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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판 '군함도'에 승선한 열여덟 살 고아 재용씨

[서산개척단③] 50년 일군 땅, 국가에 빼앗긴 성재용씨의 체념 "바라는 것 없지만..."

등록|2017.11.09 09:47 수정|2017.11.14 14:44
'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그런 사람이 있다.

2015년인가, 사진을 찍으러 포이동 재건마을에 갔을 때였다. 포이동, 요즘 이름으론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복판에 있는 외딴 판자촌. 국가의 집단 강제 이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강제 철거되지 않을까 밤잠 설치는 그곳. 나는 몇 차례 안면이 있는 주민 아저씨 한 분께 무심코 강제 이주되기 이전의 삶을 물었었다. 그랬더니 아저씨 표정이 싹 변했다.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어."

그땐 기자도 아니었고 그냥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어딘가 가늠하기 힘든 아저씨의 상처와 주름에 난 아무것도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사람도, 국가도, '이놈의 세상'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체념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

그런 사람

▲ 서산 '대한청소년개척단'으로 오기 전, 성재용씨(74)는 부모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고아였다. ⓒ 남소연


지난 9월 6일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3리 마을회관. 회관 안방에는 50년도 훌쩍 더 된 서산 개척단을 취재하러 왔단 소식에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있었다. 말로만 듣던 모월리는 깨끗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뭔가 깊은 사연을 간직한 곳들이 늘 그렇듯.

안방에 앉자마자 정영철씨의 인터뷰가 시작됐다(앞선 1, 2편을 꼭 봐주시라). 방 한 가운데서 울리는 그의 크고 당당한 목소리는 금세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여?"

정씨의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기 시작했을 때, 안방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말없이 눈가만 닦는 이가 보였다(그런 이들에겐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손을 맞잡거나 버선발로 나와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하던 다른 분들과 달리 첫 만남부터 고개만 까딱, 덤덤하게 인사를 건네던 그 백발의 어르신. 그에게 예정에 없던 인터뷰를 요청했다. 서산 개척단원 출신 성재용씨(74)다.

"좋은 얘기도 아니고. 그때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어요."

데자뷰. '그런 사람'의 냄새.

열여덟, 고아원에서 서산 개척단으로

"정영철이가 말 잘 하는데 뭐하러 또 제가 해요"라며 눈 하나 꿈쩍 않던 성씨는 카메라가 없는 옆방에서 믹스 커피 한잔을 타 마시고서야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산 '대한청소년개척단'으로 오기 전, 잘나가는 부산 건달이었던 정영철씨와 달리 성씨는 부모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고아였다.

"충남 온양에 있는 고아원에서 열여덟까지 죽 컸어요. 거기서 학교도 다니고요. 누님도 1983년, 마흔 다 돼서야 찾았으니까 그땐 정말 저 혼자였던 거지요. 근데 고아원에선 열여덟이 되면 배급이 탁 끊겨 버리거든요. 나이가 다 찼으니 고아원에선 우릴 서산으루 보내려 했겠지요."

"뭐하러 묻냐"면서도 그는 무덤덤한 투로 50년 세월을 거슬러 올랐다. 고아원 원장은 서산 개척단에 가면 땅 1정보(3000평)와 집 한 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고아원 퇴원 후를 대비해 중국집과 가구점을 전전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던 성씨에게도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1962년 2월, 그는 동기 5명과 함께 곧장 서산으로 향했다.

"근데 막상 서산에 와보니 사정이 달라도 한참 달랐지요. 가자마자 매일 강제 노동만 시키고... 내가 요즘 '이만갑(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란 프로를 자주 봐요. 거기에 북한에서 탈출하는 모습들이 나오잖아요. 개척단 생활을 떠올려보면 내가 겪은 게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라고 봐요."

품었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마치 별일도 아니라는 듯 구타와 감시가 이어졌다고 했다.

"개척단 간부들한테 맞는 게 그냥 다반사였어요. 개간하는 데 쓴다고 저기(손으로 가리키며) 앞에 도비산에서 등짝만한 돌을 지고 내려오는데, 힘들어서 조금이라도 열을 벗어나거나 돌 크기가 작으면 그냥 후려쳐 버리고 그랬지요. 뭐, 다 그런 거지요."

개척단 '구호반'은 낮에는 물론 밤에도 보초를 서가며 단원들 변소 이용까지 감시했다. 극심했던 개척단 생활을 견디지 못한 고아원 동기들은 하나 둘 뿔뿔이 도망갔고, 어느덧 성씨만 다시 홀로 남았다.

"난 왜 안 도망갔냐고요? 못 간 거예요, 무서워서. 도망가다 붙잡혀서 불구되고 골병 들어 죽은 사람들도 많이 봤거든요 제가. 그 생각을 하면 두려워서..."

축 쳐진 목젖과 함께 성씨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50여 년간 내 땅이라 믿고 일군 땅, 그러나

▲ 서산 개척단에 가면 땅 1정보(3000평)와 집 한 채를 받을 수 있다는 고아원 원장의 말을 믿고 성재용씨는 1962년 2월, 서산으로 향했다. ⓒ 남소연


도망가지 못한 그는 고된 노역을 버틴 다른 개척단원들과 함께 1968년 서산군(현 서산시)으로부터 1정보(3000평)의 땅을 무상 가분배 받았다. 그는 드디어 자기 땅이 생겼다고 믿었다. 그간 고생한 대가라고만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밑바닥이 울퉁불퉁하고 소금기가 올라오던 폐 염전 부지를 그는 50여 년간 손수 개간해 지금의 옥토로 만들었다.

"지금은 얼마나 보기 좋은 논이에요. 농사가 잘 되기 시작한 건 2000년 정도부터일 거예요. 예전엔 여기로 바닷물이 다 들어왔었으니까요. 허옇게 염분이 올라오고, 뚝으로 막아놔도 사리 때는 바닷물이 그 위로 넘치기도 하고요. 망둥이 같은 물고기들이 막 땅바닥에 뒹굴었으니까요."

땅 얘기에 그는 다시 평정을 찾은 것 같았다. 말수가 적은 그가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1965년도에 영장이 나와서 군대를 가게 됐어요. 개척단 출신으로는 나랑 같이 8명이 천안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우리만 얼마나 새카맣고 빼빼 말랐는지 사람들이 신기하다고들 모여서 구경을 다 하더라고요."

꼬장꼬장 말랐던 그가 군대에선 살이 다 쪘단다. 구타도, 노동도, 개척단보단 차라리 군대에서가 편했다. 젊은 시절을 회상하던 그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렇게 애써 만들어놓은 논을 어느 날 갑자기 국가에서 돈 내고 사라는 거 아니에요."

이마에 난 그의 주름이 다시 깊게 패였다.

"바라는 건 없어요. 억울할 뿐이지요"... 삼켜온 눈물

▲ "50여 년간 내 땅이라 믿고 일군 땅. 그렇게 애써 만들어놓은 논을 어느 날 갑자기 국가에서 돈 내고 사라는 거 아니에요." 그는 끝내 삼켜온 눈물을 보였다. ⓒ 남소연


가분배 받은 땅이 제법 논 모양새를 띠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성씨는 몇몇 공무원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 그의 땅이 국가 소유라는 것이었다. 돈을 주고 땅을 되사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실제 서산 개척단원들에게 가분배된 땅들은 1970년대부터 국유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개척단에서 준다고 해서 받았고, 내 젊음, 내 평생 다 바쳐 아무데도 못쓰던 땅 논으로 개간해 놨더니 이제 와서 무슨 소린가 했지요. 하다못해 품삯이라도 줬간디요. 그 뭐예요... 인건비라도, 땅 개간한 인건비라도 줬느냐구요."

억장이 무너졌다. 국가를 상대로 한 집단 소송에도 참여했지만 결과는 패소(2002년)였다. 그 후 2005년부터 부과된 변상금과 임대료를 내가며 농사를 짓던 그는 결국 지난 2013년 20년 상환 1억 6천여만 원에 국가로부터 땅을 샀다. 내가 만든 땅을 사는 기분이 어떨 것 같냐고, 그가 씁쓸하게 물었다. 농사 지어 버는 수입만으로는 매년 800만원의 상환금을 감당할 수 없어 그는 네 자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시종일관 침착했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맺혔다.

"땅이야 그냥 포기해 버렸으면 차라리 간단하지요. 그치만 내 모든 인생을 다 여기에 투여했잖아요. 여기에만 땀 흘렸고. 애들도 그걸 어려서부터 봐서 아니까 다들 날 도와주려고..."

끝내 울음이 터졌다.

"고생만 시키고 애들한테 잘해주지도 못했는데... 애들에게 도리어 도움만 받으니까 내 스스로가 참 한심해요. 너무... 한심해요. 평생 일해 논 만든 게 당당하지 못할 일도 아닌데..."

그 땅은 그에게 돈 이상의 의미였다. 한참이고 말을 잊지 못하던 그는 마늘 작업이 산더미라며 이제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가 채비를 서둘렀다.

"바람이야 물론 내가 개간한 땅 약속대로 받는 거지만 그게 어디 뭐 잘 되겠어요? 됐으려면 벌써 됐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뭐하러 안달했나... 그냥 이게 내 운명인가 싶기도 해요. 이대로 땅 상환금이나 갚으면서 사는 게요. 앞으로 이런 일 겪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런 시대가 어떻게 또 있겠어요."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서 무거운 체념이 묻어났다. 손주뻘 되는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붙이던 그가 언제 탔는지도 모를 따뜻한 믹스커피 한잔을 슥 내밀었다. 그는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상했다. 그는 국가에도, 그리고 언론에도, 더 이상 큰 기대를 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 막연한 초연함, 혹은 상처난 지혜로움이 더 아렸다.

"바라는 건 없어요. 그냥 억울할 뿐이지요. 스무살도 안 돼 이리 왔는데 지금은 머리가 이렇게 하얗게 셌네요."

그는 급히 회관을 떠났다.

다시, 그런 사람들

추석께 즈음, 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지금도 마늘 심느라고 바뻐요. 잘 지내지요? 한 11월까지는 계속 이렇게 일해야 해요. 예예. 벼만으로는 부족해서 마늘이라도 심으면 도움이 돼요. 아이구 바쁠 텐데 뭐하러 또 전화를 하고 그래요."

인터뷰 때보단 훨씬 밝고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그는 나머지 어르신들과는 달리 기사나 보도 일정에 대해선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에겐 어쩌면 이까짓 기사보단 마늘 한 알 한 알이 훨씬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국가도, 언론도, 사람도 그를 속이지만 마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가 일군 땅도, 그가 수확한 벼도, 그가 직접 탄 믹스커피도. 그가 사랑하는 건 그런 것들이다.

"그래도 마늘은 고생한 대로 나오네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비할 데 없이 압도적인 억울함에 말문이 막힌 사람들. 더 이상 큰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흐르는 눈물만 닦는 사람들. "뭐하러"가 입에 붙어버린 사람들. 세상살이 헛된 기대보단 마늘을 더 믿는 사람들. 그럼에도,

"저야 마늘만 잘 나와도 감사하지요 뭐. 전화해줘서 고맙네요."

도대체 뭐가 그리 감사하시다는 건지, 성씨의 음성이 자꾸 귀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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