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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하며 철탑에서 27일... "어려운 노동자 봐줬으면"

[인터뷰] 지난 봄, 고공단식농성 한 고진수 세종호텔노조원

등록|2017.10.16 11:21 수정|2017.10.16 11:29
"단식 투쟁을 하겠소!"

화재의 영화 <박열>. 일제 식민지 시절의 조선인 '박열'이 일본 본토 감옥에 투옥되어 벌어진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에서 박열은 일본 천황에 대한 자신의 대역죄를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옥중 단식을 단행한다. 일제는 식민지 국가의 시민이, 그것도 자신들의 본토 감옥에서 벌이는 옥중 단식이 크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신문에는 '박열 단식'이란 문구가 화제의 키워드로 등장했고, 교도관들이 단식을 막기 위해 억지로 박열의 입에 음식을 밀어 넣는 장면이 묘사됐다. 

'단식'은 식민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파장을 불러왔음에 틀림없다. 이렇듯 단식은 힘없는 민중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무기였다. 단식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처절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단식'에 대한 뉴스가 꽤 많아졌다. 고공단식 농성을 이어갔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랬고,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한 아버지도 장기간 단식에 돌입했었다. 가장 최근, 지난 대선을 앞두고 광화문 일대에서 고공 단식 농성을 했던 노동자가 여기 또 있다. 그의 이름은 고진수. 세종호텔에서 일식 셰프로 일하는 노동자이다. 평범한 노동자인데, 그는 왜 철탑에 올라 27일 동안이나 고공단식농성을 했을까?

그를 만나다

지난 7월, 반팔 차림에 짧은 스포츠머리의 그가 병원에 들어섰다. 그간의 고공단식농성 때문인지 키에 비해 야위어보였다. 예약된 시간에 맞춰 자신의 주치의 이보라 선생님의 진료실로 향했다. 고공단식농성 당시 의료지원을 받은 인연으로 5월 10일 단식 중단 후 수개월 가까이 지나도록 꾸준히 찾아와 건강상태를 점검받고 있다.

진료 받는 고진수씨고공단식농성 당시 진료해줬던 이보라 선생님을 찾아 진료받고 있다 ⓒ 이준수


환자와 의사라는 딱딱한 관계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진료 시간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마치 전장을 함께 누비던 전우가 다시 재회한 분위기랄까. 세월호 주치의이기도 했던 이보라 선생님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공단식농성을 이어가던 그들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철탑에 올랐다. 세월호, 백남기 농민 사건 등의 큼직큼직한 사건들을 겪다보니 의연해보였다. 고진수씨는 고공단식농성 당시 이보라 선생님을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처음 철탑 올라오실 땐 긴장하시더니, 이후엔 너무 자연스럽게 올라오셨어요."

조금 더 많은 얘기가 듣고 싶어서 진료를 마친 고진수씨를 모시고 이보라 선생님과 함께 인근 카페로 향했다. 고진수씨는 자신의 건강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키듯, 에어컨 바람이 직접 닿지 않는 사각지대 자리를 선호했다.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고진수씨가 철탑에 올라 단식을 했던 이유와 과정에 대한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세종호텔 고진수씨진료후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이준수



세종호텔 입사, 그후 

고진수씨가 1996년 처음 취업한 곳은 구미의 한 전자제품 업체. 그는 약품처리에 대한 부다감과 하루 2교대 근무가 몸에 맞지 않아 1년 뒤 과감하게 회사를 나왔다. 그 후 영업을 비롯한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요리를 배우고자 1년 간 어느 유명한 칼국수 가게에서 무임금으로 일을 배웠다.

독립하여 음식점을 창업했지만 의욕만 앞선 기술 부족을 절감하고 업장을 접었다. 하필 시점이 "IMF라서 어떤 일을 해도 잘 안됐다"는 그의 말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1999년 서울에 상경해서 여러 군데에서 일식요리를 접하며 배웠고, 2001년 지인의 소개로 세종호텔에 입사를 하게 됐다는 고진수씨.

"일류 호텔에 입사하게 되어 큰 기대감을 갖게 됐다"며 당시 소회를 밝혔다. 호텔에는 비정규직이 있었지만 근무 여건과 급여 등이 정규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들은 1년 만에 정규직이 되기도 했고, 7년이 지나도록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는 직원도 있었다. 세종호텔은 세종대학교의 수익사업체이다. 당시 비리사학으로 여러 차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만큼은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직원 간에 유대관계가 있었고, 새로 직원이 입사하면 유니온샾 조항으로 인해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세종대학교 비리 사건이 터지자 외부에서 민주인사들이 영입되어 들어왔고, 덩달아 호텔의 근무 여건도 더 좋아졌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연봉도 10% 이상 오르고, 단협으로 1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 전환을 할 수 있도록 조항도 만들었다"고 고씨는 회상했다.

문제는 MB 시절

세종대학교에서 부정을 저질러 쫓겨났던 인사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종호텔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는 지속적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경영진들은 마침 복수노조 설립이 허용되면서 포섭했던 간부들을 중심으로 노조 탈퇴를 종용했다.

"2011년 7월에 복수노조 적용되자마자 미리 포섭했던 현장관리자들을 이용해서 조합 가입을 받기 시작했죠. '지배인', '주방장'처럼 직급 높은 사람들이 가입서를 받으러 다니니까 거부하기 힘들죠. 부서마다 편차가 있긴 있었어요. 객실은 단단하게 지켰는데, 홀, 웨이트리스 쪽은 그쪽으로 많이 넘어갔어요. 그러면서 단협 어기고, 전환배치 하고, 이런 일들이 많이 생겼죠.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할 4명을 약속으로 어기고 임의대로 무기계약 형태로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무시했어요."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그의 눈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50여명의 노조원들이 파업을 시작했지만, 며칠 이후엔 30여명으로 줄고, 어느 새 그들은 소수노조가 됐다. "38일간의 로비점거 농성 결과 4명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환 배치는 막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경영진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 호봉제였던 일반 직원들이 연봉제로 바뀌면서 대표이사가 임금을 30% 이상 삭감할 수 있는 조항까지 만들었다. 결국 4500만 원가량의 연봉을 받던 호봉제 노동자는 2900만 원의 연봉제 노동자로 바뀌었다. 특히 소수노조였던 세종노조 노동자들에게 더 가혹했다. "5년간 부서이동을 안 시킬 테니 세종노조를 탈퇴하라는 압박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2015년 1월, 13명밖에 남지 않은 노조원들이 다시 저항에 나섰다. 

호텔 앞 선전전, 내부 선전전 등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하지만 법은 노동자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생계도 이어가야 했다. 소수 노조원으로서 딱히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그들은 타 업장의 조합원들과 공동투쟁을 계획하게 된다. 결국 "2015년 11월에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민주노조 사수를 걸고 박근혜 정부 퇴진을 외치게 됐다"고 한다. 

철탑에 오른 노동자들, 그들의 건강은...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는 이 때 뿐이라고 생각했다던 노동자들은 갑작스레 철탑에 오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4월의 어느 날, 장기 투쟁 사업장 소속 노동자 6명은 고공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그는 모두가 적폐 청산을 외칠 때,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 현안도 해결되길 희망했다고 당시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며 사람들의 관심에서 철탑에 오른 노동자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공단식농성 광화문 일대에서 고공단식농성을 이어가던 사진이다 ⓒ 고진수


누가 대통령에 뽑힐 것인지에만 집중될 뿐, 정작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소외됐다. 30일은 버텨보려고 올라갔지만 건강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물과 소금만 섭취하는 그들의 건강이 온전할 리 없었다.

고공단식 노동자들의 건강도 고려해야 했기에, 그들의 건강을 살피고자 녹색병원의 이보라 과장을 비롯한 몇몇 의료진이 철탑에 올랐다. 그들의 건강상태를 지속적으로 파악하고 처치하는 게 의료진의 임무다. 이보라 선생은 당시를 회상했다.

"한상진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왔어요. 갑을오토텍 투쟁 때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그날 갑자기 연락 와서 진료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정식 진료를 할 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혈압계, 혈당계 챙겨가고, 혈액검사를 여러 번 했었죠. 저녁에 병원에 와서 임상병리 갖다 주고, 결과 나오면 연락드리고 하루하루 상태가 변하니까 체크했죠."

의료진이 노동자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철탑에 오른다는 건 예전엔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당시 철탑 위에서 진료 받았던 노동자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의료진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단식도 단식이지만 고공을 병행하다보니, 처음 올라갈 때도 불안정한 상태로 했죠. 일단 이보라 선생님이 올라올 때 안정감이 느껴졌어요. 처음 30일 이상 해보자고 올라왔는데, 그냥 있는 것보다 의료에 대한 부분이 병행되니까 안정감이 생기더라구요."

그들은 촛불 정국에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철탑을 내려와야만 했다. 5월 5일(22일차)에 노동자 한 분이 건강이 나빠져 내려왔고, 나머지 노동자들도 5월 10일(27일차)에 모두 내려왔다. 아쉬움도 아쉬움이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말에 허탈감이 느껴졌다. 노동자들은 내려오자마자 병원으로 이송되어 진료를 받았다. 철탑 위에서 그들을 돌봤던 이보라 선생님을 찾아 광화문에서 녹색병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진수씨는 바람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노동자의 어려운 상황이 개선되도록 거리에서 함께 외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을 위해 지금처럼 의료진들이 조금 더 신경 써 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녹색병원 인권치유센터는...
녹색병원은 최근 서울시와 공공보건의료 안전망 병원에 관한 MOU를 체결했습니다. 본 병원은 1980~90년대 원진레이온 공장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투쟁의 성과로, 1999년 6월 구리시에 설립된 원진녹색병원에 이어 2003년 9월 서울시 중랑구에 400병상 규모로 세워진 종합병원입니다.

녹색병원은 '편안한 병원․돌보는 병원․따뜻한 병원'을 지향하며 직업병․산재로 고통 받는 노동자 치료뿐만 아니라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물리적․정신적 아픔을 겪어온 환자 및 일반 지역주민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는 인권클리닉(현 '인권치유센터')을 개설해 인권침해로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받아온 환자 치료에 매진하는 한편, 우리사회 인권지수를 향상시키고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는 의료를 극복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엔 여전히 의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약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민간의료기관으로서 꿋꿋하게 공공보건의료 기능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이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며, 후원의 손길을 내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고공농성 건강권을 비롯해 성소수자, 장애인 건강권, 인권피해자 등의 이슈에 의료적 개입으로 건강 불평등을 해결해나가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녹색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인권치유센터 의료지원 후원문의: 02)490-2300 greenhospitalh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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