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국적이 바뀌던 날

마냥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등록|2017.11.25 11:41 수정|2017.11.27 14:50
캐나다 시민권 선서식에 참여했다. 터번을 쓴 아빠와 아들, 영어가 유창한 백인 커플 그리고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중국인 가족,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시민권을 받기 위해 모였다. 게다가 프랑스계 이민자임을 밝히며 선서식을 주재한 판사와 그냥 보아도 중동계 출신임이 분명한 진행 요원까지 그야말로 다민족, 복합문화인 캐나다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난 현장이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캐나다 법을 준수할 것을 다짐하는 이 행사장에는 여왕의 사진이 정면에 부착되어 있고  캐나다의 10개 주와 3개 테리토리의 깃발이 질서정연하게 세워져 있다.

영어와 불어로 두 번에 걸쳐 따라 읽은 선서에 앞서 판사는 캐나다 시민권자가 되는 것을 축하하는 한편 이것이 각 개인들의 완전한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래 맞다. 대한민국이 나를 밀어낸 것도 아니고, 캐나다가 나를 오라고 손짓한 것도 아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 국적이 바뀌던 날 ⓒ 김태완


선서가 끝나면 국적이 바뀐다. 개인의 인생사로는 엄청나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인생에서 중요한 다른 모든 고비들이 그러했듯 이 순간도 그저 덤덤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캐나다 시민이 되기 위해서 쉽지 않은 과정을 돌아왔으니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텐데 마냥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쪽이 휑하니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이민을 결정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게 옳은 결정인지,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수없이 자문했었다. 그렇게 마음 속을 부유하던 의문들이 이 선서식에서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가 되어 다가왔다. "힘들어도 잘 할 수 있지?"

우리도 이런 맹세를 했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비록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에 의해 암기하도록 강요된 것이었지만 메시지만큼은 강렬했다. 아직도 생생한 이 문구를  되새기며 그동안 얼마나 충성된 삶을 살아 왔는지 자문해 본다.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 가족과 일터와 이웃에게 할 도리를 다하고 살아 왔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답이 궁색하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대상을 향하여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자신을 보니 마음이 더 무겁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할 만한 높은 경지는 고사하고라도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웃고, 울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힌 그 땅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마음이 편치 않은가 보다.

2천년 가까이 자기 땅 없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사뭇 다른 영토개념을 가지고 있다. 국경으로 구분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영역 즉, 정치,경제,  과학 등 각 분야에서 자신들이 두각을 나타내면 그것이 자기들이 지배하는 영토라는 생각이다. '한인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금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우리가 그렇게 개방적이고 막힘 없는 사고를 가지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비로소 우리 이민자들이 가슴마다 품고 있는 부채의식을 털어내고 "힘들어도 잘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야기를 함께 써내려 갈 수 있지 않을까?

선서를 마친 나는 이제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에서 캐나다 시민이 되었다. 국가에 대한 의무와 복종의 의미가 더 강한 피동적인 국민이기 보다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보다 능동적으로 권리를 찾아 행사하는 적극적인 시민이 되고 싶다.

하지만 어떤 국적을 가지든 우리가 한국인임은 피할 수 없는 일. 마음대로 버릴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앞으로 캐나다 시민으로서의 나의 삶은 개인의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두고 온 땅의 이름이 걸린, 세대를 잇는 마라톤 경주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것으로 우리가 평가 받고, 우리 커뮤니티의 가치가 정해지고, 그 바탕 위에  후세들의 삶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캐나다 한국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