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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는 카렌족을 아시나요?

미얀마 난민, 3년간 14가족 79명 입국... 주주씨 가족 이야기

등록|2017.09.07 14:50 수정|2017.09.07 20:33
"저는 1993년경에 난민 캠프에 들어갔어요. 24시간 365일 좁은 캠프에만 있으니 사는 것이 너무 답답했어요. 하지만 캠프 밖으로 나가려면 돈을 주고 비자를 받아야 해요. 난민들은 돈이 없으니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나간다 해도 1주일만 나갈 수 있고 비자가 있어도 잘못하면 체포될 수 있어요. 태국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체포되면 감옥에 가거나 미얀마로 돌려보네요. 어디를 가도 카렌족 난민들은 안전하지 않아요. 한국에 오지 못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주주(42)씨는 25년을 미얀마와 태국 접경지역의 메솟 난민캠프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아내 쌔해퍼(47)씨를 만나 결혼하고 줄리아퍼(22, 딸)와 주쌔퍼(20, 아들), 에주퍼(17, 딸), 크쌔이(15, 아들) 등 자녀 넷을 낳았다.

부모는 캠프 밖에서 자라 세상을 조금 알지만 캠프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캠프가 고향이고 삶의 전부다. 2016년 12월 정부의 '재정착 난민 제도'에 따라 한국에 온 이들은 지금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다.

폭력과 억압을 넘어 한국으로

▲ 170825 미얀마에서 온 난민 주주 씨 가족이 포즈를 취하며 하트를 날리고 있다. ⓒ 송하성


법무부는 2015년 미얀마 난민 1기 4가족 22명, 2016년 2기 7가족 34명, 2017년 3기 4가족 23명을 받았다. 이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의 추천을 받아 심사 후 수용하는 '재정착 난민 제도'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이러한 형태의 난민 입국은 처음이다.

1기와 2기는 6개월간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와 외국인지원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 취업교육 등 기초적인 적응교육을 받았고 3기는 현재 교육 중이다. 교육을 마친 1기와 2기 난민들은 현재 가족별로 법무부가 마련한 주택에 입주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2기 난민 주주씨 가족은 인천 부평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 아빠 주주씨와 엄마 쌔해퍼씨 그리고 큰 딸 줄리아퍼씨는 부평 인근의 제조업 공장에 다니고 세 명의 자녀는 다문화 대안학교인 인천한누리학교에 다닌다.

8월 25일 저녁 주주씨의 여섯 식구를 만났다. 통역은 같은 카렌족으로 1998년에 한국으로 결혼이주한 김파우씨가 맡았다.

"캠프에서는 돈이 없어서 힘들게 살아야 해요. 유엔에서 주는 구호물품으로 편하게 먹고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20년 이상을 살아보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예요. 캠프의 숙소는 아주 비좁고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요. 한국에는 직장이 있어서 일을 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어요. 무엇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그래서 마음이 가벼워요."

캠프를 벗어나 한국에 들어온 지 9개월이 된 엄마 쌔해퍼씨는 현재의 한국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크다. 한국어가 능숙하지 못해 이곳저곳을 다니지는 못하지만 폭력과 억압의 고리를 끊고 탈출했다는 안도감이 크다.

"미얀마 군인들은 카렌족을 억압하고 괴롭힙니다. 카렌족 남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여자들을 성폭행해요. 제가 캠프에 들어갈 당시에도 미얀마 군인들의 폭력에 대한 시위가 많았어요. 농사도 못 짓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어요. 정말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어요."

이들이 말하는 한국생활은 기쁨 그 자체다. 주주씨는 10대 시절 뜨거운 햇볕 아래서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 공장에서는 더위에 시달리지 않으며 일해도 된다.

쉬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도 따로 보장돼 있다. 평생 그런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 큰 딸 줄리아퍼씨는 캠프에서 생활할 때의 공포를 기억하며 한국생활의 안정감을 말했다.

"캠프에 태국 군인들이 들어오면 너무 무서워요. 아이들은 특히 잡혀갈까봐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어요. 한국에서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한국은 안전한 나라예요. 규칙이 있고 잘 지켜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가장 마음에 드는 규칙은 공공장소에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는 규칙이에요."

'한국생활은 새로운 도전'

▲ 170825 메솟난민캠프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주주 씨 ⓒ 송하성


그렇다고 한국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이 꽃길만 보장된 것은 아니다.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60만원인 현재 아파트는 법무부가 보증금과 1년치 월세를 선납했지만 내년에는 보증금을 법무부에 돌려주고 월세도 직접 내야 한다. 곧 법무부의 지원이 끊길 텐데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물었다.

"성실하게 일하며 돈 벌어 준비하고 있어요.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난민캠프에서처럼 일도 없고 돈도 없으면 힘들어요. 한국이 많이 도와주셨으니 우리도 열심히 살아야죠."

일상생활에서 주주씨와 같은 난민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의외의 지점에 있었다. 바로 개인위생에 대한 것이다.

난민캠프에서는 수도시설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목욕은 몇 달을 넘겨가며 하고 쓰레기도 거의 발생하지 않으니 치우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이 때문에 쓰레기를 분리해 배출하고 집안 청소를 하며 몸을 씻는 일들이 이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생활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 이민통합센터는 한국인 생활멘토 봉사자와 한국어멘토 봉사자를 모든 난민 가족에게 각 1명씩 지정했다.

일부 난민가족은 개인위생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아 생활멘토 봉사자들이 중재에 나섰다. 결국 이웃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세수나 머리감기, 목욕, 청소 등을 더 자주 하기로 약속했다.

▲ 170825 부천의 한 병원에서 손가락 마디 분리 수술을 받은 크쌔이 군.왼쪽은 채보근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 이민통합센터장, 오른쪽은 송인선 경기글로벌센터 대표. ⓒ 송하성


그런데 주주씨 가족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막내 크쌔이 군의 오른손 손가락 마디가 붙어 있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에 문제가 있었던 크쌔이 군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고 늘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의 도움으로 부천의 한 병원에서 분리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1차례 수술이 더 남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하던 크쌔이군은 이제 손을 내보이며 활짝 웃는다.

"붙어있던 손가락이 떨어진 것이 보여요. 이제 친구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도 주눅 들어 하지 않을 거예요."

100여만원에 달하는 크쌔이군의 병원비는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 사회통합위원들이 대신 납부했다.

우리는 카렌 사람입니다

▲ 170825 한국 정부가 유엔난민기구의 추천을 받아 수용한 재정착 난민 주주 씨 가족(오른쪽은 통역을 맡은 김파우 씨) ⓒ 송하성


이들이 거주하는 부평은 인근에 미얀마 사원이 두 곳이 있고 미얀마 상점도 많아서 미얀마인들이 많이 모인다. 주말에 그들을 자주 만나는지 물었다. 그러자 주주씨가 손사래를 쳤다. 미얀마에서 받았던 박해와 차별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에는 카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갑니다. 거기서 자녀들에게 카렌어 교육을 하고 한국 생활에 대한 정보를 나눠요. 일주일 동안 살며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하죠. 그리고는 경기글로벌센터라는 이주민 교육기관에 가서 3시간 이상 한국어 교육을 받고 돌아옵니다."  

문득 미얀마의 박해를 받으며 살아 온 이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질문을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카렌 사람입니다. 우리는 미얀마 사람이 아니에요. 미얀마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해요. 우리는 미얀마 언어도 문화도 알지 못해요. 우리는 미얀마에서 살지 않을 거예요. 왜 우리가 메솟 난민캠프에서 수십년간 힘들게 살아야 했는지 우리는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한국에서 살 거예요." 

낮은 목소리로 답하는 주주씨와 큰 딸 줄리아퍼씨의 눈가에 언뜻 눈물이 고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기다문화뉴스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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