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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울 권리'를 충족시키는 이 영화, 대사가 마음에 박힌다

[리뷰] 혼자가서 보세요... <아이 캔 스피크>

등록|2017.10.13 14:34 수정|2017.10.13 14:38
*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사진 ⓒ 리틀빅픽처스


"Yes, I can speak. (네, 증언하겠습니다)"

저 한 마디에 청문회장은 숨소리마저 멈춘 듯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60년 간 숨기고 살아온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옥분(나문희 분)은 천천히 옷을 들춰 욱일승천기 문신과 칼자국으로 얼룩진 배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하지 않고 살아왔던 옥분에게 증거가 부족하다며 청문회 증언 듣기를 거부하려던 이들에게 이렇게 절규한다.

"내가 증거여. 내 몸이... 여기 살아있는 모든 피해자가 증거여. 왜 증거가 없다고 하는 거여!"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삶을 그린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무겁지 않지만 장면 중간 중간 코끝이 찡해지거나 펑펑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가 '펑펑 울 권리'를 말하며 '혼영(혼자 영화보기)'을 강추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위안부 피해자를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나 만화가 많지만 <아이 캔 스피크>가 주는 감동은 이전의 작품과는 다르다. 2007년 연방하원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에 앞서 이용수 할머니가 공청회에서 증언하기까지의 사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후반부는 사실감이 더해진다. 가족들의 외면, 사회의 몰이해와 손가락질 속에서 이중의 고통을 겪으며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만을 기다리며 용기 있는 증언에 나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한은 언제쯤 풀리게 될까.

구청의 블랙리스트 일명 도깨비 할매 옥분은 시장판을 헤집고 다니며 튀어나온 간판, 위험한 상태의 건물이나 도로 등 민원을 8000건이나 넣어 구청 직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자 골칫거리다. 건물의 재개발과 얽혀 건설사 편에 선 구청장과 구청 직원들은 원칙과 절차가 답이라 믿는 건축 관련 담당 민재(이제훈 분)에게 골치 아픈 도깨비 할매의 민원을 담당해 해결할 것을 요청한다.

▲ 영화 <아이 캔 스피크> ⓒ 리틀빅픽처스


원칙을 고집하는 민재는 도깨비 할매 옥분이 건넨 증거 자료를 자료보관소로 보낸다. 우연한 기회에 민재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알게 된 옥분은 집요하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며 민재에게 매달린다. 그렇게 좌충우돌 영어 과외교사와 학생으로 새로운 사적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알아간다. 어쩌다 민재는 옥분에게 개인적인 삶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옥분이 왜 그렇게 영어를 절박하게  배우고 싶어 하는지 진정한 속내는 알지 못한다.

옥분에게 LA에 살고 있는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민재가 통화를 시도하지만 동생은 누나 옥분이 위안부였다는 사실 때문에 누나와의 통화마저 거부한다. 남동생과 가족을 위해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60년 동안 숨기고 살아온 옥분에게는 자신을 자살에서 살려 낸 친구 정심이 있다. 정심은 일본의 전쟁 범죄인 위안부 피해의 진실을 알리려 미국 등을 다니며 중언을 한다. 정심이 알츠하이머로 기억력을 잃어 연방하원의 공청회 증인으로 나설 수 없게 되자 옥분은 마침내 자신이 증인으로 나서기로 결심하고 엄마의 산소를 찾아간다.

"엄마! 나한테 '욕봤다'라고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됐는데. 엄마... 왜 그랬어..? 아들 앞 길 막을까봐 그랬어? 엄마 '우리 딸 참말로 욕봤다'고 한마디만 해주고 가지."

옥분은 울음을 추스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엄마의 말대로는 못허겄어. 돌아가신 엄마보다는 정심이가, 정심이 보다는 내가 더 중허니께."

옥분이 중언 중에 한 이 말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25년 간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준다.

"I am sorry. Is that so hard? (미안하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증언장 밖까지 따라 나오며 '얼마나 돈을 받아내려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소리 지르는 파렴치한 일본인을 향해 옥분은 이렇게 일본말로 외친다.

"빠가야로! 소노 키타나이 오까네 이라나이또 츠따에로! (돌대가리야! 더러운 돈 필요 없다고 전해!)"

▲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사진 ⓒ 리틀빅픽처스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이미 고인이 된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 나와서 늘 하던 말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전쟁범죄 당사국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정의다.

위안부 패해자들이 꼭하고 싶은 말은 전달됐지만 아직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꼭 듣고 싶은 말은 듣지 못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로 살아야 했던 끔찍한 과거를 용기 있게 증언한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생존자가 살아있는 동안 졸속으로 합의한 '한일위안부 협상'이 파기되고 제대로 된 합의를 통해 일본은 진심어린 공식 사과를 해야만 한다.

옥분이 일본 전쟁 범죄 희생자인 성노예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해왔던 위안부 시절의 사진 한 장. 옥분이 영어를 배워 꼭 하고 싶었던 증언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면 당장 <아이 캔 스피크>를 보러 달려 갈 일이다. 단, 손수건과 휴지를 잊지 말고 챙겨가고 빨갛게 부은 눈을 보이고 싶지 않거나 '펑펑 울 권리'를 필요로 한다면 혼자 영화관에 갈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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