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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김창수>가 김구 미화? 왜곡 아니다, 핵심은..."

[inter:view] 영화 <대장 김창수>의 극본 쓰고 연출한 감독 이원태가 말하는 김구

등록|2017.10.23 10:52 수정|2017.10.23 14:27

▲ 영화 <대장 김장수> 이원태 감독 ⓒ 이희훈


"오늘 효창공원에 가서 참배를 '한 번 더' 드리고 왔다." 17일 인터뷰차 만난 <대장 김창수>의 이원태 감독은 기자가 질문을 하기도 전부터 말을 꺼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의 묘가 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백범 김구의 청년 시절을 다룬 영화 <대장 김창수>의 극본을 직접 쓰고 연출을 한 사람다운 서두였다.

- 평소에도 효창공원에 자주 가나.
"시나리오 쓸 때 답답했다. 소재 자체가 쉬운 영화가 아니니까 그 무게감에 부담이 돼 글 쓰다가 힘들 때 혼자서 가끔 김구 선생님 묘소에 갔다. 효창공원에 가면 백범 기념관도 있고. 쭉 둘러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거다.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 오늘은 무슨 대화를 했나?
"흥행이 잘 되게 해달라는 것보다 선생님 이야기를 소중한 마음으로 만들었으니까 많은 사람이 보게 해달라고."

- 그게 흥행이 잘 되게 해달라는 말 아닌가? (웃음)
"같은 이야기인데 약간 다르다. 김구 선생님의 유가족 분들만 모시고 영화 초기 버전을 보여드렸다. 사실 겁이 났는데 너무 좋아하시더라. 할아버지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왜곡이 되거나 상업적으로 될까봐. 예상을 벗어나서 역사를 탄탄하게 사실 왜곡 없이 잘 만들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보다 백범 김구의 젊은 시절, 아무도 모르지만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세상에 알려줘서 고맙다고. 영화 처음 하겠다고 마음먹고 지나온 시간 내내 부담이 있었는데 그때 마음이 녹았다. '그래도 내가 하나는 했네?'"

- 16일 시사회에서 열 명도 더 되는 출연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했다. 최대 인원이 아닐까 싶었는데.
"너무 감사하다. 그런데 촬영 현장 분위기가 딱 그랬다. 촬영 2회 차가 되는 날이 촛불을 들기 시작한 날이다. 배우들이나 저나 (촛불 집회에) 가고 싶은데 촬영을 하고 있어서 못 가니까 진웅씨가 '못 가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더라고. 그러니까 신정근 선배님이 '우리는 이 영화를 최선을 다 해서 찍는 게 저 분들하고 같이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못 갈수록 이 영화를 잘 만들자'고 했다. 나라의 분위기에 따라 배우들도 되게 똘똘 뭉친 것 같다. 촬영은 일을 하는 건데 일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으쌰으쌰 하는 느낌이. 그래도 촬영이 일찍 끝난 날 시간 남는 배우들은 다 손잡고 촛불 들고 나가고 그랬다."

- 배우 이선균이나 이경영이 (특별출연으로) 나온 건 의외였다.
"이선균씨 같은 경우에는 진웅씨랑 워낙 친하지 않나.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같이 나오기도 했고 우정이 있으니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할게'라고 해주셨고 이경영 선배님 같은 경우에는 영화의 이야기를 아셨다. '내가 할게 이건'이라고. 의미가 있는 영화이다 보니까 선뜻 응해주신 것 같다. 손종학 선배님도 촬영분이 한 회차 밖에 안 됐는데 거절 안 하고 해주셨다. 손종학 선배님께 '형님 큰 역할 못 드렸는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영화가 나를 필요로 하는데 내가 왜 안 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인데 그런 생각 말아'라고. 섭외가 정말 별로 안 어려웠다. (웃음)

"상해 임시정부 안에서 눈물 쏟아져"

▲ ⓒ 이희훈


- 처음 김구의 청년 시절을 시나리오로 담아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
"상해로 가족 여행을 갔다. 임시정부가 있어서 간 거다. 거긴 한 번 갔다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거든."

- 왜?
"거기를 빼놓고 여행을 가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애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임시정부가 가파른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잖나. 와, 거길 보고 너무 놀랐다. 정부라고 이름이 붙어 있으니 규모가 크진 않더라도 강당도 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했는데 나무 바닥에 정말 작은 책상이 몇 개 붙어있고 간이침대가 그 옆에 있고 그 간이침대에서 김구 선생님이 주무시고 했다는 거다. 그 순간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 (이원태 감독은 눈물이 맺혀 몇 분 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내가 창작을 하는 사람이니까 한 번은 선생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김구의 생에서) 어떤 지점을 영화화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 고민했다. 앞부분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많이 없더라. 내가 봤을 때는 청년 시절의 삶 때문에 선생님의 인생이 바뀐 것 같더라. 김구 선생님의 큰손자 분께서도 사형 집행 직전에 살아난 경험 때문에 평생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목숨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살아났다? 그 이상의 터닝 포인트가 어디 있겠나. 그 시기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

- 영화 <조선마술사> 같은 경우에는 원작으로, <가비>는 스토리기획으로 참여했는데 영화 연출은 처음이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연출의 시작은 글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작가가 쓴 좋은 글을 연출하고픈 욕망이 생길 수도 있지만 글 쓰는 행위 자체를 연출이라고 본다. 다른 사람이 쓴 걸 연출하는 게 잘 상상이 안 되는 것 같다. 미세한 감정이나 조사 하나 수식어 하나도 딱 꽂혀서 글에 담아 배우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많이들 그렇게 하잖나. 연출 따로, 극본 따로.
"나는 못 할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좋은 스토리구조를 갖고 한 번 더 내 글로 싹 바꿔야지 안 그러면 못 찍을 것 같다. 제가 빨리 쓰고 빨리 찍어야 하는 방송 연출을 할 때도 그랬다. 내게 맞게 바꿔서 글을 써야 연출이 더 잘 되더라."

▲ ⓒ 이희훈


-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있었다. 이 영화도 어찌 보면 김구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나. <서프라이즈>도 마찬가지로 숨은 이야기를 다루는 거고. 그런 면에서 연관성이 있지 않나?
"15년 전에 <서프라이즈>를 처음 만들었다. 자랑스러운 내 대표작이 맞는데 아직도 그걸로 불리는 게…. 그거 말고도 연출한 게 많고 영화를 한 지도 10년이 넘었는데 그보다 이전에 연출했던 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니까. 그래서 애증의 느낌이 있다. 매주 희한한 이야기를 다섯 개씩 찾아서 현장에서 촬영을 하고 방송을 내보낸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할 때는 현장에서 작가랑 같이 대본도 썼다. 그때 내공이 엄청 생긴 것 같다.

감독마다 스토리텔링의 스타일이 있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님 같은 경우에는 '영상으로 만든 소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이창동 감독님은 소설가이고. 나는 '와, 살다가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감동과 재미와 의미?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게 내 스타일인 것 같다. <서프라이즈>를 해서라기보다는. 기자님도 치하포 사건(기자 주- 김구가 1896년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죽이고 체포된 사건. 그는 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인천 감옥에 수감된다)을 아셨다면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보자마자 만들고 싶더라."

- <서프라이즈>에 이어 영화 <조선마술사>나 <가비>까지. 역사물에 관심이 많은가?
"일단 다음 영화는 '현재'를 다루었다. (웃음) 역사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한국 역사만이 아니라 서양사나 동양사 등 재밌는 책들 계속 읽는다."

- 이번 영화에는 어떤 책을 참고했나?
"당연히 중심 사료는 <백범일지>다. <대장 김창수>의 큰 줄기가 되는 치하포 사건, 사형 선고, 사형 집행 전에 살아나고 탈옥한 과정이 다 <백범일지>에 나온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니까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이나 조선 전체의 시대성이 나오는 사료도 참고했다. 철도 노역을 영화의 큰 신으로 넣었다. 사실 철도 노역은 구한말의 아픔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 근대성의 상징이자 수탈의 대표적인 상징. 일본이 대륙으로 전쟁을 하러 가려고 땅을 빼앗아 그 땅을 가로질러 철도를 짓는데 사실 그게 얼마나 고된 작업인가. 돌 깨고 산 깎는 걸 조선 사람들이 다 하는 거다. 진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철길 위에 기차를 놓고 강제 징용을 하거나 위안부를 싣고 전쟁터로 끌고 간다. 철도가 가진 당시의 시대성은 엄청나다. 김구 선생님이 인천 감옥에 수감 생활을 하고 계실 때 첫 번째 철로가 부설 작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철로 노역을 영화에 넣었다. 팩트를 바꾸더라도 당시 시대성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또 김구 선생님이 두 번째로 감옥에 사실 때 1년 6개월 정도 노역을 산다. 지금 인천항 항만 축항 공사에 김구 선생님이 끌려간다. 그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일하러 갈 때 '오늘 가서 떨어져 죽어야지. 자살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 두 번째 감옥에서의 노역 경험과 첫 번째 감옥에 있을 때를 영화에 합친 거다."

- 말씀하신대로 영화에서 철도 노역신이 굉장히 중요하게 나온다. 철도가 뉴라이트의 일본 근대화론의 대표적인 예시로 쓰이지 않나. 일본이 철도를 놓아줬기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발전했다는. 이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실제 그 내용이 극 중 조진웅과 송승헌의 언쟁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맞다. 거기 담았다. 승헌씨가 '네까짓 게 뭘 알아. 이 철도가 깔리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발전할지 알아?' 이런 이야기를 하잖나? 그러면 진웅씨가 (반박하는) 세 가지 이유를 댄다. 저 철로를 따라 얼마나 많은 조선 땅이 저들의 손에 넘어갈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가서 죽게 될지, 그리고 철로를 다 깔고 나서 얼마나 많은 조선의 재산이 일본으로 수탈될지. 정답을 내가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서로의 주장을 부딪치게 만들어놓은 거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철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조선 사람들이 죽었고 철길 따라 끌려 갔다는 걸. 조선의 근대화? 절대 아니다. 자기들이 필요해서 깔았고 조선 사람들이 핍박을 당한 거다. 나는 <오마이뉴스> 같은 곳에서 왜 이 영화에 철도 노역을 담았는지를 다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픔을 알아야 한다. 진웅씨에게도 설명했다. '진웅아 철도는 이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시나리오에 넣은 거고 연기도 알고 하자'라고. 지금은 나보다 더 고조돼있다."

"조진웅을 그냥 믿고 갔다"

▲ ⓒ 이희훈


- <대장 김창수>는 조진웅 배우가 주인공으로 이끌고 가는 영화이기도 하고 특히 얼굴을 크게 비추는 장면들이 많다. 조진웅은 감독님께 어떤 배우였나?
"저 배우하고는 '영화를 한 번 하고 싶다'는 게 있었는데 이 작품을 쓰면서 '이건 조진웅이다' 하고서 썼다. 초고를 보여줬는데 자기는 이런 역할은 겁나서 못 하겠다고 그러더라고. 그 초고는 지금보다는 장르 영화에 더 가까웠다. 가공의 인물들도 훨씬 많고 할리우드 탈옥 장르 영화 같은? 각색을 하면서 그런 부분을 없앴다. 상업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있어서."

- 장르 영화의 색깔을?
"장르 영화의 색깔을 빼는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런 과정에 있는데 어느 순간 (영화에 출연을) 하겠다고 해주셔서 너무 감동했다. (배우의 얼굴을 크게 비추는) 타이트 샷이 많다고 하셨는데 '이건 배우에게 기대서 가야하는 신이다'라는 생각이 든 경우에는 촬영 감독님에게 '이 신은 카메라 뻗쳐놓고 배우만 찍습니다'라면서 찍은 신들이 많다. 김창수를 정직하게 담자. 어떤 트릭도 쓰지 말자고. 사형장 신도 마찬가지다. 그날 아침에 현장에서 진웅이를 딱 보니까 죽으러 가는 사람이 다 돼서 운동장에 혼자 서있더라. 그렇게 집중해있는 배우 앞에서 카메라를 왔다갔다 하기가 싫었다. 카메라 고정시켜놓고 찍었다. 진웅이를 믿고 많이 갔기 때문에 클로즈업 샷도 많아진 것 같고. '배우 연출은 어떤 생각으로 하셨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배우는 연출하는 게 아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감독이 배우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연출은 캐스팅이다. 배우랑 하기로 합의가 되면 배우를 믿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배우가 아니지 않나. 배우들 막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영화에 훨씬 좋다."

"역사는 박물관에만 있는 게 아냐"

▲ ⓒ 이희훈


- 역사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부터 논란이 됐다. <백범일지> 같은 경우에는 춘원 이광수에 의해 훗날에 다시 쓰이기도 했고.
"그게 사실이다."

- 그래서 이 영화가 '김구에 대한 지나친 미화나 영웅화가 아닌가'라는 주장이 있다.
"역사물이 자주 나오다 보니 역사 왜곡에 대한 논란도 많이 생기고 역사물 영화를 만든 사람이니 부담이 되긴 한다. 하지만 학자들이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박물관에 놔두고 그게 역사인가? 역사를 그렇게 '모셔놓을' 필요가 없다. 논란이 있을지라도 우리처럼 창작하는 사람들이 소설도 쓰고 드라마도 만들고 <대장금>도 나오고 그러다가 욕 먹는 영화들도 나오고. 그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백범일지>를 춘원 이광수가 한 번 각색했다. 김구 선생님이 왜 <백범일지>를 썼는지 아나? 자기가 나라의 일을 하니까 자식을 거의 버리다시피 하고 못 키우는 거다. <백범일지>는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한 아들 둘에게 아빠가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쓴 책이다. 유서처럼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난중일기>처럼 쓴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됐잖나. 험지에서 쓴 거니 책으로 낼 수가 없는 거다. 지금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문학가를 찾아가 각색해달라고 안 하겠나? 이광수가 썼다고 해서 <백범일지>가 <백범일지>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책인지만 알면 된다."

- 감독님의 생각인가. 또 치하포 사건이라는 단순 살해 사건을 영화가 미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기자님은 영화를 보셨잖나."

- 맞다. 보았다.
"그 논란이 영화에 그대로 나오는 거 알지 않나. (여기서 이원태 감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실제로 고종도 증거가 없으니까 죽이지 말자고 하지 않나. 증거가 나오면 죽이자고. 나는 왜곡하지 않았고 결론이 나지 않은 이야기 그대로를 담았다. 자, 우리나라 군인하고 깡패 몇십명이 담을 넘어 일본의 왕비를 칼로 난자하고 시체를 강간하고 불에 태워서 우물에 던졌다고 하면 일본은 가만히 있겠나? 그게 핵심이다. 그 이후에 치하포 사건 같은 일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다. 우리 백성들이 일본인을 테러한다. 그러다가 대놓고 죽인 사람이 김창수인 거다. 반일의 감정이 불 끓듯 끓고 있었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친일파 내각이 들어서서 상투를 다 잘라버린다. 사건의 핵심은 김창수가 '진짜' 명성황후를 죽인 자객을 죽였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게 '조선의 민심'이라는 거다. 명성황후가 아무리 비난을 샀더라도 한 나라의 왕비고 왕비가 죽었는데 '니들 사과해' 같은 말도 못하고 걔들은 자기들이 죽여 놓고 그냥 넘어갔다. 넘어갔다니까 그냥? 그게 팩트다. 거기에 분노를 해야지 김창수가 진짜 자객을 죽였느냐 아니냐?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거다. 나라가 아무 것도 못하니까 혈기 넘치는 스무살 청년이 일을 터트린 거 아닌가."

▲ ⓒ 이희훈


-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관객들이 어떤 걸 얻어가기를 바라나?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건 절망의 끝이다. 그렇게까지 가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 지도자가 됐다. 절망하지 말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도 김구가 되자는 건 절대 아니었고.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면 좋겠다. 치기 어린 혈기에 차서 사고를 쳤는데 그걸로 사형 선고를 받고 절망으로 가다가 희망을 찾잖나. 그 이야기가 핵심이다."

- <대장 김창수>의 영문 제목이 'Man of will'(의지의 사내)이더라. 그것과 연관이 있을까?
"그럼. '우리의 김구 선생님!' 그건 진짜 아니고. (웃음)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동안 한국에 너무 큰일이 많이 생겼다. 처음 썼을 때는 세월호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각색을 하고 있는데 시대 상황이 막 바뀐다. 그러니 없던 대사가 들어간다. 영화에서 죄수들이 한밤중에 뭉치지 않나. 그때 국민들이 자꾸 보이더라. 그 신도 바뀐 거다. 한국 상황이 힘들어지니까 각색도 그렇게 바뀐다. 계속 요즘 이야기가 돼버린다.

소설도 같이 썼는데 '작가의 말'에 그런 이야기를 썼다. '두렵다'고. 과거의 이야기를 썼는데 이 안에 현재의 우리 이야기가 다 들어가 있고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많이 바뀌지 않았다고. 120년 전의 이야기를 각본 쓰고 연출했는데 해결된 게 뭐가 있나? 위안부도 아베 정권이 들어오고 대놓고 안 했다고 하지 않나. 명성황후도 죽여 놓고 안 죽였다고 하고. 하나도 바뀐 게 없다 지금. 왜 바뀐 게 없냐면 우리가 정리를 못 해서 그렇다 역사를. 정리를 해야 할 시점에 정리를 딱 하고 갔어야 했는데 정리를 안 하고 넘어가니까 똑같은 거다. 김창수는 희망을 던지는 이야기지만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라고 봤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오늘의 우리가 다 들어있다고. 아, 이거 너무 진지해지면 안 되는데." (웃음)

▲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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