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편지·욕설 받았지만, 16년 전 선택 후회 안 해요
[대체복무제가 답이다④] 2001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한 오태양씨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해서 정부의 주요 인사들도 대체복무제도의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은 여전히 감옥에 갑니다. 대체복무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대체복무제도가 필요한지 대체복무제 도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병역거부자들과 평화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후회하지 않나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갈 겁니다. 이게 제 삶입니다..."
얼마 전 한 방송국 PD가 인터뷰 마지막에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냥 그 때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질문과 답변 사이의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16년 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군 입영일에 나는 훈련소가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와 병무청을 더듬어 찾아 갔다. 12월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날은 유독 매서웠다. 관계자들은 내심 당황하고 곤혹스러워 했다. 소위 입영기피자들은 신분을 감추거나 쉬쉬하는데, 나는 친구들과 함께 제 발로 갔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였다. '기피'와 '거부'는 한 끗 차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의무'와 '내가 살고 싶은 삶'의 간극도 그렇게 한 끗 차이였으나, 선택에 대한 대가는 20대 청년에게는 사뭇 가혹한 것이었다. 두 번의 구속영장심사가 있었으나 병역거부자로서는 처음으로 모두 기각되었다.
나는 곧바로 독거노인과 어린이들을 돌보는 복지기관을 찾아 공부방 한켠에서 먹고 자며 나만의 대체복무를 시작했다. 재판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린다는 명분이었다. 3년여 간 봉사활동을 하면서 100여건의 인터뷰와 300여회의 크고 작은 만남을 가졌다.
그 시간동안 '왜?'라고 사람들은 자주, 때로는 집요하게 묻고 궁금해 했다. 나는 그 때마다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내면의 소리들, 지나온 삶을 들추고 가슴팍을 헤쳐 소위 '양심'을 꺼내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뻥'이나 '사기'가 아니라 '존재'하고 '진실'임을 증명해야만 했다. 때로는 짓궂기도 하여서, '네 누이가 눈앞에서 강간을 당한다 치자.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거야?'라고 누군가는 엉뚱하게 다그치기도 하였는데, 간혹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혼돈스럽기도 하였다.
'매국노'가 준 밥 먹지 않겠다고 했던 할아버지
▲ 2002년 2월 4일 오전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를 발족식에 지난해 병역거부를 선언한 오태양씨(오른쪽)가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정단체 회원들의 거센 항의로 토론회장에서 발언을 채우지 못하고 내려온 적도 있다. 봉사하던 곳에 협박편지가 날아들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직접 찾아와 욕설과 위협하기도 했었다. '매국노'가 준비한 밥은 먹지 않겠다고 식판을 내팽개치던 무료급식소 할아버님도 있었다. 가난한 뒷골목의 공부방 아이들은 순진하게 선생님이 뉴스에 나온다며 좋아했었다.
관련 기사가 신문에 나면 악성댓글이 천개씩 달리곤 하였다. 어떤 날은 너무 속상해서 밤새 잠을 뒤척이기도 했었다. 교사의 길은 접어야했다. 직업군인이었던 사촌형은 병역거부자들을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는 정신교육에 앞장서다가 내 소식을 듣고 중단하였다. 오랜 친구가 이라크에 자원파병을 떠나면서 '이슈로서는 반대하지만, 친구로서는 지지한다'는 전화를 걸어왔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그 길을 가겠다는 후배들을 가급적 말려야 했다. 내가 처음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찾아갔던 많은 전문가분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말렸듯이. 내가 '충분히' 예상했던 것보다, 맞닥뜨려야했던 현실은 훨씬 첨예하고 외로운 것이었다. 그 길을 가겠다는 후배들에게 차마 권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2004년 가을 복판, 3년 만에 열린 재판에서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그 때 최후 진술에서 한 말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하게 '제 후배들은 더 이상 감옥에 가지 않도록...'이라는 대목에서 끝내 목이 메었던 것 같다. 뒤에서 병풍처럼 지켜주던 지인들의 숨죽인 눈물소리가 내 뒷덜미를 흠뻑 적셨다. 나는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수갑은 차갑고 무거웠고, 짐짓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은 이 모든 과정을 당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곁에서 지켜보셨던 어머니를 향한 것이었다. 나의 '죄'는 오직 '어머니'에게만 향한 것이었다. 나는 법을 어긴 대가를 기꺼이 감내했다. 스스로 선택한 감옥생활을 유쾌하게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왜 '국익'과 '평화'의 방법이 오직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는 것인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간들을 관통하였다. 열악한 군복무와 더 열악한 감옥생활 중 택일해야 하는 후배들은 지금도 안쓰럽기만 하다.
어느덧 16년, 그 사이 낙엽처럼 떨어진 수많은 젊은이들
다시금 돌아보니 16년이다. 그 당시 어느 강연에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관용하기까지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낙엽처럼 떨어져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휴... 어느덧 16년이다. 정말 후배들의 파릇한 젊음들이 낙엽으로 켜켜이 쌓이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싶다.
대체복무의 때가 무르익었다. 지금까지 1만 9000명의 청춘이 감옥행을 택했다. 이들의 수감 기간을 모두 합하면 근 4만년에 이를 것이다. 전 세계 병역거부 수감자의 90%가 한국 감옥에 있다.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만이 대체복무를 원천불허하고 있다. 유엔은 줄기차게,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정부를 향해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은 11년째 유엔인권이사국이었으며, 2016년은 의장국의 지위였다. 권위 있는 국제인권기구들이 앞다투어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의 구제방안을 호소하고 있다. 소신 있는 판사들의 무죄선고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80% 가까이가 대체복무 필요성에 동의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 또한 국회와 정부차원의 구제방안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국회에 입법 발의된 대체복무법안도 여럿이다. 새정부의 대통령도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공언한 바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다. 다수가 소수에게 베푸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이 '최소한의 합의'로부터 시작하는 '관용'과 '공존'의 해법이 대체복무제도이다. 지금도 감옥에서 겨울을 기다리는 500여명의 젊은이들이 있다. 연내 판결을 앞둔 헌법재판소가 이 기나긴 고난의 여정에 종착역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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