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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을 떠올리게 하는 산성, 팔공산 가산산성

[팔공산 역사기행②] 파계사, 가산산성

등록|2017.10.10 11:52 수정|2017.10.10 11:52
귀공자 타입의 파계사 원통전 목조관음보살좌상

파계사 원통전 외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느 승려가 선(禪)을 수행하는 세계를 필묵으로 그려낸 내용인 듯했다. 원통전 내부에 들어가자 세월이 묻어나는 조각과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천장의 장식은 왕관장식이라 했고 불단은 현재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원통전 내부 중앙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보호를 위한 유리 상자 속에 앉아있었다. 이 불상은 고려후기의 양식을 본받고 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안내판에 적혀있지 않았다. 불상의 크기는 아담했으나 외관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내가 본 여러 불상 가운데 가장 화려한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귀공자 타입(?)이라고나 할까.

금을 입힌 데다 꽃모양을 정교하게 붙인 세 겹의 높은 관과 양 어깨를 덮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세심한 정성과 손길이 그대로 전해졌다. 한편, 지난 1979년 이 불상의 배 안에서 영조가 실제 입었다고 전하는 도포와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영조와 파계사의 인연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유물일 것이다. 불상 뒤의 벽면에는 영산회상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석가가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 했다. 무엇보다 이 그림 제작에는 조선 왕실이 관여했다. 앞서 말한 파계사와 영조의 인연을 말해준다. 원통전이 좀 더 장식적이고 화려한 그림, 조각, 불상을 품고 있는 까닭은 왕실과의 관계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원통전 앞에는 중앙에 구멍이 뚫려져 있는 널찍한 돌이 두 개씩 양 쪽에 놓여 있었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돌과 돌 사이의 구멍에 가는 나무기둥을 끼워 넣지 않았을까 짐작되었다.

약방의 감초, 파계사 산령각

파계사 원통전 뒤쪽으로는 산령각(山靈閣)이 있고 그 옆에 기영각(祈永閣)이 비스듬히 자리 잡고 있다. 또 그 중간에 오래된 돌의 빛깔을 은은하게 내뿜는 석등이 있다. 팔각기둥에 연꽃이 그려져 있는 좌대로 받쳐진 석등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등의 형태다. 다만 석등을 자세히 뜯어보자 석등의 지붕 끝이 눈길을 끌었다. 지붕의 끝을 단조롭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위쪽으로 살짝 올림으로써 미적 감각을 더 보탠 것이 흥미로웠다.

산령각은 사실 우리나라 사찰의 감초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 고유의 토착 신앙인 산신 신앙과 불교가 조화를 이룬 흔적이다. 산령각 외벽에는 호랑이 두 마리와 한자로 산왕대신이라 적혀있는 산신이 그려져 있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나는 산령각 뒤편을 걷다 땅에 이리 저리 널브러져 있는 돌배를 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니 돌배나무에 돌배가 열려 있었다. 이날 나는 돌배를 처음 보았다. 땅에 떨어진 돌배를 하나 주워 맛을 보았는데 몹시 달콤했다. 다만 조금 단단하고 크기가 조목만할 뿐이었다.

기영각은 한자 뜻을 그대로 풀면 '영원히 기도한다'라는 뜻인데, 설명문에 따르면 영조를 위해 기도한다는 의미였다. 기영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여기서 팔작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자 모양으로 보이는 지붕을 뜻하고, 맞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人자 모양으로 보이는 지붕을 뜻한다. 파계사에선 원통전과 산령각은 맞배지붕이고, 기영각과 설선당, 적묵당은 팔작지붕이었다. 전반적으로 조선후기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현응대사가 이 절을 삼창한 모습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는 지붕의 구체적인 종류보다 곡선의 자태에 좀 더 관심이 갔다. 사실 우리나라 사찰이나 전통가옥을 보면 직선이 아닌 유연한 곡선이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단조롭고 획일적이며 아무 감흥이 없는 일직선에 비해 곡선에선 여유와 틈이 묻어난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의 전통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화려한 단청을 뽐내는 기영각의 외벽에도 역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네 면에 각기 한자로 서왕모(西王母), 태을성군(太乙星君), 직녀은하상봉(織女銀河相逢),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적혀 있었다. 우리 고유의 전통 토속신앙과 도교의 영향으로 보였다.

"실로 천험의 요새", 가산산성

가산산성(架山山城). 나는 처음으로 그곳에 이르렀다. 나는 가산산성을 찾기 위해 두 번이나 발걸음 했다. 한 번은 파계사에서 가산산성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해 가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을 못 맞추어 실패했다. 그리하여 파계사에서 가산산성 쪽으로 방향을 잡아 쉴 새 없이 걸었으나 너무 멀어 결국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이후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가산산성 주차장에서 내려 아래쪽으로 걸어가자 저 멀리 성벽이 보였다. 성벽은 마치 영상과 사진에서 흔히 본 조선시대 읍성(邑城)을 떠올리게 했다. 왜 나는 산성인데도 읍성의 성벽을 떠올렸던 것일까? 어쩌면 이 성이 비록 산성이기는 하나 민초들의 삶과 고락을 같이한 읍성과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성벽은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고, 하늘은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 하늘로 너무나 청명했다. 하늘의 고운 색깔과 하늘 아래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산성을 지탱하는 오래 된 돌의 누런빛 색깔이 너무나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성벽은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 군데군데 엇물려 쌓은 흔적이 보였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동안 성을 쌓아 오며 터득한 지혜의 산물이리라. 또 옆쪽에는 배수구도 보였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고 있었다. 단지 떨어진 낙엽과 단풍들이 물이 흐르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는 총구가 있었고, 성벽 위 중앙에는 망루가 있었다. 망루는 기와로 덮여 있었는데, 후대에 이루어 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고 한자로 적힌 현판도 보였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의 허물어져가는 돌계단을 이용해 망루 안에 들어가 보니 꽤 서늘하면서 저 멀리의 산과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성 내부로 들어가자 나무와 풀로 우거져 있었다. 또 근래 만든 나무로 된 의자와 탁자도 있었다. 나무는 오랜 세월을 견디어왔는지, 줄기의 굵기가 매우 굵었다. 그러나 성 안은 당시의 모습을 알아가기에는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다. 그저 나뒹구는 돌멩이와 낙엽 그리고 오래된 고목과 잡풀이 무성했다. 물론 이날 내가 돌아본 곳은 가산산성 중에서도 남문 쪽에 해당된다. 아쉽게도 이날 나는 시간이 부족해 동문과 북문 쪽은 돌아보지 못했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걸어 나왔다.

가볍게 땀이 날 정도로 걸어서 나오자 왼편에 대나무 숲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대나무는 잔잔한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대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혹시라도 옛 문헌에 가산산성과 관련된 기록이 있을까 하여 옛 기록을 뒤져보니 <인조실록(仁祖實錄)>에 관련 기사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가산산성은 인조 17년인 1639년에 축성되었으며 부산에서 새재(조령)로 가는 통로에 위치하여 "남쪽 지방의 방비하는 곳으로서는 실로 천험의 요새"였다고 한다(<인조실록>권44 21년 3월 3일 조에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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