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아버지 따라 머리 민 아들 "43명 중 42등 하던 나도 국회의원 됐다"
[나의 찌질한 20대 ⑥]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머리카락을 밀었다. 대장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던 아버지가 석 달 뒤 암 재발 선고를 받았다. 더 독한 항암제를 맞아야 했다. 후드득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간호하던 아들은 삭발을 결심했다. "아들이 항상 함께 있다"는 메시지를 아버지께 주기 위해, "아버지를 반드시 살려내겠다"는 각오를 스스로 다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주치의가 삭발한 그를 보더니 "의사하면서 이래 하는 아들은 처음 보네"라며 혀를 내둘렀다.
2003년 4월, 27살이던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모습이다.
지난 5일 만난 김 의원은 아버지가 암 선고 받던 순간이 20대를 상징할 장면이라 말했다. 의사로부터 "상당히 진행된 대장암 3기"라는 얘기를 듣자 "온 몸의 힘이 빠졌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그 날 이후 '사법고시생'이던 그는 '아버지 보호자'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다.
김 의원은 늘 아버지와 함께였다. 아버지가 입원 치료를 할 때 환자 침대 옆 간이침대는 항상 그의 몫이었다. 부산 초읍 시립도서관에 있는 암 관련 서적이나 건강 서적은 거의 다 읽었다. 의사가 적은 차트에 적은 꼬부랑체가 무슨 말인지 궁금해 의학전문용어 사전도 뒤졌다.
아버지의 암이 재발하고부터는 병원에서 '연명치료'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만 맡길 수 없었다. 한방, 대체의학, 민간요법, 온갖 것들을 시도했다. 산에서 느릅나무 껍질을 직접 채취해 아버지에게 물을 끓여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복어 독' 요법까지 해봤다. 김 의원도 복어 독을 함께 먹었다.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지나고 생각하니 집착했던 거 같아요. 반드시 살려야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집착하니 제 불안감이 알게 모르게 환자에게 전달됐던 거 같아요. 살면서 가장 열심히 한 게 환자 보호자로서 역할이었는데... 제 집착이 아버지 투병생활에 플러스가 됐겠나 싶더라고요."
"내가 가출해서 아버지가 암에 걸린 게 아닐까..."
아버지를 간호하는 데 매진했던 그를 괴롭힌 것은 "내일 죽어도 좋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기대였다. 그는 정반대의 심정이었다. "내 인생은 어떻게 돼도 좋으니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아버지 곁에서는 고시 공부 책을 펴놓고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었다. 그의 '이중생활'은 점점 마음을 옥죄어왔다. 대학에 들어간 것까지 후회했다.
"'운이 좋아 수능 시험을 한 번 잘 받아서 괜히 힘이 드는구나, 실력대로 점수 받았으면 법대도 안 갔을 테고 아버지가 고시 합격에 기대도 안 할 것이고...' 환자 보호자로서만 집중하면 덜 힘들 거 같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시험도 계속 떨어지고 하니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합격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한 아버지의 실망이 너무 컸다. 아들을 향하는 것도 아닌 아버지의 화가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어떻게 버텼냐 물으니 "버틸 수밖에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던' 꿋꿋함. 그 이면에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암에 대해 공부해 보니, 암의 단초가 발생했다가 10~15년 과정을 거쳐서 자리를 잡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10년 전이면 고등학교 1학년 때더라고요. 그 때 6개월 동안 가출했어요. 처음에는 벨 한 번 울리고 전화를 끊는 방식으로 '잘 있다' 표시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조차 안 했어요. 그 때 아버지가 애를 많이 먹어서 암 기초인자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드는 거죠."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병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2007년 12월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다.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신 병원 쪽은 지나가지도 않았다. 선친 유품 또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게 많다.
'안 된다'과 싸워야 했던 20대
그는 20대 절반을 '환자 보호자'로 살았다. 20대에 가장 빛났던 때를 묻자 "특별히 빛났던 때는 없다"고 했다. 20대를 기록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대신, 그는 마흔을 갓 넘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8살 딸, 6살 아들, 5개월 된 딸이 있는데 아이들이 노는 모습, 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행복해요."
이제는 담담하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삶. 그러나 행복을 찾기까지 '안 된다'와의 싸움을 계속 벌여야 했다.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그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이제 와서 되겠냐"고들 했다. 그럴 법도 했다. 고등학교 내내 그의 성적은 꼴찌권을 맴돌았다. 다른 사람은 비웃었지만 아버지만은 그를 믿어주셨다. "나는 아직도 네가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하셨다.
그 말에 용기를 얻고 다음 날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겠다 결심한 후 삐삐(호출기)부터 없앴다. 공부 외의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TV도 안 보고 사람도 안 만났다.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다. 결국 부산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입학한 게 사법시험 합격, 국회의원 당선보다 기분이 좋았어요. 사법시험은 '좋다'보다는 '앞가림은 하겠구나, 다행이다' 이런 마음이 컸고, 국회의원 당선은 부담감이 크더라고요. 순수하게 '성취했다'는 것이 좋았던 거 같아요."
안 될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학교 합격 이후에도 계속 있었다. 아버지를 간호할 때는 "병원에서 그리 말하는데 뭘 자꾸 하냐, 받아들여라"고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는 "1차도 계속 떨어지는데 무슨 합격이냐"고 했다.
"객관적으로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본인이 목표를 정해서 의지를 갖고 시간, 정성을 들이면 반드시 50% 단계까지는 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부정적으로 '객관적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더라고요."
"뒤쳐진 사람에게 희망을"... '꼴찌'가 전하는 메시지
비웃음과 비관에 맞서 그는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더불어 중요한 건 마음을 푸는 일임을 알게 됐다.
"선친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2번 사법시험을 총점 1점차로 떨어졌어요. 아버님 작고하시고 이제 시험 안 치려고 하다가 '그렇게 원하셨는데...'하면서 마지막으로 마음을 비우고 쳤어요. 장례 치르고 나니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합격하더라고요. '매사가 마음을 모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구나, 풀 때는 풀어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어요."
그러다 다시 마음 모을 일을 시작했다. 2016년 총선에서 부산 연제구에 출마한 것이다. 정치 경험이라고는 없는 초짜 신인이 보수 텃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상대 당 후보와는 대학생과 초등학생 정도로 차이가 났어요. 권리당원 수도 10배 차이나고, (장관에 재선까지 지낸 김희정 후보와) 경력도 비교할 수 없었죠. 그래서 가장 신경 쓴 게 '내가 마음이 꺾이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마음 꺾일 일들은 숱하게 일어났다. 처음 야당 원외지역위원장을 맡고는 행사장 인사 기회조차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지역 관계자들의 무시도 일상이었다. 지지자들조차 '설마 되겠냐'고 했다. 그 마음을 '해볼 수 있다'로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연산교차로가 교통량이 많아요. 비가 엄청 오는 날이었는데 10시간 동안 꼼짝않고 인사를 했어요. 허리 굽히는 절만 1만 번 가까이 했죠. '한 번 붙어볼 수 있구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죠. 제가 인사한 게 결국 소문이 나더라고요. 지지자들도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고요."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고, 전력을 다한 후 해낸다. 그의 인생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정치인'으로서 전하고 싶은 "뒤쳐진 사람에게 희망을"이라는 메시지도 그에 닿아있다.
"고등학교 남들 3년 다니는 거 4년 다녔고, 43명 중 42등까지도 해봤어요. 사법시험도 몇 번을 떨어지고 우리나라 나이로 33살에야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회에서 국민들 대변하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뒤쳐진 사람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도록, 그런 정치 하고 싶습니다."
2003년 4월, 27살이던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모습이다.
▲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신의 아버지 젊었을 때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 남소연
지난 5일 만난 김 의원은 아버지가 암 선고 받던 순간이 20대를 상징할 장면이라 말했다. 의사로부터 "상당히 진행된 대장암 3기"라는 얘기를 듣자 "온 몸의 힘이 빠졌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그 날 이후 '사법고시생'이던 그는 '아버지 보호자'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다.
김 의원은 늘 아버지와 함께였다. 아버지가 입원 치료를 할 때 환자 침대 옆 간이침대는 항상 그의 몫이었다. 부산 초읍 시립도서관에 있는 암 관련 서적이나 건강 서적은 거의 다 읽었다. 의사가 적은 차트에 적은 꼬부랑체가 무슨 말인지 궁금해 의학전문용어 사전도 뒤졌다.
아버지의 암이 재발하고부터는 병원에서 '연명치료'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병원에만 맡길 수 없었다. 한방, 대체의학, 민간요법, 온갖 것들을 시도했다. 산에서 느릅나무 껍질을 직접 채취해 아버지에게 물을 끓여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복어 독' 요법까지 해봤다. 김 의원도 복어 독을 함께 먹었다.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지나고 생각하니 집착했던 거 같아요. 반드시 살려야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집착하니 제 불안감이 알게 모르게 환자에게 전달됐던 거 같아요. 살면서 가장 열심히 한 게 환자 보호자로서 역할이었는데... 제 집착이 아버지 투병생활에 플러스가 됐겠나 싶더라고요."
"내가 가출해서 아버지가 암에 걸린 게 아닐까..."
▲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 남소연
아버지를 간호하는 데 매진했던 그를 괴롭힌 것은 "내일 죽어도 좋으니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기대였다. 그는 정반대의 심정이었다. "내 인생은 어떻게 돼도 좋으니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아버지 곁에서는 고시 공부 책을 펴놓고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었다. 그의 '이중생활'은 점점 마음을 옥죄어왔다. 대학에 들어간 것까지 후회했다.
"'운이 좋아 수능 시험을 한 번 잘 받아서 괜히 힘이 드는구나, 실력대로 점수 받았으면 법대도 안 갔을 테고 아버지가 고시 합격에 기대도 안 할 것이고...' 환자 보호자로서만 집중하면 덜 힘들 거 같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시험도 계속 떨어지고 하니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합격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이 없는 걸 확인한 아버지의 실망이 너무 컸다. 아들을 향하는 것도 아닌 아버지의 화가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어떻게 버텼냐 물으니 "버틸 수밖에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던' 꿋꿋함. 그 이면에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암에 대해 공부해 보니, 암의 단초가 발생했다가 10~15년 과정을 거쳐서 자리를 잡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10년 전이면 고등학교 1학년 때더라고요. 그 때 6개월 동안 가출했어요. 처음에는 벨 한 번 울리고 전화를 끊는 방식으로 '잘 있다' 표시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조차 안 했어요. 그 때 아버지가 애를 많이 먹어서 암 기초인자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드는 거죠."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병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2007년 12월 아버지는 끝내 돌아가셨다.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신 병원 쪽은 지나가지도 않았다. 선친 유품 또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게 많다.
'안 된다'과 싸워야 했던 20대
그는 20대 절반을 '환자 보호자'로 살았다. 20대에 가장 빛났던 때를 묻자 "특별히 빛났던 때는 없다"고 했다. 20대를 기록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대신, 그는 마흔을 갓 넘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8살 딸, 6살 아들, 5개월 된 딸이 있는데 아이들이 노는 모습, 크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행복해요."
이제는 담담하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삶. 그러나 행복을 찾기까지 '안 된다'와의 싸움을 계속 벌여야 했다.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그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이제 와서 되겠냐"고들 했다. 그럴 법도 했다. 고등학교 내내 그의 성적은 꼴찌권을 맴돌았다. 다른 사람은 비웃었지만 아버지만은 그를 믿어주셨다. "나는 아직도 네가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하셨다.
그 말에 용기를 얻고 다음 날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겠다 결심한 후 삐삐(호출기)부터 없앴다. 공부 외의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TV도 안 보고 사람도 안 만났다.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다. 결국 부산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입학한 게 사법시험 합격, 국회의원 당선보다 기분이 좋았어요. 사법시험은 '좋다'보다는 '앞가림은 하겠구나, 다행이다' 이런 마음이 컸고, 국회의원 당선은 부담감이 크더라고요. 순수하게 '성취했다'는 것이 좋았던 거 같아요."
안 될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학교 합격 이후에도 계속 있었다. 아버지를 간호할 때는 "병원에서 그리 말하는데 뭘 자꾸 하냐, 받아들여라"고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는 "1차도 계속 떨어지는데 무슨 합격이냐"고 했다.
"객관적으로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본인이 목표를 정해서 의지를 갖고 시간, 정성을 들이면 반드시 50% 단계까지는 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부정적으로 '객관적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더라고요."
"뒤쳐진 사람에게 희망을"... '꼴찌'가 전하는 메시지
비웃음과 비관에 맞서 그는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더불어 중요한 건 마음을 푸는 일임을 알게 됐다.
"선친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2번 사법시험을 총점 1점차로 떨어졌어요. 아버님 작고하시고 이제 시험 안 치려고 하다가 '그렇게 원하셨는데...'하면서 마지막으로 마음을 비우고 쳤어요. 장례 치르고 나니 시험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합격하더라고요. '매사가 마음을 모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구나, 풀 때는 풀어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그 때 알았어요."
그러다 다시 마음 모을 일을 시작했다. 2016년 총선에서 부산 연제구에 출마한 것이다. 정치 경험이라고는 없는 초짜 신인이 보수 텃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 남소연
"상대 당 후보와는 대학생과 초등학생 정도로 차이가 났어요. 권리당원 수도 10배 차이나고, (장관에 재선까지 지낸 김희정 후보와) 경력도 비교할 수 없었죠. 그래서 가장 신경 쓴 게 '내가 마음이 꺾이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마음 꺾일 일들은 숱하게 일어났다. 처음 야당 원외지역위원장을 맡고는 행사장 인사 기회조차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지역 관계자들의 무시도 일상이었다. 지지자들조차 '설마 되겠냐'고 했다. 그 마음을 '해볼 수 있다'로 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연산교차로가 교통량이 많아요. 비가 엄청 오는 날이었는데 10시간 동안 꼼짝않고 인사를 했어요. 허리 굽히는 절만 1만 번 가까이 했죠. '한 번 붙어볼 수 있구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죠. 제가 인사한 게 결국 소문이 나더라고요. 지지자들도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고요."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고, 전력을 다한 후 해낸다. 그의 인생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정치인'으로서 전하고 싶은 "뒤쳐진 사람에게 희망을"이라는 메시지도 그에 닿아있다.
"고등학교 남들 3년 다니는 거 4년 다녔고, 43명 중 42등까지도 해봤어요. 사법시험도 몇 번을 떨어지고 우리나라 나이로 33살에야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회에서 국민들 대변하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뒤쳐진 사람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도록, 그런 정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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