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 지도를 봐라" 미국 고등학교의 수업 과제
[지도와 인간사 3] 15세기 조선 세계지도로 예루살렘 순례하기
지리, 역사 이야기는 쉬이 따분해지고 졸음이 옵니다. 고민 끝에 이야기 방식을 변환해 볼까 합니다. 가상의 상황을 빌려 이야기를 엮어보겠습니다. 물론 '지도와 인간사'의 내용 자체는 허구가 아니고 사실 그대로입니다. 고등학생 한 명을 등장시켜 길잡이 역할을 맡깁니다. 나그네(필자)도 별도의 역할을 하기는 할 겁니다. 이제 말머리를 학생에게 넘깁니다.
이곳 미국 땅에서 우리 선조들이 만든 강리도(우리나라 조상들이 1402년에 만든 세계지도, 정식 명칭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공부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미카 로즈만(Micah Roseman) 선생님 덕분이죠.
(관련 기사: 미 고교에서 가르치는 조선 문화재, 한국은?)
저는 한오공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오공(悟空)이 되어라, 허공을 깨쳐라' 그런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랍니다. 진도 출신이고요. 구기자, 살풀이춤, 운림산방(雲林山房) 등으로 유명한 그곳, 그러나 팽목항의 기억으로 물든 곳이기도 하지요.
미국에 오기 전에 우리 집안은 고깃배를 몇 척 가지고 있어서 유족한 편이었답니다. 엄마 아빠의 표정에서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수군거리시다가 제가 나타나면 얼른 입을 다물곤 하시더군요.
그러던 어느 봄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오공아, 우리 떠나자."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당신의 머리를 가리키시며 "여기에 귀신들이 득실거린다. 미국으로 가자"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가정사에 대해서는 말씀하는 투가 늘 이렇습니다. 밑도 끝도 없지요. 아버지는 거나해지시면 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공아. 공부는 해서 뭐 하냐. 응? 그냥 세끼 밥 먹고 몸 뉠 곳 있으면 됐지. 천하가 원래 다 네 것인데…"
앞으로 아버지가 여기 지도 이야기에 자주 설법을 하실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무 쓸모 없는 일이라면 뭐든지 모르시는 게 없다고 하시거든요. 아버지는 제게 공부 잘해라 하는 말씀을 한 번도 해보신 적이 없으세요. 그러나 제가 아버지로부터 지겹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기는 합니다.
"오공아, 남이 규정해 놓은 관점이나 지식은 이미 죽은 것이란다. 피라미드의 미라처럼 말이야. 마땅히 스스로 상상하고 찾아보고 사고해 보아야 한다. 호기심의 눈을 크게 뜨고 홀로 탐구해 보거라."
아버지는 독일 유학생 출신입니다. 철학 박사이시죠. 학업을 마치시고 금의환향해보니 시간 강사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합니다. 얼마 후 집어치우고 고향 진도로 돌아오신 후 물결 찰랑거리는 바닷가에서 어머니와 신접살림을 차리셨는데 그 수확이 저 오공이랍니다. 그 날 아침 아버지가 툭 던지시는 말씀에 '왜요'라고 여쭙는 대신 옆에 계신 어머니의 기색을 살폈지요.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합의하신 겁니다.
갑작스레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지난해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미국 땅에 내리자마자 아버지는 우리를 곧장 바다 같은 호숫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호수 이름은 노만 호수, 영어로는 Lake Norman. 제가 다니는 학교 이름도 Lake Norman High School이지요.
인근에 트럼프 골프장도 있더군요. 그 유명한 트럼프, 맞습니다. 아버지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같이 유학을 하셨던 친구분이 여기 도서관 관장이신 연고로 아버지가 사서로 일하게 되셨다나요.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강리도를 전혀 몰랐을 거예요.
어느 날 미카 로즈만 선생님 시간에 강리도 탐험이 시작되었지요. 학교 사이트에는 지도가 링크되어 있고 질문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답니다.
질문 항목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1.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 중국, 일본에 대한 한국의 상대적 크기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2. 이 지도의 중심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무엇을 시사하는가?
3. 지도 제작자들은 중국, 인도, 동남아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그로부터 무엇을 추론할 수 있는가?
4.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찾아보라. 여기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대목은 무엇인가? 두 지역의 상대적 크기와 아프리카의 형태도 이 기회에 알아 보라.
5. 유럽을 찾아 보라. 거기에서 어떤 지역이 가장 식별하기 쉬운가? 어떤 지역이 가장 모호한가? 이러한 차이는 당시 한국의 지도 제작자들이 서역(Far West)을 그리는데 사용했던 원천 자료에 대하여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6.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지도 제작자들이 이처럼 상세하고 광범위한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어렵지요? 정말입니다. 한국의 어떤 학교가 이렇게 깊이 탐구하겠어요? 우리나라 고지도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역만리 호숫가에서 이렇게 학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지 않나요?
설문 항목에 대하여 각자가 탐구한 결과를 가지고 가서 교실에서 토론을 하게 됩니다. 저는 사전 탐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여쭤보곤 하지요.
다음은 첫 번째 질문 항목에 대해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입니다.
오공 : 아빠, 강리도 이야기인데요. 첫 번째 질문의 첫 머리는 너무 쉬어요. 한국을 찾아 보아라. 이걸 못 찾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 너무 커요, 한국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을까요?
아빠 : 어디 지도 한 번 다시 보자꾸나. 한국이 크기는 엄청 크구나. 아프리카 대륙보다 더 크네. 상대적 크기로 따지면 중국보다도 훨씬 크구나. 그렇다면 훌륭한 지도로구나. 뭔가 이상해야 묘미가 있지.
오공 : 그런데 얘들이 웃지 않을까요?
아빠 : 그렇다면 너희 교실에 걸려 있을 세계지도를 보고도 웃어야지. 알고 보면 우스꽝스러울 테니까.
오공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아빠 : 자, 우선 놀랄 준비를 하거라. 이게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세계지도다. 이건 강리도와 달리 과학적인 지도이겠지? 정말 그럴까? 이제 진실을 보도록 하자. 아래 지도에서 맨 위 하얗게 그려져 있는 그린란드, 그리고 아프리카를 주시해 보자. 두 곳의 크기가 비슷하지 않냐? 이제부터 아빠가 자세히 얘기를 해보마.
왜 아프리카와 그린란드의 크기가 비슷하지?
놀라지 말아라. 그린란드의 실제 크기는 이렇단다. 아프리카의 1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의 세계지도에서는 아프리카와 비슷하게 나타나 있는 거란다.
이걸 봐라, 이게 아프리카의 실제 크기다. 미국, 중국, 인도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크지. 지금 우리가 늘 보는 세계지도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실재를 왜곡하고 있는 셈이지.
그렇다면 오공아, 우리는 왜 앞서 본 세계지도를 과학적이고 정확한 것이라고 믿어 온 걸까? 이게 어디서나 우리 앞에 나타나 '보라, 세상은 이렇게 생겼단 말이야' 하고 주술을 거는 까닭이란다. 400년이 넘게 그래 왔다는 말씀. 그래서 우리는 이와 다르게 생긴 지도를 보면 어, 이건 너무 이상해,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지. 이를테면 이런 세계지도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거북살스럽게 느껴지지 않나? 어딘가 크게 틀린 것 같기도 하고..
앞서 본 세계지도는 가장 일반화된 세계상으로, 16세기 네덜란드 사람 메르카토르(Mercator)가 고안한 투영법에 의한 것이지. 대륙의 형태는 비교적 정확하지만 상대적 면적은 크게 왜곡되어 있단다. 두 번째의 세계지도는 골-피터스(Gall- Peters) 투영법에 의한 것인데 1970년대에 독일의 피터스라는 사람이 메르카토르 지도에 반기를 들고나와 대안으로서 제시한 거란다. 이 지도를 보면 각 대륙의 상대적 면적은 비교적 정확한 반면 형태는 많이 왜곡되어 있지.
이 지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난 3월 보스턴의 공립학교에서는 일제히 '메르카토르'를 거둬 내고 그 자리에 '골-피터스'를 내걸었다니까 말이야. 그보다 일찍 유엔 기구인 유니세프, 유네스코에서도 골-피터스 세계지도를 채택한 바 있다지.
오공아, 듣고 있냐? 아빠는 지금 '16세기 네덜란드인 메르카토르가 틀렸고 20세기 독일인 피터스가 옳다' 고 말하려는 게 아니란다. 핵심은 이거다. 우리가 세계지도에서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늘 보는 세계지도나 강리도나 마찬가지라는 것! 데이비드 우드워드라는 분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분인데 이런 말씀을 하시지.
"지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그러나 그 창의 형태와 위치 그리고 창의 시야는 지도 제작자가 결정한다. 지도란 세계를 객관적으로 측량한 이미지라는 것이 통념이지만, 그건 단지 진실의 일부분에 불과할 따름이다. 문명권에 따라 지도는 각각 달리 그려진다." - DAVID WOODWARD, <지도의 역사> 대전(大典)편집장
오공 : 아빠, 그래도 구글 어스 세계지도는 다르지 않을까요? 정확할 듯한데.
아빠 : 넌 농담도 잘 하는구나. 구글 어스도 마찬가질 거야, 세계지도는. 알고 보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어. 네가 직접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삼차원의 구체를 이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지. 그 문제는 네가 더 탐구해 보아라.
오공아, 어쨌든 네가 앞으로 동서 고금의 많은 지도를 보게 될 터인데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지. 지도를 보면서 자칫, 어, 이거 틀렸네, 저것도 틀렸네, 아이코, 이건 말도 안 돼, 하고 눈을 돌려 버리는 일이지. 그러면 지도가 담고 있는 많은 것을 놓치고 말 테니까 말이야. 그 이상한 곳이 묘미가 있는 대목이거든.
강리도에서 예루살렘 찾기
한오공의 이야기는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 하고 다음 호로 이어갑니다.
이제 나그네(필자)가 강리도 지명으로의 탐험 여행을 안내할까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오공과 나그네가 쌍궤병행(雙軌並行)을 펼치겠습니다.
강리도에는 전체적으로 수천 개의 지명이 적혀 있는데 서양에는 약 100개, 아프리카에는 약 35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강리도에서 유럽의 지중해,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아드리아해 등이 분명히 식별된다. 유럽에서 네 개의 지명이 1154년의 알 이드리시 지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증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약 100개의 지명이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다, 이 지도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중략)" (David Woodward, <ENCOUNTER>)
6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지구 저 너머의 이역 땅에 새겨 놓은 수많은 지명들이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오랜 세월 잠들어 있습니다. 이제 깨워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세계사 속에 아로새긴 지리 정보의 캡슐을 이제 열어볼 때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어디서부터 지명 탐험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만일 한양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별로 신기할 게 없겠지요.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건? 1402년 세종 대왕이 여섯 살 소년 시절에 한양에서 그려진 지도에서 예루살렘 지명을 찾아본다는 것 자체가 판타스틱한 일이 아니겠어요?
강리도의 서역 지명은 아랍어 지명에서 유래된 게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어떻게 부르는지부터 알아봐야겠죠? 위키피디아가 금방 알려 줍니다. 영어로 옮기면 al-Quds. '알 쿠스', 혹은 '알 후스'(ㅋ와 ㅎ는 호환됨). 이제 이슬람 지도에서 al-Quds를 찾아 봅니다.
중세 이슬람 지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유명한 이드리시(Idrisi) 지도(1154년)입니다. 이드리시 지도는 중세 이슬람 지도의 압권이자 세계지도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지명 탐험 여행에 그림자처럼 동행해 줄 지도여서 약간의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이 지도는 이슬람 지도의 전통에 따라 남쪽이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향으로 돌려놓으면 아래와 같습니다. 1928년 독일인 Konrad Miller(1844-1933)가 현대적으로 재현한 지도의 모습이죠.
이 지도는 또한 우리나라를 신라라는 이름의 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완전하나마 우리나라를 동아시아 밖에서 지도에 수록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아래 지도(남쪽이 위)에서 신라를 찾아봅니다.
왼쪽 바다 아래 쪽 여섯 개의 섬에서 al sila(the Sila의 뜻)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오른쪽은 중국 땅입니다. al sin이라는 글자가 중국을 가리킵니다. 아랍 지리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지도와 우리의 강리도 사이에는 시간상으로 250년의 간격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지도의 지리 정보가 연동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드리시 지도의 재현본에는 아랍어 지명이 모두 로마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걸 징검다리로 삼아 우리는 강리도 지명 탐험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루살렘이 이드리시 지도에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후 그 발음에 해당하는 한자 지명을 강리도에서 찾아 보는 것이지요. 학자들이 탐구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제 al Quds를 이드리시 지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푸른색 데두리를 두른 네모 안을 봅니다. al kuds! 가 보입니다. 그 위에 둥근 화관 모양 안에는 '….이브라힘(아브라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이드리시 지도에서 예루살렘을 확인했습니다. 확대경을 대고 찾아 본 결과입니다. 이제 강리도에서 한자 지명을 찾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지도를 들여다봅니다.
붉은색 타원 안을 봅니다. 忽思! 중국어 발음으로 후스! 바로 Quds(쿠스/후스), 즉 예루살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이랍어 단어에서 맨 앞에 자주 나오는 al은 정관사 the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생략해도 무방).
또한 요단강이 거기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忽思 바로 위에는 都迷失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중국어로 '도우미스'. 다마스커스일 겁니다(스기야마의 지명 해독안). 놀랍지 않나요? 다음 호에서는 예루살렘이 다른 문명권의 지도에는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살펴본 다음, 시간이 남으면 바그다드와 카이로를 강리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이러한 세계의 개념화와 이미지화의 다양성을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미숙한 것'이라 하여 매도해버릴 때, 우리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놓치고 말 것이다. " - 와카바야시 마키오 <지도의 상상력>
이곳 미국 땅에서 우리 선조들이 만든 강리도(우리나라 조상들이 1402년에 만든 세계지도, 정식 명칭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공부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미카 로즈만(Micah Roseman) 선생님 덕분이죠.
▲ 미카 로즈만Micah Roseman선생님레이크 노만 고등학교 세계사 선생님 ⓒ 학교 사이트
▲ 미국 고등학교와 강리도레이크 노만 고교의 사이트내 강리도 ⓒ 학교 사이트
(관련 기사: 미 고교에서 가르치는 조선 문화재, 한국은?)
저는 한오공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오공(悟空)이 되어라, 허공을 깨쳐라' 그런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랍니다. 진도 출신이고요. 구기자, 살풀이춤, 운림산방(雲林山房) 등으로 유명한 그곳, 그러나 팽목항의 기억으로 물든 곳이기도 하지요.
미국에 오기 전에 우리 집안은 고깃배를 몇 척 가지고 있어서 유족한 편이었답니다. 엄마 아빠의 표정에서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수군거리시다가 제가 나타나면 얼른 입을 다물곤 하시더군요.
그러던 어느 봄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오공아, 우리 떠나자."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당신의 머리를 가리키시며 "여기에 귀신들이 득실거린다. 미국으로 가자"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가정사에 대해서는 말씀하는 투가 늘 이렇습니다. 밑도 끝도 없지요. 아버지는 거나해지시면 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공아. 공부는 해서 뭐 하냐. 응? 그냥 세끼 밥 먹고 몸 뉠 곳 있으면 됐지. 천하가 원래 다 네 것인데…"
앞으로 아버지가 여기 지도 이야기에 자주 설법을 하실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무 쓸모 없는 일이라면 뭐든지 모르시는 게 없다고 하시거든요. 아버지는 제게 공부 잘해라 하는 말씀을 한 번도 해보신 적이 없으세요. 그러나 제가 아버지로부터 지겹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기는 합니다.
"오공아, 남이 규정해 놓은 관점이나 지식은 이미 죽은 것이란다. 피라미드의 미라처럼 말이야. 마땅히 스스로 상상하고 찾아보고 사고해 보아야 한다. 호기심의 눈을 크게 뜨고 홀로 탐구해 보거라."
아버지는 독일 유학생 출신입니다. 철학 박사이시죠. 학업을 마치시고 금의환향해보니 시간 강사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합니다. 얼마 후 집어치우고 고향 진도로 돌아오신 후 물결 찰랑거리는 바닷가에서 어머니와 신접살림을 차리셨는데 그 수확이 저 오공이랍니다. 그 날 아침 아버지가 툭 던지시는 말씀에 '왜요'라고 여쭙는 대신 옆에 계신 어머니의 기색을 살폈지요.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합의하신 겁니다.
갑작스레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지난해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미국 땅에 내리자마자 아버지는 우리를 곧장 바다 같은 호숫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호수 이름은 노만 호수, 영어로는 Lake Norman. 제가 다니는 학교 이름도 Lake Norman High School이지요.
인근에 트럼프 골프장도 있더군요. 그 유명한 트럼프, 맞습니다. 아버지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같이 유학을 하셨던 친구분이 여기 도서관 관장이신 연고로 아버지가 사서로 일하게 되셨다나요.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강리도를 전혀 몰랐을 거예요.
어느 날 미카 로즈만 선생님 시간에 강리도 탐험이 시작되었지요. 학교 사이트에는 지도가 링크되어 있고 질문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답니다.
▲ 강리도강리도 이미지 ⓒ 류코쿠 대학
질문 항목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1.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 중국, 일본에 대한 한국의 상대적 크기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2. 이 지도의 중심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무엇을 시사하는가?
3. 지도 제작자들은 중국, 인도, 동남아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그로부터 무엇을 추론할 수 있는가?
4.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찾아보라. 여기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놀라운 대목은 무엇인가? 두 지역의 상대적 크기와 아프리카의 형태도 이 기회에 알아 보라.
5. 유럽을 찾아 보라. 거기에서 어떤 지역이 가장 식별하기 쉬운가? 어떤 지역이 가장 모호한가? 이러한 차이는 당시 한국의 지도 제작자들이 서역(Far West)을 그리는데 사용했던 원천 자료에 대하여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6.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15세기 지도 제작자들이 이처럼 상세하고 광범위한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어렵지요? 정말입니다. 한국의 어떤 학교가 이렇게 깊이 탐구하겠어요? 우리나라 고지도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역만리 호숫가에서 이렇게 학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지 않나요?
설문 항목에 대하여 각자가 탐구한 결과를 가지고 가서 교실에서 토론을 하게 됩니다. 저는 사전 탐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여쭤보곤 하지요.
다음은 첫 번째 질문 항목에 대해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입니다.
오공 : 아빠, 강리도 이야기인데요. 첫 번째 질문의 첫 머리는 너무 쉬어요. 한국을 찾아 보아라. 이걸 못 찾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 너무 커요, 한국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을까요?
아빠 : 어디 지도 한 번 다시 보자꾸나. 한국이 크기는 엄청 크구나. 아프리카 대륙보다 더 크네. 상대적 크기로 따지면 중국보다도 훨씬 크구나. 그렇다면 훌륭한 지도로구나. 뭔가 이상해야 묘미가 있지.
오공 : 그런데 얘들이 웃지 않을까요?
아빠 : 그렇다면 너희 교실에 걸려 있을 세계지도를 보고도 웃어야지. 알고 보면 우스꽝스러울 테니까.
오공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아빠 : 자, 우선 놀랄 준비를 하거라. 이게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세계지도다. 이건 강리도와 달리 과학적인 지도이겠지? 정말 그럴까? 이제 진실을 보도록 하자. 아래 지도에서 맨 위 하얗게 그려져 있는 그린란드, 그리고 아프리카를 주시해 보자. 두 곳의 크기가 비슷하지 않냐? 이제부터 아빠가 자세히 얘기를 해보마.
왜 아프리카와 그린란드의 크기가 비슷하지?
▲ 세계지도메르카토르 투영도법 ⓒ Wiki media
놀라지 말아라. 그린란드의 실제 크기는 이렇단다. 아프리카의 1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의 세계지도에서는 아프리카와 비슷하게 나타나 있는 거란다.
▲ 그린란드그린란드 실제 크기 ⓒ Citimetric.com
이걸 봐라, 이게 아프리카의 실제 크기다. 미국, 중국, 인도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크지. 지금 우리가 늘 보는 세계지도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실재를 왜곡하고 있는 셈이지.
▲ 아프리카 크기아프리카 실제 크기 ⓒ kai.sub.blue
그렇다면 오공아, 우리는 왜 앞서 본 세계지도를 과학적이고 정확한 것이라고 믿어 온 걸까? 이게 어디서나 우리 앞에 나타나 '보라, 세상은 이렇게 생겼단 말이야' 하고 주술을 거는 까닭이란다. 400년이 넘게 그래 왔다는 말씀. 그래서 우리는 이와 다르게 생긴 지도를 보면 어, 이건 너무 이상해, 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지. 이를테면 이런 세계지도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 골-피터 세계지도골-피터 투영도법에 의한 지도 ⓒ Wikimedia
거북살스럽게 느껴지지 않나? 어딘가 크게 틀린 것 같기도 하고..
앞서 본 세계지도는 가장 일반화된 세계상으로, 16세기 네덜란드 사람 메르카토르(Mercator)가 고안한 투영법에 의한 것이지. 대륙의 형태는 비교적 정확하지만 상대적 면적은 크게 왜곡되어 있단다. 두 번째의 세계지도는 골-피터스(Gall- Peters) 투영법에 의한 것인데 1970년대에 독일의 피터스라는 사람이 메르카토르 지도에 반기를 들고나와 대안으로서 제시한 거란다. 이 지도를 보면 각 대륙의 상대적 면적은 비교적 정확한 반면 형태는 많이 왜곡되어 있지.
이 지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난 3월 보스턴의 공립학교에서는 일제히 '메르카토르'를 거둬 내고 그 자리에 '골-피터스'를 내걸었다니까 말이야. 그보다 일찍 유엔 기구인 유니세프, 유네스코에서도 골-피터스 세계지도를 채택한 바 있다지.
오공아, 듣고 있냐? 아빠는 지금 '16세기 네덜란드인 메르카토르가 틀렸고 20세기 독일인 피터스가 옳다' 고 말하려는 게 아니란다. 핵심은 이거다. 우리가 세계지도에서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늘 보는 세계지도나 강리도나 마찬가지라는 것! 데이비드 우드워드라는 분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분인데 이런 말씀을 하시지.
"지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그러나 그 창의 형태와 위치 그리고 창의 시야는 지도 제작자가 결정한다. 지도란 세계를 객관적으로 측량한 이미지라는 것이 통념이지만, 그건 단지 진실의 일부분에 불과할 따름이다. 문명권에 따라 지도는 각각 달리 그려진다." - DAVID WOODWARD, <지도의 역사> 대전(大典)편집장
오공 : 아빠, 그래도 구글 어스 세계지도는 다르지 않을까요? 정확할 듯한데.
아빠 : 넌 농담도 잘 하는구나. 구글 어스도 마찬가질 거야, 세계지도는. 알고 보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어. 네가 직접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삼차원의 구체를 이차원의 평면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지. 그 문제는 네가 더 탐구해 보아라.
오공아, 어쨌든 네가 앞으로 동서 고금의 많은 지도를 보게 될 터인데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지. 지도를 보면서 자칫, 어, 이거 틀렸네, 저것도 틀렸네, 아이코, 이건 말도 안 돼, 하고 눈을 돌려 버리는 일이지. 그러면 지도가 담고 있는 많은 것을 놓치고 말 테니까 말이야. 그 이상한 곳이 묘미가 있는 대목이거든.
강리도에서 예루살렘 찾기
한오공의 이야기는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 하고 다음 호로 이어갑니다.
이제 나그네(필자)가 강리도 지명으로의 탐험 여행을 안내할까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오공과 나그네가 쌍궤병행(雙軌並行)을 펼치겠습니다.
강리도에는 전체적으로 수천 개의 지명이 적혀 있는데 서양에는 약 100개, 아프리카에는 약 35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강리도에서 유럽의 지중해,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아드리아해 등이 분명히 식별된다. 유럽에서 네 개의 지명이 1154년의 알 이드리시 지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증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약 100개의 지명이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다, 이 지도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중략)" (David Woodward, <ENCOUNTER>)
6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지구 저 너머의 이역 땅에 새겨 놓은 수많은 지명들이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오랜 세월 잠들어 있습니다. 이제 깨워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세계사 속에 아로새긴 지리 정보의 캡슐을 이제 열어볼 때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어디서부터 지명 탐험 여행을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만일 한양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별로 신기할 게 없겠지요.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건? 1402년 세종 대왕이 여섯 살 소년 시절에 한양에서 그려진 지도에서 예루살렘 지명을 찾아본다는 것 자체가 판타스틱한 일이 아니겠어요?
강리도의 서역 지명은 아랍어 지명에서 유래된 게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아랍어로 어떻게 부르는지부터 알아봐야겠죠? 위키피디아가 금방 알려 줍니다. 영어로 옮기면 al-Quds. '알 쿠스', 혹은 '알 후스'(ㅋ와 ㅎ는 호환됨). 이제 이슬람 지도에서 al-Quds를 찾아 봅니다.
중세 이슬람 지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유명한 이드리시(Idrisi) 지도(1154년)입니다. 이드리시 지도는 중세 이슬람 지도의 압권이자 세계지도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지명 탐험 여행에 그림자처럼 동행해 줄 지도여서 약간의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이 지도는 이슬람 지도의 전통에 따라 남쪽이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향으로 돌려놓으면 아래와 같습니다. 1928년 독일인 Konrad Miller(1844-1933)가 현대적으로 재현한 지도의 모습이죠.
▲ 이드리시 세계지도이드리시 세계지도 재현본 ⓒ 김선흥
이 지도는 또한 우리나라를 신라라는 이름의 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완전하나마 우리나라를 동아시아 밖에서 지도에 수록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아래 지도(남쪽이 위)에서 신라를 찾아봅니다.
▲ 이드리시 지도 이드리시 지도 상의 신라 ⓒ 김선흥
왼쪽 바다 아래 쪽 여섯 개의 섬에서 al sila(the Sila의 뜻)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오른쪽은 중국 땅입니다. al sin이라는 글자가 중국을 가리킵니다. 아랍 지리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지도와 우리의 강리도 사이에는 시간상으로 250년의 간격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지도의 지리 정보가 연동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드리시 지도의 재현본에는 아랍어 지명이 모두 로마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걸 징검다리로 삼아 우리는 강리도 지명 탐험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루살렘이 이드리시 지도에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후 그 발음에 해당하는 한자 지명을 강리도에서 찾아 보는 것이지요. 학자들이 탐구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제 al Quds를 이드리시 지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푸른색 데두리를 두른 네모 안을 봅니다. al kuds! 가 보입니다. 그 위에 둥근 화관 모양 안에는 '….이브라힘(아브라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 이드리시 지도 이드리시 지도 상의 예루살렘 ⓒ 김선흥
이렇게 이드리시 지도에서 예루살렘을 확인했습니다. 확대경을 대고 찾아 본 결과입니다. 이제 강리도에서 한자 지명을 찾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지도를 들여다봅니다.
▲ 강리도강리도상의 예루살렘 ⓒ 김선흥
붉은색 타원 안을 봅니다. 忽思! 중국어 발음으로 후스! 바로 Quds(쿠스/후스), 즉 예루살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이랍어 단어에서 맨 앞에 자주 나오는 al은 정관사 the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생략해도 무방).
또한 요단강이 거기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忽思 바로 위에는 都迷失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중국어로 '도우미스'. 다마스커스일 겁니다(스기야마의 지명 해독안). 놀랍지 않나요? 다음 호에서는 예루살렘이 다른 문명권의 지도에는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를 살펴본 다음, 시간이 남으면 바그다드와 카이로를 강리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사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이러한 세계의 개념화와 이미지화의 다양성을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미숙한 것'이라 하여 매도해버릴 때, 우리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놓치고 말 것이다. " - 와카바야시 마키오 <지도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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