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로 오세요

[리뷰] 2017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무언예찬의 시대, 미술은 무엇을 말해야 하나

등록|2017.10.10 14:22 수정|2017.10.10 14:22
(이미 누군가는 벌써 잊었을) 240번 버스 기사는 자살까지 떠올렸다고 했다. 누구 하나 CCTV를 보기 전이었지만 댓글에는 '아동 학대', '살인죄', '사이코패스' 등의 키워드가 상위를 차지했다.

며칠 뒤 증거 영상이 올라왔고 최선을 다해 분노하던 이들은 모두 슬몃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을 욕하는 댓글이 다시 용솟음치듯 그자리를 가득 메웠다. 마치 분노하기 위해 뉴스(새로운 것)를 찾는 것 같다.

내면에는 특정 대상으로부터, 특정 집단으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받게 된 원형적 형태의 화(火)가 이미 자리해 있고 나 스스로가 정서적으로 동의할 수 있을 법한 적소를 찾거든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 제 분노는 게워내는 식이다.

뉴스거리는 올라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댓글은 이 이슈들로 인해 한 3년 넘게 자신의 삶이 우그러져 있던 것마냥 통렬한 멘트들이 쏟아진다. 정말 슬픈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우리 스스로가 느끼면서도 그것이 쉬이 멈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분노라는 기형적인 감정에 기대어 매일 살아가는 것을 우리 책임이라고 돌리기엔 또한 구슬픈 면이 있다.

억압이라는 비정상적 상태 속에서, 억압으로 인한 분노를 다스리며 이 나라의 진일보를 목도해왔다. 그것이 진일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내 옆의 사람에게 해가 되고 싶지 않아, 괜스레 유난스럽고 싶지 않아 여느 누구들처럼 화내지 않는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버렸다.

▲ 백현진,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 (2017) ⓒ 백현진


나는 이 시점에서 이 시대의 미술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화 하자면 <올해의 작가상>의 작품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어떻게'에 관한 태도를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무엇'을 보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시대의 미술가는 어떤 태도로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증거로 '무엇'에 해당하는 작품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런 슬픔에 대해 이런 입장을 취한다'라는 것에 대한 시각적인 결과물로 작품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작가의 '어떻게'에 해당하는 영역을 혹자는 스테이트먼트(statemen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을 새삼 미술만의 메커니즘인냥 표현했지만 소설이나 영화 역시 '나는 이러한 사건 사고 혹은 이러한 네 감정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으면 좋겠어'라는 제안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조금 더 긴밀하게 몰입되게 하고 그것에 기대어 제 증거물들에 신빙성을 더하는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음악, 무용, 어떠한 장르의 예술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 샛길로 빠지면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도발적이며 자극적이다. 그것은 위계적이며 그래서 또한 자본주의적이다. 12월에 그 '작가상'을 수상하게 될 그 작가가 마치 올해 활동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처럼 들리게 하는 착각을 준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작명으로부터 발생하는 필요 이상의 권위에 대하여 전적으로 긍정하는 바이다. 권위가 시선을 부른다. 그리고 <올해의 작가상>은 그 시선들에게 매년 꽤 의미있는 메시지들은 전달해왔다.

작년에는 외국인 노동자를 주제로 하여 터전을 기준삼아 편가르기를 하는 우리의 인식을 반향하게 했고 재작년에는 사각지대라는 제도권 밖의 영역을 관객으로 하여금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시스템이라고 하는 이 사회문화적 규준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즉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지는 낯간지러운 호객행위에도 불구, 매년 수상하는 작가들의 주제의식이 그 타이틀을 내어줌에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반성케 하는 구석이 있다.

다시 돌아와 그들의 '어떻게'에 관하여 계속 얘기해보려 한다.

이번 2017 올해의 작가상 전시장의 신작들 속 그들 역시 '올해의 작가'로서의 사명감은 없다.(이것은 매년 비슷했다) 그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시대의 올바른 작가상(象)은 무엇인지, 혹은 올해의 대표자로서 전달해야 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또한 없다. 오직 관객이 그들의 작품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와 작품을 조작하고 체험하며 나아가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소비하고 돌아가길 바라는 염원만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느낀 올해 네 작가의 공통점은 여기서 좀 더 들어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자신으로부터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이들의 태도가 이번 전시의 관람객들에게 강력한 힐링으로 가닿으리라 보는 것이다. 작품이 특히 컨템포러리 시대에 그것이 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완성된다는 표현은 이미 클리셰가 돼버린 지 오래다. 그것은 구상이 타블로에서 튀어나온 이후부터, 조소가 좌대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제 스스로의 존립을 보장받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대전제이기도 하다.


'그 시절의 저는 아마 그게 힘들었었나봐요', '제가 찍어온 소스가 저에게 '이렇게 해라'라고 이야기 해요', '어느 순간부터 제 작품에 소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올해의 그들이 제 작품에 대해 해설하는 방법은 대개 이런 식이다. 제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주권마저 가상의 누군가에게 일임한 것 같다. 객관화를 넘어 타자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것이 올해 선정된 네 명의 작가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지금(只今)의 예술 경향이다. 그리고 '누가 이 경향을 가장 흥미롭게 시각화 했는가'라는 기준 아래서 박경근, 백현진, 써니킴, 송상희 네 명의 작가가 선정되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현재의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이런 식의 태도는 '이 시대의 예술가는 관객의 머리 속에 어떤 이미지를 투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끝에 취하게 된 '어떻게'의 행동양식일 것이다. 미술이 교조적으로 군림하지 않되 유효할 수 있도록, 요란스럽지 않되 외면 받지 않도록 그들은 미친듯이 고민한 끝에 그들이 생각한 최선의 예의(manner)를 내놓는다.

우리는 그 작품들 속에서 '내가 어찌 예술한답시고 너의 슬픔을 소재 삼을 수 있겠어.(송상희)', '나는 작가로서 완벽한 이미지를 좇고 있지만 이것이 어찌 네게도 완벽한 것이라 강요할 수 있겠어(써니킴)', 혹은 '작품 안에 의도를 숨겨 놓고 찾아보라는 식으로 어찌 작품의 주인인 너를 기만할 수 있겠어(백현진)'와 같은 그들의 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한 마음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의 형식이 볕처럼 따뜻한 색온도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집중해 작품을 체험해보면 그러한 형식이 우리 속에 늘 내재하며 불안하게 만든 그 원형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것들을 우리 속에서 꺼내주어 대신 울어주는 퍼포먼스로 나타난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 해야겠다.

▲ 써니킴, <서있는 Standing>, (2015) ⓒ 써니킴

전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써니킴의 전시장에는 조명을 켜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의 작품은 매 찰나 다른 이미지의 작품이 걸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상주의적 계산이 아니다. 그것은 흐르는 것의 속성을 띠지만 영상의 것은 아니다. 그녀가 좇는 완벽한 이미지에 천착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고안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녀는 전시장의 한 가운데 설치 미술처럼 보이는 회화를 설치해 두었다. 그 작품은 회화의 것이다. 그녀의 작가의도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다다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헷갈리지 않고 명료하다는 뜻이다.

교포시절 온전한 교감 혹은 소통에 대한 부재 속에서 완전한 이미지에 대한 갈증이 시작되었고 소녀의 뒷모습, 그 소녀의 교복, 정물에 가깝게 멈춰진 자연 등 그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한 허구적 요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Landscpae>는 그 요소들 중 하나인 허구의 배경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체험인 것이다. 우리가 그녀의 타블로 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이미지의 배경을 체험하는 순간이니 작품이 회화의 것이 아닐리 없다.

무례하게도 그녀의 삶을 쉽게 해석되는 것마냥 환원적으로 설명했지만 우리가 그녀의 의도에 빠르게 도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의 세계를 빠르게 이해하고 되돌아 나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둠에 뛰어들기>. 이번 그녀 전시의 테마다. 우리는 그녀가 잘 빚어둔 어둠을 건네받아 관람하는 동안 그것을 체험하면 된다.

어둠은 잿빛의 배경에 있을 수도, 작품 중간에 불현듯 그려진 기둥에 있을 수도 있다. 전시장 중간에 '설치된 배경'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둠'을 마냥 따뜻하게 혹은 차갑게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당신과 나의 삶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완벽한 이미지를 좇는 과정에서 그녀가 부유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멜랑콜리한 종류의 힐링을 건네 받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완성된 것은 아니며, 또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완전한 것 역시 아니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되기 시작하는 현대 미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안드레 말로(Andre Malraux)가 본인 저서 <상상의 박물관>에 인용한 보들레르의 문장이다. 문장이 써니킴을 해설하기 위해 탄생한 것일리 만무하지만 입구의 나열된 소녀들 이미지로 시작되는 이번 써니킴 전시의 순차적 서사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 써니킴, <Landscape> (2017) ⓒ 써니킴


다음 백현진 작가의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의 경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는 활자 그대로 그의 작품이 많은 측면에서 계속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하루는 그가 와서 전시장 화이트큐브에 쓰여진 작품 소개란 위로 락카를 뿌리고 갔다. 또 하루는 입구의 나무판에 '들어오시오'라고 한번 더 락카를 뿌리고 갔고 하루는 휴게실 내부에서 작은 종이를 한 장 태웠다.


그 바람에 미술관 직원들을 잠시 당황케 했지만 그는 다음 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 향을 피웠고 사과를 두고 갔다. 그는 자주 그 휴게실을 찾는다. 새삼 작가로서 불현듯 작가의도를 공간 곳곳에 그것을 욱여넣고자 함이 아니라 그 곳이 말그대로 '휴게실'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가상의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공간이다. 실직 후 폐업한 뒤 이혼을 하게 된 작가의 친구가 부채에 시달리다 자살을 하게 된 뒤 작가에게 이 공간을 의뢰했다는 설정 아래 제작된 휴게실인 것이다.


그가 표현한 가상이라는 말이 더욱 가슴 아프다. 현실을 신랄하게 실컷 풍자하고 '하하 왜 이래 이거 다 허구의 연극일 뿐인데?' 라는 식의 코미디 프로를 보는 기분이다. 코미디의 한 코너일 뿐이면 영상을 다 본 뒤 넘어가면 되는데 이 곳은 넘어가지가 않는다. 또한 이 모든 것이 가상일 뿐이라고 치부돼버려야 하는데 공간 벽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림마저 내 삶에서 막 가져다 옮겨 놓은 것마냥 공간 속 모든 요소에 강렬하게 몰입하게 된다. 

▲ 백현진,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 2017 ⓒ 백현진


모든 이가 작품이고 모든 삶이 예술이라고들 쉽게 얘기하지만 멈춰서 그것을 눈으로 실제 목격하는 것은 꽤나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는 그것을 외면한다. 우리는 그래서 곪아버리고 집이나 차와 같은 재화로 그 환부를 덮는다. 그렇게 해서 덮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들 따라서 우선은 그렇게 그냥 산다. 그러다 후회하고 머지 않아 죽는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 중간에 작가의 깊은 사려 끝에 완성된 이 서울 한복판의 '휴게실'에 잠시나마 들러서 제 육체를 한번씩 담궈볼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휴게실 중간에 놓여있는 종이를 한번 읽어보고는 '아 이 사람 참 딱하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었음을.

▲ 박경근, <거울내장 환유쇼>(2017) ⓒ 박경근


박경근 작가의 전시장에는 서른 개가 넘는 로봇들이 일렬로 열을 맞춰 서있다. 로봇에는 하나하나 소총이 설치되어 있고 시그널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총을 움직인다. 일종의 제식을 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중 하나의 로봇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오류가 발생하는 순간 그 로봇의 무리에 우(優)와 열(劣)이라는 레이어가 발생한다. 집단이 탄생하는 순간인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이루는 정신적 원형을 추적하고 탐구하는 박경근 작가는 이런 식으로 형성된 집단이 한국 사회의 대부분을 지배해왔다고 이야기한다. 매번 그런 식의 작품을 해왔지만 자신의 훈련소 시절의 경험을 기초로 작업한 이번 작품은 특히 한국 사회 대부분을 구성하는 남성 위주의 주류 시스템과 무척 닮아있다.

우선 이번 작품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매우 높은 이미지, 매우 날카로운 굉음으로 표현된다. 위협적이거나 때론 독선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높은 층고를 십분 활용하는 작품의 거대한 공간감에서 숭고의 아름다움(The Sublime)을 경험한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바가 로봇들이 제공하는 군더더기 없는 조형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성장해온 우리는 어린 시절 운동장 조회부터 연병장 점호에 이르기까지 이 레이아웃이 주는 중압감을 본능적으로 안다.

이러한 관습 하에서 자라 완전한 통일에 대한 강박과 그것이 실현됐을 때의 쾌감을 안다. 처음 작품을 보는 순간의 우리는 경계한다. 고막을 찌르는 듯한 굉음과 여느 전시장과 달리 공간의 헤게모니가 작품에게 지나치게 넘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잔뜩 위축되지만 우리는 이내 순응한다.

그리고 패턴을 학습하고 소수의 몇몇 로봇이 범하는 오류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꼭 한번씩 발생하는 오류에 본능적으로 눈을 흘기게 된다. 이것이 작품의 의도라는 것을 깨닫고야 흠칫한다면 그것은 늦은 것이고 그것은 또한 작품이 당신에게 유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시장의 중앙에 만다라의 형상으로 서른 개의 로봇을 통제하는 중앙처리장치가 하나 있다. 전체적으로 푸른 분위기의 빛이 전시장을 지배하는 가운데 그곳만이 유독 뭔가 절대자의 모습마냥 국소조명을 잔뜩 머금고 있다. 지난 시절의 누군가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다.

▲ 박경근, <거울내장 환유쇼> (2017) ⓒ 박경근


헐리웃의 어느 천재 배우가 그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크게 두 개의 작품이 그녀의 전시장을 채운다. 델프트 블루 타일을 작품의 단위로 한 <세상이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소리 한번 없이 흐느낌으로>, 그리고 그 맞은 편에 위치한 3개의 스크린을 통해 투사되는 영상 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가 그것들이다.

그녀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만일 피부를 가진 존재였다면 그것의 질감이 이 타일과 같았을 것이라 상상한 모양이다. 그것이 사람의 피부 같다고 했다. 그리고 타일 하면 가장 먼저 고문실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 타일 하나하나에 폭발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넣어 작품 하나를 완성했고 타일 침대가 존재하는 독일 부켄발트의 생체 실험실은 영상에 담았다.

그녀는 이러한 세기말적인 폭발의 푸른 이미지들이 합쳐져 멀리서 봤을 때 하나의 단일한 조형적 아름다움으로 완성되게 작품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맞은 편의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 나는 이 두 작품이 매우 유기적으로 대화하고 있다고 본다. 조금 시각적으로 말하자면 투사되는 영상 중 하나의 영역이 맞은 편의 타일 중 하나와 같고 조금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두 작품이 매우 유사한 언어로 서로 대화하고 있다고 본다.

공간의 구조 상 두 작품의 중간에 놓인 채 감상하게 되는 관람객은 두 작품이 나누는 대화 안에서 작가 송상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서두에 나는 우리가 분노하기 위해 새로운 것(뉴스)을 찾는다고 했었다.

그녀가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아카이빙은 그녀를 추동하고 그녀의 작품이 작동하게 하는 근원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는 행위 역시 아카이빙이다. 우리는 뇌리에 데이터를 축적하여 자신들만의 크고 작은 근현대사를 성립시켜 나간다. 매일처럼 들려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존에 세워두웠던 역사가 옳았는지 혹은 오류가 있었는지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또 다시 예측한다. 그것은 창작이다. 일련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작품 활동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짜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트리거의 수단으로 뉴스를 찾는지도 모른다. "보면 열 받기만 하고... 나는 그래서 뉴스 안 봐." 많이 들어 본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것이 채널의 프라임 타임을 유지하고 포털의 메인에 걸리는 까닭은 뉴스를 찾는 이가 더 많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을 찾게 하는 좀 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힘이 앞서 말한 자신만의 서사를 만드는 일련의 창작 욕구에 있다고 본다. 그들을 놓지 않고 꾸준하게 찾아보는 것, 그것만이 가장 일상적인 애도며 묵념이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절절하게 원하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니, 독일 나치의 우생학이니 하는 거대한 주제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것이 너무 거대한 담론을 얘기하는 것마냥 보인다고 그것을 우리의 일상과 격리시켜 볼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매일 하는 그 행위가 그저 한쪽에선 공간적으로 다른 한 쪽에선 시간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임을, 우리는 그저 매일같이 하는 행위가 '올해의 작품'으로 선정 되었음을 보고 오면 된다.

▲ 송상희, <세상이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쿵소리 한번 없이 흐느낌으로> (2017) ⓒ 송상희


너무 많은 이들이 너무 많은 방식으로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상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 소수가 미디어를 쥐고 으스대는냥 떠들던 시절에 비하면 백번 옳은 방향이지만 당장에 서점에만 가봐도 뭐든 경험해보라는 처세서와 최소한의 삶을 살라는 미니멀리스트의 책이 양립하고 고전을 읽으라는 동어반복의 자기계발서가 매대를 가득 채운 바람에 정작 고전은 저멀리 밀려나 있는 무언가 아이러니한 판국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선 언어가 제 스스로를 잠식한다. 누가 무엇을 말해도 듣지 않으며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무조건적으로 끄덕이게 된다. 동기부여 모멘텀에 중독된 이의 결말은 실행이 아닌 더 강력한 동기부여 강연인 것처럼 우리는 들려도 듣지 못하고 읽어도 읽지 못하는 세상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매체로서의 언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술적 언어가 매체로서의 한계에 봉착할 때 미술은 시대에 유효한 환기로서 작동한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잘 볼 수 없듯이, 화가도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표현이 윤곽을 드러내고 진정으로 의미가 되는 것은 타인들 속에서다. 작가나 화가에게는 내적 독백이라 불리는, 개인적 울림의 친숙함을 통해 나타나는 자기 암시만이 있을 뿐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가 본인의 저서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에서 한 표현이다. 메를로 퐁티는 미술에도 무언의 언어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언어와 같은 방식의 말하기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쌍방향 콘텐츠 시대의 소비자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러한 성질의 소비자로 전락해버렸다. 점점 더 많은 콘텐츠들이 교호적 혹은 쌍방향적인 것마냥,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새시대의 예술인냥 접근하지만 실상은 우리를 좀 더 다각적으로 옥죌 뿐이다.

들여다 보면 더욱 여지는 없게 치밀할 뿐이고 그것들은 향에 식감까지 완벽하게 주입되는 매트릭스 속의 딸기 케이크 혹은 절대자의 품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될 거라는 사이비의 교리같다. 그들의 존재 이유를 보장 받기 위해 우리를 허수아비 마냥 수단삼아 세워둘 뿐이다.

볼 것도 읽을 것도, 들을 것도 넘치는 세상이다. 무언가를 끄적이라고 권유하는 플랫폼 또한 넘치는 세상이다. 언제든지 저장만 하면 전 세계와 공유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자유에서 썩 해방감을 느끼지 못한다. 편지지에 한줄 꾹꾹 눌러 적던 시절보다 왠지 더 침묵하게 되며 입체적이고 유려한 달변자들의 강연을 듣고 나와도 점점 더 헛헛해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나는 미술과 글이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메를로퐁티의 말에 기대어 이번 작품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가닿는 유효함에 대해 한번 더 얘기하려 한다. 올해는 뉴욕 한복판에서 남성용 소변기가 '샘'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지 정확히 백 년째 되는 해다. 미술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의 사물을 다시보게 하고 나아가 우리 주변에 늘상 존재했던 사물을 '처음'으로 보게 한다.

이는 그것들이 우리 인간이 어떤 소비재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거나 추켜세운다는 뜻이다. 특히 젊은 작가들의 당대(contemporary)미술이 그 기능으로 가장 정확하게 작동한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집에 가거든 어김없이 벽에 붙어있는 큰 포스터를 보게 된다. 그것들은 자음과 모음 혹은 숫자와 알파벳과 같은 기호를 그림에 빗대어 아이에게 학습되도록 돕는다. 나는 현재의 우리가 그 어린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며 또한 이 작품들의 기능 역시 그러한 친절한 포스터의 기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고 <올해의 작가상>은 그러한 현대 작가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네 명을 선정한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2017 올해의 작가상> ⓒ 국립현대미술관


국가원수가 군복이라는 폐습을 벗고 통치한 지 이제 겨우 30년 남짓이다. 그 이전까지 아플 때 어떻게 울어야 하는 지, 화날 때 어떻게 화내야 하는지 혹은 정신과 마음 한 켠이 고장 났을 때 어떻게 재활해야 하는지 따위에 이 나라의 시스템이 주목했을 리가 만무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울어야 할 땐 참고, 화가 날 땐 참고, 몸이 아닌 정신이나 마음 따위가 고장 났을 땐 또 참으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성 세대에게는 어쩌면 이러한 영역에 대한 연구 혹은 고민이 여전히 구태의연하며 그것을 위한 재활도구가 사치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미술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외면 받은 채 지내왔지만 줄곧 남아 있었다. 그 끝에 지금에는 우리에게 치유를 이야기할 만큼 사상적으로도 성숙한 상태이며 또한 형식적으로 세련되어 세계 어느 미술상도 종종 받아온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꽤나 위안을 안겨주는 주는 부분이다.

이 사회 시스템의 그 누구보다 이들이 우리의 분노에 대해, 우리의 아픔에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다. 알약 몇 개와 같은 치료로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않는 근원적인 것임을 그들이 안다. 그들은 그들의 작품이 우리에게 최대한으로 유효할 수 있도록 마음 한 켠 허투루 쓰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그러한 터전에서 분투하고 있는 작가들 중 한 명 정도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정하여 축하함으로써 그들이 매 순간 이 나라에 꿋꿋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념하는 것은 꽤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전시는 내년 2월 18일까지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