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만은 않은 사랑, 그래도 목마르다
[넘버링 무비 33] 제22회 BIFF 상영작 6 <러브리스>
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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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로가 하나의 가정 속에서 행복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상태다. 남편은 이미 마샤라는 여자와 생활하고 있다. 그녀는 그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 아내인 제냐 역시 그 사실을 빌미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 지금 사는 집도 이미 팔기로 해서, 집만 정리가 되면 실질적인 이혼 절차가 끝나게 되는 상황이다. 유일한 문제는 그들에게 알료샤라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 아들은 그런 부모 아래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두 사람이 밤마다 언성을 높이고 다툴 때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혼자 울음을 삼킨다. 부모인 두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집을 판다는 건 부모의 이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집을 보러 오면 방문을 열기는커녕 오히려 닫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까닭이다. (이 지점에 담긴 판매에 대한 의미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부부가 헤어졌음을 확정하는 장면으로 이용된다) 부모에게 자신이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알료샤는 집을 나서 아파트 계단에 이르면 마치 억압되어 있던 공간을 탈출이라도 하듯 뛰어 내려가는 아이인데 말이다.
▲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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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감독은 이 작품의 주제와도 같은 loveless, 사랑의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지점의 감정을 이용한다. 이혼을 앞둔 보리스와 제냐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과 행동이 하나,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아들인 알료샤가 느끼는 것들이 또 다른 하나다. 보리스와 제냐는 각자가 서로에게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하며, 그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이유는 그저 알료샤가 생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부부가 각자의 내연자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려는 모습이 영화 속에 투영되는 동안 그들의 아이인 알료샤는 영화 속 러닝타임에서 잊힌다. 이후 알로샤가 종적을 감추게 되는 것과 이 부분의 표현 방식이 유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감독이 그를 의도적으로 시선에서 유보하는 것처럼 부부 역시 그들의 삶 속에서 자신들의 아들을 미필적 고의적인 상황 속에서 내버려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짧은 기간 속에서만 그런 생활이 지속한 것은 결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이를 찾기 위해 받게 되는 몇 가지 질문들 앞에 부모라는 사람들이 그 어떤 대답에도 좀처럼 확신을 가지 못하는 장면들이 표현되며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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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행방불명 되고 난 뒤에도 두 사람은 쉽게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두 사람 각자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것이다. 사실상 아이를 찾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전문가 집단이다. 이는 반대로 두 사람이 결국 아이를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들이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 걱정하고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일부 제시되기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각자 사랑의 곁을 찾는 두 사람의 모습. 어쩐지 아이를 잃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기분을 전해주지는 못하는 이유다.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공동의 위기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여전히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기운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부부가 계획하지 않은 아이를 가지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는 게 두 사람에게 부모로서의 자각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행동에 대한 책임을 먼저 떠올리기보다는, 자신의 불안이나 위험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부터 떠오르고 마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의 모습이 행동 곳곳에서 드러난다. 오히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알료샤가 더욱 어른스러워 보일 정도다. 아들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아이의 사체를 확인한 이후 감정적으로 무너져버리는 두 사람이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적 토로만이 그 공간을 채울 뿐, 그 이상을 넘어서는 감동이나 연민과 같은 감정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와 같다. 영화의 시작에서 학교를 마친 알료샤가 나무에 걸어놓은 끈 하나가 영화가 끝나는 지점까지 외롭게 흩날리는 모습이 꼭 채워지지 않는 감정의 불안과 허전함을 대신하는 듯하다.
▲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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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한 가정 내의 사랑의 상실만큼은 아니지만, 감독이 전작들에서 지속해서 관심을 가져온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짧게나마 표현되고 있다. 아내의 신고에 달려온 경찰이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그것. 알료샤의 실종에 대해 경찰은 단순한 가출이라고 단언하며, 부모의 마음에 공감하는 방식이 아니라 절차적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일에 더욱 집중한다. 심리적 안정보다는 사건의 해결, 사건의 해결보다는 절차의 엄격함에 관해 설명하는 경찰의 모습은 어딘가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이후에 부부를 도와 알료샤를 찾는 일에 뛰어드는 이들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공동체의 붕괴와 가정의 분화에 대한 문제 제기는 물론 이를 보완하고 수정할 공권력 혹은 사회 시스템의 경직성에까지 감독의 시선이 닿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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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행복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왜 남는 건 고통과 실망뿐인 걸까? 제냐는 보리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마지막 장면을 통해 설명한다. 각자 새로운 사랑을 찾아, 이제는 자신에게 꼭 맞는 사람이라고 기뻐하며 떠난 가정에서도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못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면서 아들이 조금 시끄럽게 군다고 번쩍 들고 빈방 바구니 안에 집어 넣어버리는 보리스의 모습도, 사랑의 첫 시점에서 만끽했던 충만한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홀로 부유하는 제냐의 모습도 전부 과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거두어들이도록 만든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가정 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그리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두 사람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각자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이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대상을 바꾸는 것이 사랑을 채울 방법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조영준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joyjun7)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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