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왜 나랑 놀던 파도는 이런 선물을 안 줬어?"

[그림책 일기①] 이수지 <파도야 놀자> 속에 우리 아이가 있었네

등록|2017.09.07 20:29 수정|2017.09.07 20:29
사람이 붐비는 때를 피해 여름휴가를 잡았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먼 곳보다는 가까운 곳, 다양한 볼거리보다는 안락한 숙소와 수영장이면 족하다. 작년과 재작년까지는 계속 호텔에 머무는 일정으로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제 아이도 좀 컸고 하니 다른 곳에 가보자 싶었는데 늦은 휴가에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바다는 마땅치 않았다. 마침 남편 회사 연수원에 당첨되어서 무작정 동해로 향했다. 처서가 지난 동해 바다는 추워서 못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예상과 달리 발 담그고 놀기에는 괜찮았다. 온몸을 담그고 노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 어린 아이들은 모래놀이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것에 대한 경계가 많은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 내려오지 않았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가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했다. 책에서는 모두 즐거워하기만 하던데 막상 만나고 보니 드넓은 바다에 압도되나 보다. 바다에 발 담그고 몸을 적시는 게 어떤 느낌일지 직접 부딪치는 일이 아이들에게 신나기만 한 일은 아니다.

▲ 아빠와 바다에서 노는 아이. ⓒ 서지은


많은 경험을 통해 파도타기의 재미를 알고 있는 어른은 아이도 이 재미를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만, 아이는 처음이라 낯설고 두렵다. 내 발 밑에서 왔다갔다를 반복하는 저 물결이 나를 데려가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발을 담그기까지 30분이 걸렸다.

아빠에게 안겨 떨어지지 않고 간접적으로 파도를 바라보기만 하다 내려와 발을 담그게 된 건 우연히 만든 안전지대 덕분이다. 아이에게 모래 구덩이를 파서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다며 안전지대를 만들어줬다. 작은 반원 모양으로 판 모래 구덩이는 금세 파도에 휩쓸려 무너졌다. 그러면 다시 모래를 팠다.

아이는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 구덩이에 실망하지 않고, 이 안전지대에 의지했다.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믿고 파도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그렇게 파도를 처음 만난 아이는 그날 오른쪽 발뒤꿈치가 부어오르도록 안전지대 모래 구덩이를 팠고, 파도와 처음 만났다.

▲ 이수지 <파도야 놀자> ⓒ 비룡소


▲ 이수지 <파도야 놀자> 뒷면 ⓒ 비룡소


이수지의 <파도야 놀자> 그림책에는 우리 아이가 겪었던 처음 만난 파도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글자 없는 그림책인 이 책에서는 제목이 아이의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제목 '파도야 놀자'를 통해 파도에 대한 아이의 호기심과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을 알 수 있다. 면지와 속표지, 책의 겉싸개까지 책의 형식을 갖춘 모든 곳에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파도야 놀자'는 검은 색과 파랑색만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변화를 준다.

책의 겉을 감싸고 있는 겉싸개 앞쪽에는 여자 아이가 파도를 바라보는 뒷 모습이 그려져 있다. 파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인지 뒤로 물러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앞표지와 달리 뒤표지는 치마 가득 조개, 소라 껍질을 담고 있는 아이가 나온다. 앞표지에서 아이 옷은 회색이었는데 뒤표지 아이는 파랑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갈매기도 앞에서는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배경이었지만 뒤에서는 아이 머리 위에 앉아 있다. 면지도 겉싸개 표지와 비슷하다. 앞면지에는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추측되는 그림에 모래만 있고, 뒷 면지에는 모래사장 위로 조개, 소라, 불가사리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이렇게 앞뒤가 다르게 된 과정이 이 그림책의 이야기다.

표지를 다 보고 책장을 넘기면 엄마와 함께 바닷가에 온 아이가 모래 사장 위를 뛰어가는 속지가 나온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는 아이와 갈매기만 나온다. 엄마 손을 놓고 달려와 파도 앞에 멈춰 선 아이는 파도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손은 뒤로 한 채 몸만 기울인 동작에서 파도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다음 장면에서 아이는 파도가 우르르 몰려오자 몸을 돌려 피한다. 아이 뒤에 있던 갈매기들도 아이를 따라 행동한다. 다시 밀려나는 파도를 보고 아이는 까치발까지 세우고 공룡처럼 자세를 취해본다. 마치 자신 때문에 파도가 밀려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왼편 흑백의 세계와 오른편 파도의 푸른 세계가 책 제본선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는 가운데 아이는 파도가 왼편으로 넘어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이제 주저앉아 바라본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손을 쑥 내밀어 본다. 조금씩 조금씩 오른편으로 이동하던 아이는 이제 오른편으로 완전히 진출해 첨벙첨벙 물장난을 한다. 갈매기들도 함께 어우러지고, 한껏 팔다리를 흔들면서 놀던 아이는 자기 키 보다 높아진 파도를 만나자 정지화면이 된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오는 파도를 피해 왼편으로 달아나는 아이, 왼편에 다다르자 파도에게 혀를 내보이면 자신만만해 한다. 넌 여기에 오지 못할 거라는 듯이.

그러나 파도는 아이를 덮치고 이제 왼편과 오른편 모두를 적셨다. 이제 흑백과 푸른색으로 나뉘던 세계가 모두 푸른색으로 젖어 하나를 이루었다. 하늘도 파랗게 물들고, 아이 원피스도 파랗게 물들었다. 파도에 흠뻑 젖은 아이는 놀라거나 화내지 않는다. 파도가 가져다 준 모래 위의 조개, 불가사리, 소라를 보고 기뻐한다. 엄마와 함께 파도에게 인사하며 가는 아이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있다. 겉싸개 뒤표지에 치마 가득 담겨 있는 조개, 불가사리, 소라를 담은 아이 모습과 연결된다.

그림책 <파도야 놀자>는 책의 형태와 단순한 색을 이용해 아이들 마음을 잘 나타냈다. 양면으로 분절 시키는 제본선을 이용해 양쪽의 세계를 그렸다. 아이가 있는 왼편 흑백 세계와 오른편 파도의 푸른색 세계는 처음에 나뉘어 있었다. 아이가 용기를 내어 오른편으로 이동하고 파도가 다시 왼편으로 이동하면서 이제 두 세계는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이 둘이 하나가 되는 성장의 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특히 이 그림책은 가로로 긴 판형이다. 바다의 수평선을 나타내기에 좋다.

영덕 바닷가에서 처음 파도 놀이를 한 아이와 집에 돌아와 이 책을 보았다. 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아이 눈이 빛났다. 나도 파도에 대해 좀 안다는 눈빛이다. 책장을 넘기자 자신과 비슷한 여자 아이가 있다. 파도를 보고 멈칫하는 여자 아이는 아빠에게 안겨 내려오기를 거부하던 자신과 닮았다.

왼편으로 도망가는 여자 아이는 아빠와 함께 만든 모래 구덩이로 달아나던 자신이다.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아빠의 말을 믿고 파도와 바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은 뒤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던 아이의 경험이 그림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자 아이가 왼편으로 도망가 혀를 내미는 장면에서 책장을 넘기기 전 "파도가 어떻게 됐을 것 같냐"고 물었다.

아이는 "파도가 넘어 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파도에 흠뻑 젖고 싶은 아이 마음이 느껴졌다. 파도에 젖고 난 뒤에도 신나하는 여자 아이는, 파도가 무너뜨리고 간 안전지대 모래 구덩이를 다시 만들었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아이는 모래 위에 널브러진 조개, 소라, 불가사리를 보고 파도가 선물을 주고 간 거라 했다. 자기와 같이 놀던 파도는 왜 이런 걸 안 줬냐고 투덜대면서.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는 데 있어서 자발성과 든든한 지원자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 누군가 권해서 하는 게 아닌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탐험에 나서야 하고, 돌아와 쉴 곳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고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은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