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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남자와 결혼, 인생이 바뀌었다

[인권 이즈 커밍⑤] 이주민방송 대표 정혜실씨

등록|2017.09.18 11:41 수정|2017.09.18 11:41
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 정혜실 이주민 인권활동가 ⓒ 이희훈


까무잡잡한 피부의 외국인 남자가 한 대학원생을 쫓아왔다. 길거리에서 남자가 말했다.

"차 한 잔 어떠세요?"

그 여자는 생각했다.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 같은데, 어따 대고 감히 나한테 말을 걸어?'

불쾌했지만,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3대째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기독교인인데, 사람을 차별하지는 말자. 친절한 모습 보여주고, 얼른 가자.'

두 사람은 카페로 향했다. 인생은 조그마한 우연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정혜실씨가 그랬다. 몇 달 뒤 파키스탄 시골마을 구주란 왈란에서 두 사람은 이슬람식 결혼식을 치렀다. 1994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지금, 정혜실씨는 이주민 인권활동가로 살고 있다. 또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이주민을 비롯한 모든 차별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4년엔 인권 의식이나 이주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던 평범한 대학원생이었죠. 지금은 이주민 인권 활동가로 너무 알려진 게 아닐까, 어느 시점에 그만둬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하."

수요일 밤의 열기

▲ 정혜실 이주민 인권활동가가 8월 30일 서울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이주민문화예술공간 프리포트에서 이주민 다큐영화 상영회를 마치고 참석자들과 함께 서로를 소개하고 있다. ⓒ 이희훈


지난달 30일 정혜실씨가 기자를 '수요밤마실'에 초대했다. 6월부터 수요일 밤마다 이주민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를 함께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서울 문래동에 있는 이주민문화예술공간 프리포트로 향했다.

기자는 대학생 때 몇 개월 동안 베트남 이주노동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했다. 새로운 느낌은 없을 것 같았다. 스크린이 걸린 조그마한 공간에 10여 명이 모였다. 진슈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후두>(hood)가 흘렀다.

스크린에 누군가 나타났다. 통통 튀는 모습의 20대 대학생이었다. 진슈 감독은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이주민을 다룬 영화라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보니, 그는 2015년 한국에 온 중국 동포(조선족)였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중국 동포는 '연변 사투리를 쓰는 중년의 이주노동자'라는 생각이 무너진 것이다.

영화를 본 뒤, 모두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서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섹알마문입니다."

그의 소개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좀 전에 주민등록증을 내보였다. 이름, 사진, 13자리 주민등록번호.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다만 "중랑구 섹씨의 시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이름은 좀 특별한 데가 있을 뿐이다.

▲ 이주민 인권활동가 정혜실씨가 야마다 다까꼬씨와 대화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야마다 다까꼬씨도 인사했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온 지 18년이 지났다. 그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이주민방송 공동대표로서 자신과 이주민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중국과 에티오피아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테이블에 양꼬치, 만두, 마파두부, 새우구이가 올라왔다. 다들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도 취재를 잊은 채 맨손으로 새우를 까며 대화에 참여했다. JTBC <비정상회담>이 부럽지 않은, 문래동 비정상회담이었다. 혜실씨가 기자에게 "오길 잘 했죠?"라고 물었고,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민 문제를 하나도 모르거나 관심은 있지만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싶었어요. 또한 문래동에 있는 사람들을 여기로 초대해,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각 나라의 음식인 에스닉 푸드를 준비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호기심에서라도 모이지 않을까 생각했죠. 가볍게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찾아왔네요."

균열을 내는 사람

▲ 정혜실 이주민 인권활동가가 8월 30일 서울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이주민문화예술공간 프리포트에서 이주민 다큐영화 상영회를 마치고 영화에 설명을 하고 있다. ⓒ 이희훈


다시 그의 삶으로 돌아가 보자. 정혜실씨와 남편은 결혼 후 사업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에게 팔기 위한 식품을 수입하는 일이었다. 1997년 이주노동자가 많던 구로공단(현 가산디지털단지)에 무슬림(이슬람교인)을 위한 할랄 푸드 가게를 세웠다.

"처음에 향신료를 많이 수입했는데, 관세청의 수출입 품목분류코드인 HS코드에 없는 게 많았어요. 현재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관세청 공무원들을 가르치다시피 했어요. 고수 씨앗으로 만든 코리엔더 파우더는 우리가 처음으로 수입했어요."

정혜실씨 부부는 제법 돈을 벌었다. 이주노동자들이 경기도 안산으로 옮겨가자, 가게도 옮겼다.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처한 현실에 눈길이 갔다. 처음엔 사업이 먼저였다. 돈을 많이 번 다음에 돕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난한 이주노동자에게 식품을 판 돈으로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채의식이 생겼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말을 모르니까, 제가 전화를 많이 걸어줬어요. 임금을 체불한 사장에게 전화해서, 막 화를 냈어요. 그러면 '당신 누구냐'라고 하는데, '이 사람 누나다'라고 답해줬어요. 어음 수표를 받아온 이주노동자가 있어서, 사장한테 전화해서 '부도나면 끝 아니냐. 당신들은 사기꾼이냐'라고 말하기도 했죠."

이주노동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다. 2001년 혜실씨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문을 두드렸다.

"작은 것부터 돕고 싶었어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침해문제를 상담해주고, 머물 곳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이었어요. 먼저 부엌일부터 도왔어요. 주방에 가서 계란 프라이를 하고 설거지를 했죠."

이후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모임인 파키스탄커플모임에서 활동했다. 다문화가족협회 대표, 터(TAW, 국경을 넘는 아시아 여성들) 네트워크 대표를 연달아 맡았다. 성차별에 대한 고민도 깊어, 대학원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그렇게 혜실씨는 인권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무언가를 깨고 균열을 내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 제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거죠.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하면, '계란이 되자'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바위는 안 깨지겠지만, 어떻게든 흔적은 남잖아요. 노른자가 붙어있든지. 하하. 그런 마음가짐으로 활동을 했죠."

차별과 편견

파키스탄 남편과 결혼하고 이주민의 인권을 얘기하는 일은 한국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94년 파키스탄에서 결혼식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날부터 차별과 편견을 경험했다. 당시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남편은 입국심사대에서 다른 곳으로 불려갔다.

출입국 관리 공무원은 1시간 넘게 남편에게 왜 결혼했는지, 얼마를 가져왔는지 따위의 질문을 던졌다. 참다못한 혜실씨는 공무원에게 "내가 미국사람이랑 결혼해도 이렇게 했겠어요?"라고 물으며 울분을 터트렸다. "아니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허탈했다.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하면서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가족은 곧 남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국가는 쉽게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한국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바로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여성과 결혼한 이주남성은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똑같은 국제결혼인데 한국남성과 달리, 저는 제 남편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었죠."

혜실씨는 견고한 성과 인종 차별의 벽을 느꼈다. 그는 10년 뒤 다시 차별과 맞섰다. 2004년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 인터넷 게시판에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정혜실씨를 비롯한 파키스탄커플모임 사람들이 댓글을 달면서 댓글 전쟁이 벌어졌다.

"그 사람들은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한 여자는 뭔가 모자라거나, 머리가 비었거나, 정신상태가 잘못됐다고 주장했어요. '어떤 여성은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했는데, 나중에 사기를 당했다더라', '이런 결혼은 문제가 있으니 막아야 한다'라는 얘기도 올라왔죠. 저희도 댓글을 달며 한판 붙었죠."

다시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세상은 좋아지긴 한 걸까.

"툭툭 다시 뒤로 가는 느낌 있잖아요? 한 열 발자국을 걸어왔는데, 갑자기 스무 발자국 뒤로 가는 느낌. 지난 10년의 정권에서 느꼈죠. 내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이주민 인권 활동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어요. 참 힘들겠죠? 하하." 

재정 문제

2009년 7월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교수는 버스에서 난데없이 "아랍인은 더럽다", "냄새 난다"와 같은 욕설을 들었다. 이후 법원은 가해자에게 모욕죄를 적용해 벌금 1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많은 단체가 힘을 모았다. 정혜실씨도 여기에 참여해 연대활동에 앞장섰다. 그런 그에게 이주민방송(MWTV)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후 그는 운영위원으로 참여했고, 2016년부터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올해로 11회째인 이주민영화제의 사전행사인 수요밤마실과 같은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주민을 상대로 하는 콘텐츠 제작 교육에도 힘을 쓰고 있다.

"지금 콘텐츠에서 이주민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은 제한적이잖아요. 이주민들이 이주민방송에서 아나운서, 기자, 피디, 엔지니어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또한 우리가 만든 좋은 콘텐츠가, 한국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했으면 하고요."

문제는 재정 상황이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지원이 끊겼다. 지난 3월엔 재정적인 어려움이 정점에 달했다. 떠나는 직원의 퇴직금을 줄 수 없었고, 상근활동가에게 줄 월급도 모자랐다. 월세도 밀렸다. 고용노동부에서 고용보험을 내는 직원이 없으니 고용보험 사업장에서 제외하겠다는 연락을 하기도 했다.

혜실씨나 운영위원들이 운영비·인건비가 부족할 때마다 돈을 채워 넣었다. 그마저도 부족해, 후원의 밤을 열어 다른 단체에 손을 벌렸다. 당장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년이다.

"지금 상근으로 있는 웹진 편집장 한 명에게 150만 원가량 월급을 주고 있고, 월세도 밀리지 않고 있어요. 다른 활동가들은 인건비를 지원받는 외부 프로젝트 덕분에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어요. 근데 내년이 걱정이에요. 프로젝트도 끊기고 재정도 바닥나죠. 활동가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데, 걱정이에요."

인권활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꿈

▲ 정혜실 이주민 인권활동가 ⓒ 이희훈


혜실씨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기독교인을 향해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건 좋지만 남의 자유를 박탈할 권리는 없다"라고 일갈했다. 일부 기독교인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제 동생과도 많이 싸웠죠. 동생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종교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고 있듯이, 성소수자가 자신의 가치 지향에 따라 살 수 있는 자유도 마찬가지다. 그걸 인정하고 끝낼 일이지, 네가 싫다고 반대한 권리는 없다'라고 말해줬어요."

혜실씨는 이주민 인권 문제와 활동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인권 현장을 누빈다. 매일 같이 경기도 안산 집에서 서울 곳곳의 현장으로 향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칠 때도 많다. '잘난 척하면서 다른 사람의 성장 기회를 막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바람은 명쾌하다.

"다문화라는 말이 없어질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차이가 없어지면, 우리 할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행복한 기대를 하면서 인권운동을 하고 있죠."

혜실씨의 바람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대학생인 혜실씨의 두 자녀는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 자신의 피부색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또한 엄마를 도와 이주민 인권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혜실씨의 바람이 이뤄지는 그날은, 더디지만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인권 이즈 커밍' 공동기획팀
신나리·신지수·선대식(글), 이희훈(사진), 최유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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