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비밀주의', 사고은폐에 근무 중 마약까지
[에너지 대전환, 내일을 위한 선택 6] 한수원의 원전 부실관리 실태
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 오염,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가 보여 준 원전재난의 가능성은 '더 이상 위험한 에너지에 기댈 수 없다'는 깨달음을 확산시키고 있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으로 본격화한 탈핵 논쟁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에너지체제를 전환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 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 <단비뉴스>는 기후변화와 원전사고의 재앙을 막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 에너지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 지 모색하는 심층기획을 연재한다. - 편집자말
지난 6월 19일 오전 10시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열린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 무대에 오른 문재인 대통령과 인근 월례초등학교 학생 8명이 나란히 놓인 9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자 '더 안전한 대한민국'이 한 글자씩 적힌 하늘색 대형 풍선들이 행사장 스크린 위로 둥실 떠올랐다. 지역 주민과 한수원 임직원 등 참석자 200여 명이 힘찬 박수로 호응했다.
"과거 정부 원전 운영 투명성 부족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고리1호기는 지난 40여 년간 전력생산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나 이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확고한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았다"며 "(노후 원전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새 정부 원전 정책의 주인은 국민"이라며 "원전 운영의 투명성도 대폭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지금까지 원전 운영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고, 심지어는 원자로 전원이 끊기는 블랙아웃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과거 정부는 이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은폐하는 사례도 있었다"며 "새 정부에서는 무슨 일이든 국민의 안전과 관련된다면 투명하게 알리는 것을 원전 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덧붙였다.
▲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 대통령은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국민께 투명하게 알리는 것을 원전 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 KTV 중계화면 갈무리
문 대통령이 이날 언급한 '블랙아웃 사태'는 지난 2012년 2월 9일 저녁 8시 34분에 일어난 '완전 정전' 사고를 말한다. 작업자의 실수와 비상발전기 고장이 겹치면서 고리 1호기의 전원이 12분간 완전히 꺼졌다.
그날 고리 1호기는 계획발전정비기간이라 원자로가 멈춰있었지만, 핵연료를 식히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냉각수가 증발하고 연료봉이 녹아내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다. 당시 12분간의 정전으로 냉각수 온도가 36.9도에서 58.3도로 21.4도나 올라갔던 것으로 조사됐다.
에너지정의행동 이헌석 대표는 "당시 사고는 7단계(후쿠시마 급)까지 구분되는 원전 사고 중 2단계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것 중에는 가장 큰 '역대급' 사고였다"며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사실이 한 달이나 은폐됐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사고는 법에 따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즉각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발전소장 등 관리자들은 '없던 일로 하자'고 입을 모은 뒤 사고 사실을 숨겼다. 이 사건은 고리원전 인근 식당에 갔던 김수근 당시 새누리당 소속 부산시의원이 옆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해 3월 12일 세상에 알려졌다.
원안위는 은폐를 모의한 문모 발전소장 등 핵심관계자 5명을 고발하고 한수원에 대해서는 과태료(300만원) 및 과징금(9000만원) 부과처분을 했다. 그러나 법원의 최종 판결이 벌금형 등에 그쳐 처벌이 미온적이었다는 논란을 낳았다.
후쿠시마 '오래된 것부터' 폭발, 노후 원전 위험성 부각
정전 은폐 사건은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뒤 30년 설계수명을 1차 연장(10년)해 가동 중이던 고리1호기의 추가 수명연장 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지난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노후 원전의 안전성이 도마에 오르자 환경단체들은 국내 최고령 원전인 고리1호기의 수명을 더 이상 연장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지진해일(쓰나미)이 닥친 후쿠시마 원전에서 6기의 원자로 중 오래된 순서대로 1~4호기가 폭발하자 '노후 원전일수록 자연재해에도 더 취약하다'는 사실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1~4호기는 1971년부터 1978년 사이에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2015년 고리1호기의 2차 수명연장 신청 기한이 다가오자 부산환경운동연합, 부산YWCA 등 120여개 지역시민단체가 '고리원전 1호기 폐쇄 부산범시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정전 은폐 사건 후 더 나빠진 주민 여론을 의식한 지역 정치인들도 여야 할 것 없이 폐로를 촉구했다. 결국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위원회는 2015년 6월 한수원에 고리 1호기 영구정지를 권고했고, 한수원은 이를 수용하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 지난 6월 19일 0시를 기해 영구 정지된 고리원전 1호기(맨 오른쪽). 원자로는 가동정지되었지만 앞으로 약 5년간 사용후핵연료의 열을 식혀야 하며, 이후 수십 년이 걸리는 폐로 과정을 밟아야 한다. ⓒ 강민혜
국내 가동 원전 24기, 밀집도 높아 안전 우려 증폭
고리 1호기는 전기 생산을 중단했지만 우리나라엔 여전히 24기의 원전이 가동되고 있다. 또 추가로 11기를 건설(5기) 중이거나 계획(6기)하고 있다. 한국은 원전 밀집단지(가동 원전 6기 이상) 보유수, 원전 반경 30킬로미터(km) 이내 인구수에서 모두 세계 1위를 달린다.
특히 부산과 울산은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이다. 부산 기장군에는 사용후핵연료가 남아있는 고리 1호기, 가동 중인 고리 2·3·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등 원전 6기가 자리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에는 가동 중인 신고리3호기, 내년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할 신고리 4호기, 잠정 건설 중단 상태인 신고리 5·6호기가 있다. 신고리 5·6호기까지 짓게 되면 약 380만 명이 사는 30km 반경 안에 원전 10기가 들어서는 것이다.
▲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총 24기다. ⓒ 박진홍
▲ 가동 중인 원전을 6기 이상 보유한 원전 밀집단지가 우리나라에는 4곳이나 존재한다. ⓒ 강민혜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한 지역에 원전 10기가 밀집하게 되면, 하나의 원자로에서 사고가 터졌을 때 옆에 있는 원자로에서 연쇄적으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수백만 주민이 사는 도시 지역에서 후쿠시마급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파장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원전은 지진처럼 불가항력적 재해의 가능성 외에 일상적인 운영에서도 '과연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의구심이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국내 원전에서는 지금까지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지난 3월 28일에는 고리 4호기에서 냉각수가 지나치게 많이 새는 사고가 일어나 원자로 가동을 수동으로 정지시켰다.
냉각수는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뜨거운 열을 식혀주는데, 정상적인 상태라면 시간당 1.5리터(L) 정도의 물이 원자로 건물 내부 바닥의 수집조(저장탱크)에 고인다. 그런데 이날 고리 4호기의 경우는 정상치의 6배인 시간 당 9L의 냉각수가 수집조로 흘렀고, 총 과다누출량은 300L를 넘었다고 한수원 측이 발표했다.
한수원의 이만희 홍보실 차장은 지난 13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증기발생기 하단부 밸브에 금이 가서 누설이 있었고, 원전운영기술지침에 따라 가동 정지시켰다"며 "(원전 설비 내에서 발생한 누설이라) 방사선 외부 누출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밸브에 왜 금이 갔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원자력안전기술원(KINS)에서 조사 중인 사항이라 자세한 답변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종운 동국대 원자력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냉각수가 원전 설비 외부로 누출되지 않았다면 300L정도의 과다누설이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며 "문제는 한수원이 (냉각수 과다누설이 발생할 정도로) 밸브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한수원의 원전 관리가 소홀함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얘기다.
▲ 지난 3월 고리원전 4호기의 증기발생기와 배수관을 연결하는 밸브에 금이 가 냉각수가 많이 새는 바람에 원전 가동이 일시 중단됐다. ⓒ KNN 뉴스 화면 갈무리
사용후핵연료 낙하 등 아찔한 사고 이어져
고리 4호기가 정지되기 하루 전날인 3월 27일에는 경주의 월성 4호기에서 핵연료 다발 낙하사고가 일어났다. 핵연료를 장전하기 위해 작업자가 손으로 옮기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이만희 차장은 "월성 4호기는 중수로형 원전이기 때문에 운전 중에 연료를 계속 교체해 줘야 하는데 작업자가 실수로 연료 한 다발을 놓친 것"이라며 "아직 사용하지 않은 신핵연료, 즉 방사선이 나오지 않는 천연우라늄이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당시 사고에 대해 조사한 KINS의 보고서는 사고 원인을 '작업절차 및 작업환경 미흡 등의 복합적 작용'이라고 분석했다. KINS는 재발방지를 위해 핵연료다발 취급 작업자 교육 실시, 미끄럼방지용 장갑 착용 등의 단기조치와 수작업 범위 축소를 위한 설비개선 등의 중장기대책 수립을 권고했다.
▲ 신고리원전 5,6호기 예정지인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리마을 주민들은 인근에 이미 신고리 3,4호기를 둔 채 사고의 불안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 강민혜
경주의 월성원전 1호기에서는 지난 2009년 사용후핵연료 낙하사고가 있었다. 핵연료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장비를 잘못 작동하는 바람에 사용후핵연료 다발이 파손됐고, 2개의 핵연료가 연료방출실 바닥과 저장수조로 떨어진 사고였다. 사용후핵연료는 방사성 물질이 맹렬하게 방출되는 덩어리이기 때문에 훨씬 위험하다. 이 일은 사고 5년 만인 2014년 11월 3일, 당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김제남(정의당) 의원을 통해 폭로됐다.
김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사고 당시 1만밀리시버트(mSv)가 넘는 방사선이 누출됐기 때문에 떨어진 연료봉을 수습한 작업원의 피폭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윤청로 당시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장은 "해당 사고는 방사성 물질의 외부 누출이 원천 차단된 격납건물과 사용후핵연료 저장 건물 사이에서 발생해 방사성 물질이 원전 밖으로 누출되지 않았고 작업원의 피폭량은 컴퓨터단층촬영(CT) 수준인 6.9밀리시버트에 불과했다"고 해명했다.
사고 은폐 의혹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해당 사고가 (원자력안전위원회 고시상) 정보공개 대상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등 시민단체들은 이 사건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 사용후핵연료는 강한 방사선을 분출하는 위험물질이기 때문에 냉각 수조에 넣어 5년가량 열을 식혀야 한다. 사진은 사용후핵연료 습식저장시설. ⓒ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원자로 격납건물 철판 부식도 여러 건 발견
원자로의 격납용기를 감싸고 있는 격납건물에서 철판이 부식(삭아 손상됨)된 사례도 여러 건 발견됐다. 지난해 5월 전남 영광의 한빛원자력본부 계획예방정비 중 한빛 2호기의 격납건물 원형 돔과 하부의 경계 부위인 높이 68미터(m) 지점 격납철판에서 부식현상과 함께 1~2밀리미터(mm) 크기의 미세구멍 2개가 발견됐다. 당시 한빛원전 측은 건설 당시 비에 노출된 철판에 습기가 스며들어 부식이 일어났다며 해당 부분을 잘라내고 새 철판을 용접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한빛 1호기에서 역시 격납건물 상부의 원형 돔과 하부의 경계 부위에 철판의 부식 현상이 발견됐다. 비슷한 사례가 지난해 11월 경북 울진의 한울 1호기, 지난 3월 부산 기장군의 고리3호기에서도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철판 부식이 방사성 물질 유출을 막는 격납건물의 기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어기구 의원이 한수원에서 제출받은 '발전기 고장으로 인한 손실내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2.01~2017.08) 국내 원전에서 발생한 고장 건수는 총 45건, 고장으로 운전을 정지한 일수는 1063일, 손실액은 수리비와 발전손실을 합해 총 7543억원이었다.
한수원은 45건 중 34건의 고장 원인을 자연적‧인적 하자가 아닌 제작‧설계‧시공결함 등 원천적 하자로 분류했다. 현재 운영 중인 원전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월성 1호기 고장이 6건으로 가장 많았다. 어 의원은 "현재 가동원전의 45%인 11기가 20년 이상 된 노후 원전임을 고려하면 고장 정지에 의한 추가 손실과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며 "노후 원전의 안전성을 확보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 건물. ⓒ 강민혜
부품시험서 조작 등 비리로 줄줄이 사법처리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를 종종 '거대한 기계'로 표현한다. 수많은 부품이 결합되어 돌아가는 장치이고, 오래될수록 고장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에서다. 지난 2013년 일어난 '원전 부품 시험성적서 조작 사건'은 이 거대한 기계들이 불량 부품으로 조립됐을 가능성을 드러내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해 4월, '신고리3·4호기에 사용된 케이블의 시험성적서가 위조됐다'는 내용의 제보가 원자력안전신문고에 접수됐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조사를 해보니 납품업체인 제이에스(JS)전선이 국내 검증업체인 새한티이피(TEP), 승인기관인 한전기술과 짜고 불량 케이블이 정상인 것처럼 시험성적서를 조작해 한수원에 납품했다. 한수원 직원들은 위조 사실을 눈감아 줬다.
조사를 확대해 보니 가동 중인 신고리1·2호기와 신월성1·2호기의 경우 시험 환경과 시험성적서가 모두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제어 케이블은 원전에서 사고가 났을 때 원자로의 냉각과 방사선 차단 등을 위해 안전 설비에 신호를 전달하는 핵심 장치다.
▲ 2013년 6월 7일 원전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과 관련 국민에 사과하는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 ⓒ TV조선 뉴스특보 화면 갈무리
수사와 재판 결과 신고리 1·2호기 등 원전 6기에 불량 케이블을 납품하고 시험 성적서를 위조한 JS전선 엄아무개 고문에게 징역 10년이 최종 선고되는 등 납품업자, 검증업체 및 승인기관 임직원, 한수원 임직원 등 수십 명이 사법처리됐다.
또 대규모 금품로비와 한수원 인사 청탁 등 원전업계의 고질적 비리가 드러나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불리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등 관료, 정치인, 기업인 수십 명도 징역형 등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신고리 1·2호기와 신월성 1호기의 가동이 7개월 동안 중단됐고, 새로 지은 신월성 2호기와 신고리 3·4호기는 상업가동이 연기되기도 했다.
당시 시험성적서 조작 등으로 납품된 불량부품 중 일부는 아직도 교체되지 않은 채 원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해 10월 한수원 국정감사에서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김규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한수원의 '해외품질 시험 위조의심 조사 현황'에 따르면 해외에서 품질 시험을 받은 1만 1740개 원전 부품 중 가짜로 의심되는 부품이 총 369개이며, 원전에 실제 사용된 부품 135개 중 96개 부품이 별도 교체작업 없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당직근무 중 필로폰 투약, 노조 공금으로 도박도
원자로를 빈틈없이 관리해야 할 한수원 임직원의 기강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도 일어났다. 지난 2012년 9월 고리원전의 재난안전팀 직원이 두 차례 필로폰을 투약한 사실이 밝혀져 체포됐다. 그는 사무실에서 당직근무를 하던 중 필로폰을 투약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재난안전팀은 청경대, 소방대, 관리직원 등으로 구성되며 건물 화재 등 비상 상황에 신속히 대응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2015년 4월에는 한수원 노동조합의 공금을 빼돌려 스포츠토토 등 도박에 쓴 혐의로 노조 전임간부가 구속되기도 했다.
▲ 원전 경비와 화재 대응 등을 맡은 고리원전의 재난안전팀 직원이 근무시간 중 사무실에서 마약을 투약한 것으로 드러나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 채널A 뉴스 화면 갈무리
탈핵 전문가들은 한수원 내부에 '도덕불감증'이 만연했다고 꼬집었다. 에너지정의행동 이헌석 대표는 "부품 시험성적서 조작은 은폐되었던 고질적 문제가 드러난 것이고, 단순한 비리가 아니라 핵발전소 안전으로 이어지는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마약 사건의 경우 발전소 내부 인적 관리가 전혀 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야당 추천으로 원자력안전위원을 지낸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는 "한수원의 몸에 밴 '비밀주의'가 가장 우려되는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수원 측에서 사고를 은폐했다가 들킨 것만 해도 10번이 넘는다"며 "만약 후쿠시마 같은 큰 사고가 난다면 주민들이 빨리 대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한수원이 앞선 사건들처럼 은폐하고 있다가 대피가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원전 안전관리, 독립성과 투명성 높여야
원전기술전문가단체인 원자력안전과미래 이정윤 대표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선진국들은 안전전문가, 시민단체 등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가동 중인 원전의 운영실태를 감시한다.
독일은 정부보다 많은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다수의 독립기관이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원전의 안전검사와 심사‧평가를 맡는다. 토마스 리커트 독일 원자로안전위원회 위원은 지난달 13일 탈핵에너지전환국회의원모임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한국 원전안전 규제 이대로 좋은가' 세미나에서 "독일은 독립 전문기관 덕분에 집권 정당이 달라져도 영향을 받지 않고 원자력 안전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 토마스 리커트 독일 원자로안전위원회 위원이 지난 달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전 안전관리 토론회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 함께 여는 미래
미국은 독립적인 전문가 조직인 원자력안전규제위원회(NRC)가 원전 안전관리 감독과 규제를 전담한다. NRC는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느 정부 부처에도 소속되지 않으며, 의회에서 직접 예산배정을 받는다. 원전 안전정보 공개, 위원회 회의 속기록 전문 공개 등을 통해 투명성을 높이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2013년 <원자력안전위원회:국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가?> 보고서에서 "NRC는 원전 관련 산업계와 인력교류가 없다"며 원자력 이익집단과의 관계가 깨끗하다고 인정했다. 이밖에도 미국에는 일반시민단체, 민간조직 등 다양하고 자발적인 원전 안전관리 감시조직이 존재한다.
프랑스에서는 원전 안전관리 감시에 지역사회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원전지역의 지방의원, 환경단체, 노조원, 의료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지역정보위원회(CLI)가 독립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청(ASN)과 원전 사업자에게 원전 관련 정보를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 방사성폐기물 관리계획에 관한 법률(TSN)은 원전 시설과 관련한 모든 사업계획에 CLI가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원전안전 감독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대통령 직속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형식적인 독립성을 갖추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안위의 예산 중 절반가량이 원전사업자인 한수원이 부담하는 원자력기금에서 나온다. 또 지금까지 원안위 위원 9명 중 다수가 원전산업계와 긴밀한 이해관계를 가진 인사들로 구성됐다는 지적이 많았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는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이므로 원전 안전관리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원전 안전 관련 정보와 위원회 회의록, 업무 진행사항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종운 동국대 원자력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도 "한수원이 좀 더 투명하게 원전 관리 정보를 공개해야 여러 전문가들이 데이터에 기반한 사고 대처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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