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기운 차단했더니, 바닷바람도 막아주네
고목 줄지어 선 아름답고 귀한 마을숲, 함평 향교마을 숲
▲ 고목으로 이뤄진 함평 향교마을숲. 제1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은, 귀한 숲이다. ⓒ 이돈삼
노거수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다. 팽나무, 개서어나무, 느티나무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십 그루의 후계목과 어우러져 저마다 예사롭지 않는 기운을 뿜어낸다. 용틀임하듯 뻗은 줄기와 가지에서도 위엄이 묻어난다.
장대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고산봉을 병풍삼아 고즈넉하게 자리한 마을과도 예쁘게 어우러진다. 마을과 함께 수백 년을 함께해 온 마을숲이다. 이른바 '함평 향교리 느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 숲'이다. '향교숲'으로 더 알려져 있다.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향교마을에 있다.
숲의 면적이 3만7193㎡에 달한다. 1962년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됐다. 산림청과 유한킴벌리 등이 주최한 제1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고목으로 이뤄진 경관과 숲의 보전상태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단풍 고운 가을은 물론이고요. 사계절 내내 기품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숲입니다. 우리 마을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숲이죠. 마을주민들한테는 아주 소중한 공간입니다."
마을 주민 임정택(56)씨의 말이다.
▲ 고목이 줄지어 선 함평 향교마을숲. 팽나무, 개서어나무,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 이돈삼
▲ 함평 향교마을숲. 늦가을 숲이지만, 바닥에는 파릇파릇 생기가 돌아 색다른 대비를 이루고 있다. ⓒ 이돈삼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름드리 곰솔이 멋스럽다. 숲에 있는 유일한 소나무다. 몸통의 절반을 인공 수피로 채우고 지지대에 기대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 모습에서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애틋하다.
노랗게 물든 노거수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주민이 오간다. 발걸음도 가볍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히는 소리가 늦가을의 낭만을 노래한다. 한줄기 바람이 스치더니, 울긋불긋 나뭇잎이 비가 되어 흩날린다. 이름 모를 들꽃도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린다.
"옛날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했어. 세월이 흐르고, 벼락도 맞고 해서 고사하고 말았어. 조상들께서 애지중지 가꿔 온 숲인데, 안타깝더라고. 우리마을 청년들이 울력을 해서 나무를 심고 가꿔 왔어."
김귀찬(77) 어르신의 회고다.
▲ 향교마을 숲과 어우러진 함평향교. 함평향교는 전남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 향교마을에 있는 월산사. 이순신 장군과 이덕일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이다. ⓒ 이돈삼
향교숲은 함평향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함평향교는 전남유형문화재(제113호)로 지정돼 있다. 이야기는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평향교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함평읍 내교리 외대화마을 동편에 있었다. 정유재란(1597년) 때 불에 탔다. 유림들은 향교 부근에 있던 '수산봉' 탓이라 여겼다. 수산봉은 풍수지리상 불을 품고 있는 화산(火山)이었다.
그 자리에 향교를 다시 세울 수 없었다. 유림들은 풍수를 앞세워 향교리 뒤 고산봉에 올라 사방을 살폈다. 충신이 나올 명당 자리에 향교를 세웠다. 지금 함평향교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너른 들판으로 인해 수산봉의 화기가 향교까지 뻗어왔다.
불의 기운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대두됐다. 마을 앞 도로변을 따라 줄지어 나무를 심었다. 예부터 내려오던 액운을 막는다는 이유였다. 옛 향교 터와 야산에 있던 나무도 옮겨왔다. 작은 연못도 만들었다.
▲ 향교마을 숲의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 선 마을주민들. 주민들은 나무가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고 했다. ⓒ 이돈삼
▲ 향교마을숲의 고목과 어우러진 식물들. 파릇파릇 돋아난 식물이 늦가을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 이돈삼
흔히 마을숲은 마을의 지형적인 결함을 보완할 목적으로 조성됐다. 이곳 향교숲도 매한가지다. 불의 기운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었다. 뿐만 아니다. 향교숲은 서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 역할도 했다. 주민들의 쉼터이자 사랑방은 덤이다.
햇볕 뜨거운 여름날엔 마을주민들이 농사일로 고단한 몸을 눕혔다. 농한기에는 이곳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며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어린이들의 공부방이자 놀이터 역할도 했다.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었다. 숲속 작은 웅덩이에서 얼음을 지치고 썰매도 탔다.
"마을의 숲 관리를 문화재 관련기관에만 맡겨둘 순 없죠. 우리 주민들이 더 관심을 갖고 보전해야죠. 조상들의 유산이고, 숨결이 살아 숨쉬는 숲인데요. 마을에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의 도리죠. 그게."
숲에서 만난 마을주민 이현재씨의 얘기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아름드리 나무도 낙엽을 떨구며 반기는 것 같다. 다시 봐도 예쁘고 귀한 숲이다.
▲ 향교마을숲 전경. 팽나무, 개서어나무, 느티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다. 귀한 마을숲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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