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실망'이 교차했던 터키 여행
[터키 여행기] 트라브존과 파묵칼레에선 어떤 일이?
▲ 기암괴석을 깎아 만든 동굴수도원이 있는 터키의 괴레메는 도자기로도 유명하다. ⓒ 류태규 제공
'직접 경험'은 인간의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여행은 직접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현자(賢者)'라고 부르는 적지 않은 이들이 "인생의 자산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여행"이라고 말했다.
경험하지 못하고 짐작만으로 인간과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판단은 선입견과 편견에 근거해있기 십상이다. "이슬람국가의 사람들은 모두 코란(Koran)만을 광신하는 종교적 독단에 빠져있다"는 것도 편견 중 하나다.
이슬람국가인 이란을 17일, 터키를 한 달쯤 여행했다. 당연지사 적지 않은 이란인과 터키인을 만났다. 여행 중 내가 만난 99%의 사람들이 이슬람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종교적 독단이나 타 종교에 대한 혐오를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친절하고 상냥했다. 아래 직접 겪은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친절을 소개할까 한다.
▲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인 블루 모스크. ⓒ 류태규 제공
▲ 기묘하게 솟은 바위로 인해 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터키 중부 지역. ⓒ 류태규 제공
여행자의 손목을 잡아끄는 터키 사내들
터키에서 이란으로 떠나기 위해 트라브존이란 도시에서 비자를 신청했다. 그런데 비자 비용을 영사관에서 받는 게 아니라 특정 은행에 가서 납부하고 영수증을 가져오란다. 난감했다. 시내 지리도 전혀 모르고 터키어도 읽지 못하는데.
그러나, 로마에서는 로마법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리를 터덜터덜 걷다가 별 기대 없이 지나는 사람 중 하나를 붙들고 "혹시 이 은행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물었다.
내가 내민 쪽지를 들여다보던 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자코 그가 이끄는 골목으로 따라갔다. 거기에 찾던 은행이 있었다. 사내의 친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비자 비용 영수증 발급을 도와주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밖으로 나와 감사의 뜻으로 담배 한 갑을 건넸으나 그는 한사코 거부했다. "좋은 여행 하길 바랄게"라는 짤막한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는 사내의 등이 크고 따뜻해 보였다.
해변 도시 안탈리아에선 우연히 만난 퇴직 교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근사하게 차려진 터키 가정식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그 퇴직 교사의 손녀가 홍차를 가져왔다 "나는 한국 음악과 가수들을 너무 좋아해요"라며 수줍어하는 터키 소녀의 때 묻지 않은 미소가 세파에 찌든 내게 감동의 시간을 선물했음은 물론이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슬람국가 터키에서 보고 느낀 친절과 감동, 그리고 선량한 웃음을. "여행을 통해 이슬람국가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 석회암과 온천이 만들어내는 터키 파묵칼레의 아름다운 풍광. ⓒ 류태규 제공
▲ 터키에선 중세와 고대 유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 류태규 제공
파묵칼레, 하루 종일 '릴리'를 기다렸는데...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터키에서 겪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재밌는 일화 하나를 들려주는 게 좋겠다.
'도미토리(Dormitory)'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본래의 뜻이 있겠지만, 여행자들에겐 한 방에 여러 개의 침대를 놓아두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자는 숙소를 지칭하는 단어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숙박업소에선 보통 화장실과 욕실도 함께 쓴다. 혼자 사용하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대신 가격이 싸다. 이슬람국가인 터키에도 드물게 이런 숙소가 있다.
기암괴석 즐비한 카파도키아를 돌아보고, 지중해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안탈리아에서 사흘을 머문 후 터키 서부 내륙에 위치한 파묵칼레(Pamukkale·목화의 성)라는 마을에서 지낼 때다. 거대하게 형성된 석회암 덩어리와 따스하게 몸을 담글 수 있는 온천, 그 인근에 위치한 고대 로마 유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당시 내 숙소가 도미토리였다. 제법 큰 방에 싱글베드가 3개 놓인. 첫날은 캘리포니아 출신 미국 사내와 함께 방을 사용했다. 형광등 켜고 끄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매너 좋은 남자'였다. 그는 발소리까지 줄여가며 걸었다. 최상의 '도미토리 파트너'라 할 수 있었다.
사건(?)은 미국인 사내가 떠난 다음 날 벌어졌다. 숙소 직원으로 일하는 터키 청년과 술 한 잔을 나누며 너나들이로 친해졌는데 그가 낭보를 전한다.
"이봐 홍, 오후에 캐나다 여자 한 명이 여기 도착한 데. 이름이 릴리(Lily)인데, 네가 묵는 도미토리를 전화로 예약했어."
'...팔자에 없이 여성과 같은 방을 쓰게 생겼잖아. 릴리? 이름이 예쁘네. 백합같이 청초했으면 좋겠다. 와인이라도 한 병 사둬야겠군.'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솔직히 릴리가 도착한다는 밤이 기다려졌다. 태국 후아힌(Hua Hin)에서 만난 스웨덴 대학생 에밀리에처럼 쾌활해서 시종일관 사람을 웃게 해주거나, 캄보디아 시아누크빌(Sihanoukville)에서 만난 영국인 타니아처럼 매력적인 금발 미인이라면 좋을 텐데...
▲ 터키 사람들은 말린 과일과 색깔 고운 달콤한 과자를 후식으로 즐긴다. ⓒ 류태규 제공
▲ 세인트 소피아 성당. 관광객들이 타고 온 2층 버스가 보인다. ⓒ 류태규 제공
감동과 실망 모두 여행자의 추억거리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하루가 길었다. 포도주를 사다놓으려다 지나치게 '오버'하는 것 같아 참으며.
그리고, 마침내 길었던 해가 서쪽으로 막 기울기 시작할 무렵, 그가 왔다. 이름이 '백합'인 22살 캐나다 대학생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숙소가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 이걸 뭐라고 말해야하나? 덩치가 무제한급 역도선수보다 컸다.
숙소에 딸린 식당에 앉아 있던 내게 환하게 웃으며 "헬로우" 인사를 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간 릴리. 외모와는 상관없이 예의 바르고 명랑해 보였다.
그런데, 아침에 소식을 전한 터키 종업원은 뭐가 웃긴지 한참을 깔깔거렸다. 하기야 나도 웃어야지 어쩔 것인가. '파묵칼레에서의 희망 가득했던 기다림'도 나중엔 즐겁게 떠올릴 '여행의 추억'이 될 텐데. 그런 생각 끝에 혼잣말을 했다.
"와인은 사러 가지 않아도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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