그들은 1961년 초 케네디 대통령이 인도차이나 군사 개입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심한 보스턴 억양으로 '레이어스'라고 부른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한국 소재 어느 국제기구의 유럽인 간부는 라오스 출장을 위해 비행기 표를 필리핀 라오아그(Laoag)로 예약하고 마닐라까지 갔다가 다시 인천을 통해 다급히 비엔티안으로 온 적도 있다. 어이가 없는 이 촌극은 최근에 일어난 실화다.
인도차이나 밀림과 산으로 둘러싸인 라오스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낯선 나라가 분명하다.
라오스에 있는 많은 서양인들은 낭만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이곳을 보는 반면, 다수의 동양인들은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는 '기회의 땅'으로 여긴다. 하지만 라오스에서 만난 모든 외국인들은 이 나라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하다. 모든 것이 너무 느려서 미치겠다는 이들과 라오스가 미치게 좋아서 이곳에 주저앉은 부류가 있다.
▲ 붓다 공원(Buddha Park). ⓒ 정승구
라오스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느림의 미학에서 나온다. 소승불교와 공산주의가 뒤섞인 문화적 유산 덕분인지, 이곳에서는 효율보다는 이해를 우선시하고 성과보다는 조화를 강조한다.
라오스에서는 늘어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을 '절약'하며 정신없이 빠르게 살아야 한다는 '허상'과 함께 붙어오는 불안과 걱정 역시 사라진다. 내가 이제까지 당연시해 온 많은 '사치'로부터 해방돼 미니멀한 일상을 즐기며 불필요한 외피 없이 본질적인 선택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곳이다.
라오스는 모든 것이 느려서 서스펜스는 별로 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하도 많아 미스터리가 넘쳐난다.
라오스에 없는 것은 속도만이 아니다. 체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나라다. 교육과 의료 체계는 너무 낙후돼있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대중교통은커녕 철도 인프라가 거의 전무한 나라다. 작년 말 중국에서 비엔티안까지 연결되는 철로가 시공에 들어갔지만, 완공까지는 5년이 예상된다.
▲ 라오스 거리의 식당. ⓒ 정승구
바람직한 면도 있다. 사회적 합의와 공동체 구성원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매우 중시된다. 회사 상관에서부터 동네 식당 주인까지 고용인과 종업원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언행은 자제하고 삼가는 문화다. 한 마디로 갑질이 없는 나라다. 오히려 '을질'이 심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라오스의 사회적 분위기로 효율과 효과는 상당 부분 타협된다.
그렇다고 라오스에 상류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력발전 전력 수출과 관광산업의 팽창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이 이어지는 라오스의 빈부격차는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비엔티안의 기득권은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방콕으로 날아간다. 도로 사정은 턱없이 열악하지만, 고급승용차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해외 원조로 감당하는 개도국에서, 간부급 공무원 월급이 300달러 이하인 빈국에서, 국가 경제에서 민간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공산국가에서 일반적인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광경들을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행정은 투명하지 못하고 사회통계 또한 부실하다. 신뢰도가 높지 않은 라오스 정부가 과연 어떻게 통치(govern)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런저런 귀신이 곡할 비합리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불편'만 무시한다면 라오스는 한 번쯤 머물러 볼 만한 나라다.
▲ 주차된 포르쉐와 벤츠 앞을 달리는 오토바이. ⓒ 정승구
▲ 왓인펑(Wat Inpeng) 사원. ⓒ 정승구
무엇보다 라오스는 아름답다. 라오스의 풍경은 압도적이다. 지방에서는 아무 데나 보고 셔터를 눌러도 달력 하나를 뽑을 수 있다. 국내 예능프로에 소개된 방비엥(Vang Vieng)은 이런 자연을 찾는 한국인들로 들끓는다. 그러나 안전한 곳은 아니다. 방비엥에서는 최근 몇 년간 매년 두 자릿수의 여행객 사상자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어 경상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일어난 사고들이다.
방비엥 현지 주민들은 이제 남송(Nam Song) 강을 무서워한다. 조상 대대로 고기를 잡고, 몸과 옷을 씻으며 즐겼던 그들의 강이 이제는 외지 귀신들로 오염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도 그곳에 머물며 야심한 밤에 나가 죽은 관광객들의 혼을 찾아 헤맸지만, 귀신을 보는 데 실패했다.
▲ 방비엥. ⓒ 정승구
귀신에 대한 믿음은 개도국이나 동양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속주의가 팽배한 일본에서도, 진보적이며 과학적인 북구에서도 귀신을 믿는 이들은 상당히 많다.
많은 이들은 종종 현실에서 마주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두려움을 느낄 때, 초자연적인 내러티브로 이를 해석하려 든다. 귀신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공포를 제어하는 능력을 얻고,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을 함께 만들고 공유하고, 이야기의 스릴과 카타르시스를 공감하면서 연대감을 형성한다.
내가 접한 라오스의 귀신 이야기들은 크고 작은 영들과 이롭고 해로운 혼들이 넘쳐 나며 공동체의 평화와 권선징악을 강조한다. 라오스인들이 영혼을 믿으려는 노력에는 감정적인 동기부여와 윤리적 정의에 대한 갈망이 포함돼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삶의 유한함을 잘 받아들이지 못해, 사람이 알 수 없는 내세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는 귀신 이야기를 즐기는 것 같다. 특히 억울한 죽음에 대한 귀신 이야기들은 현 사회의 정서뿐 아니라 근과거도 잘 보여준다. 익숙지 않은 세계로의 여행과 같은 귀신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괴물과 악령을 퇴마하고 치유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귀신을 찾아 라오스에 온 나는 정작 귀신은 만나지 못하고 귀신 이야기만 많이 듣고 있었다. 그렇게 라오스 귀신을 접하는 것을 포기할 무렵... 하루는 비엔티안을 거닐다 특별한 곳에 들를 수 있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단체 교정보철협동조합기구(COPE: Cooperative Orthotic & Prosthetic Enterprise)였다. 약 40평 남짓한 그곳에는 수많은 의족과 의수가 빽빽이 걸려 있다.
▲ 교정보철협동조합기구(COPE: Cooperative Orthotic & Prosthetic Enterprise)전시관. ⓒ 정승구
몇 해 전, 어부 '타'는 강가에서 소폭탄(bomblet)을 발견했다. '타'는 불발탄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폭탄이 강에서 터지면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서 들어왔다. 하루하루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타'에게는 위험한 기회였다.
'타'는 어린 자녀들을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후, 소폭탄을 수심 깊은 곳으로 밀어내기 위해 나무막대기를 사용했다. 불발탄은 건드리자마자 폭발했고, '타'는 그 자리에서 사지를 잃었다. '타'는 반나절이 지나서야 의료시설로 옮겨질 수 있었다. 오늘날 의족과 의수에 의존해 살아가는 '타'는 교정보철협동조합기구의 대변자로 활동하고 있다.
1964년부터 약 10년 동안 미국은 2백만 톤의 폭탄을 라오스에 투하했다.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한 폭탄과 맞먹는 양이다. 그 시절 라오스는 1인당 거의 1톤의 폭격을 받았다.
"하늘의 큰 귀신(괴물)에서 나온 작은 귀신들이 흩어져 땅으로 떨어진 거죠."
전시관의 여자 안내원은 내게 클러스터(Cluster) 폭탄 모형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 큰 귀신에서 나온 작은 귀신들. 클러스터(Cluster) 폭탄. ⓒ 정승구
대형 폭탄이 투하되며 열려 수많은 소폭탄들을 퍼뜨리는 클러스터 폭탄의 특성상 약 8천 만 개의 불발탄이 아직도 라오스 곳곳에 남아있다. 지난 50년간 라오스에서는 연평균 500여 명의 불발탄 사상자가 나왔고 피해자 대부분은 빈곤 농촌의 농부와 아이들이다.
미국이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지 반세기가 훌쩍 넘은 2016년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라오스를 방문한 오바마는 공식적으로 사과하며 미국 정부가 라오스 피해자들을 위해 9천만 달러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라오스의 상처를 돈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전시관을 방문한 나 역시 소액의 기부금을 내며 말했다.
"미국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안내원은 정중히 합장하며 답했다.
"꼽차이(고맙습니다). 미국보다 더 큰 귀신은 전쟁입니다."
라오스에는 귀신이 있다. 라오스는 귀신이 뭔지 안다.
▲ 남송강. ⓒ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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